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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숨통을 누르는 내 손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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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숨통을 누르는 내 손을 돌아봅니다"

[세월호 100일 릴레이 기고] '아이를 구하라' 외치기 전 할 일들

* 이 글은 <프레시안> 손문상 화백이 세월호 참사 직후 팽목항 현지 취재를 다녀온 뒤 쓴 글입니다. 지인들이 함께 하는 사이트에 올렸던 글을 일부 수정했습니다. 시일이 좀 지난 글이지만, 그동안 물리적인 시간이 지난 것 빼고 상황은 바뀐 게 없는 현실이 더욱 서글퍼지는 '오늘'입니다. 편집자

진도에 다녀 온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사건초기 비난의 목소리로 연일 들리던 언론의 취재행태를 고스란히 내 몫으로 받아들이자, 돌을 맞더라도 또 다른 내 몫의 일은 그 현장에 분명 있을 것이라 믿으며 팽목항으로 내려갔던 5일간의 취재였습니다.

다녀와서는 정말 조용히 숨죽이고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시신을 찾은 유족이나 실종자 가족의 상처에는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진도 현장의 기자들 역시 지금도 매일을 현장의 어두운 무게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예리하게 날선 사안을 취재하며 쉬 드러낼 수 없는 심리적 내상 역시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욕먹을 방식으로 일을 하는 어린기자들도 있지만 이들도 사람임에 다르지 않아 뒤돌아서는 무척이나 아파 어쩔 줄 몰라 합니다.

25년을 언론종사자로 있으면서 삼풍을 비롯해 온갖 재난사고를 접했으나 오늘의 세월호 사건만큼 참극의 아픔조차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다가온 재난은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이번 취재 중 가장 곤혹스럽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팽목항 해경 선착장 주위에 천막으로 마련된 ‘1차 검안소’ 부근을 지날 때입니다. 이 곳은 사고 해역에서 수습된 아이들의 시신이 신원 확인을 거쳐 부모님들과 처음 만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그 어떤 재난 취재 중에도 경험한적 없는 아이 엄마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 입니다.

표현하길 울음이지, 비명인지 괴성인지, 그것이 정말 울음인지도 구별되지 않는 아니, 표현할 수조차 없는 오히려 짐승 소리에 더 가까운 젊은 엄마들의 ‘통곡과 절규’ 입니다. 그 소리는 검안소가 팽목항 차량 통제선 안쪽 외길 도로변에 있어서 보도진을 포함한 팽목항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한동안 긴 거리를 걸으며 지속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 '통곡의 커튼'. 커튼 안쪽에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 커튼 너머 경찰들도 괴로워하고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취재를 마치고 올라와서는 그 후 진행되는 뉴스를 가급적 안 봤습니다. 숨죽인 지난 일주일은 제 마음속에서 쉬지 않고 공명하는 그 소리를 저의 심리적 저변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가라앉히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기서 배의 결함과 ‘해피아’, 늑장 대응, 구조의 혼선, 해경과 세월호 선사, 정부의 무능 등. 오늘 이 참극의 원인과 은폐된 진실의 무수한 ‘각론’들을 논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나’를 비롯해 진실로 이 참극의 ‘잉태지점’이 어디인지, 언제나 늘 생각 해오던 나 자신과 우리 모두의 ‘이율배반’과 ‘위악’에 관한 것을 말하려 합니다.

저는 그에 앞서 먼저 고백하려 합니다. 이 고백의 시점은 부모들뿐만 아닌 ‘아이를 위해서’라는, 너무 본질적이어서 동시대 모든 부모들에게 ‘화석’이 되어버린 ‘원죄’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여 년 간 서서히 이 땅에 구축된 유례없는 ‘지옥의 체제’를 완성해 나가는데 일조하고 최소한 뒤쳐지지 않으려 이 ‘살인체제’의 막차는 늘 놓치지 않고 탔던 ‘침묵의 동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어설픈 성찰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동안 유행했던 ‘내 탓이요’ 캠페인처럼 죄의식의 일반화로 물 타기를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팽목항에서 분명히 목격한 것은 세월호 참극과 거대한 이 ‘살인의 체제’가 오랜 시간 나의 의지뿐 아니라 우리의 수많은 일상의 선택들과 구체적으로 ‘공모관계’를 해왔다는 사실의 거듭된 확인입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 노동자 대투쟁을 지나서도 효율과 저비용 ‘중산층 신화’에 내 아이조차 자유롭지 못할 ‘비정규’라는 노동의 유연성에 사회적 합의를 해준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럼 없이 뒤로는 내 아이를, 그 아이들 중 좀 더 ‘경쟁력 있는 임노동자’로 만들 궁리 끝에 다양성과 경험의 이름으로 포장해 ‘영어 몰입’을 주도적으로 해온 세대이며, ‘사회적 안전과 규제’는 암 덩어리라고 떠드는 인간적 공감제로의 두 대통령을 맞이하고 사실상 묵인한 세대입니다.

두 번의 민주정부를 만들었다는 착각에 ‘민주주의’ 쯤은 투표함에 쑤셔 넣은 몇 번의 투표용지로 대신했습니다. 그 민주정부에서도 노동자들은 1000일을 넘도록 농성했고 제주 강정과 밀양과 삼성 백혈병 노동자들의 비극을 사실상 외면했습니다. 어쩌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 이명박의 퇴진과 박근혜의 하야를 외치면서도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지구상 어느 나라 아이들보다 자살을 많이 합니다. 그 근본적 원인인 대학의 서열화와 기업화엔 매번 내 아이의 선택을 핑계 삼아 눈을 감았습니다.

혹자는 말할 겁니다. 온 지구에 휘몰아친 지난 수십 년 광풍과도 같은 자본의 공세와 신자유주의에 어느 국가 어느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었겠냐고 말입니다.

저 역시 어느 학자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사실 자체나 일반적 해석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이 취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식의 태도 역시 '부인'의 범주에 속한다 합니다.

바로 이 지점. 저와 우리 모두의 이 ‘부인’이 가져온 오늘 참극의 결과에 최소한의 부끄러움과 염치가 있다면 ‘아이를 구하라’ 외치기 이전에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움켜쥐고 숨통을 조르고 있는 내 자신의 손이 있는지 돌아보고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2000년 전 유대사회의 제사장들보다 당시 개혁세력이라 참칭하던 바리세인의 위선에 더 노여워한 예수의 분노에 주목합니다.

저 또한 세월호 참극이 사회적으로 수습되고 시간이 지나 이 상처의 고통이 일상에서 지금보다 견딜만해 진다해도 저는 제가 쏟아놓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거두는 사람임을, 그 ‘이율배반’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알량한 잔해들을 제 손으로 평생 치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겠습니다.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세월호 참사 100일을 기해 '반성합니다' 릴레이 기고를 받고 있습니다. 릴레이 기고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먼저 <프레시안>부터 반성하겠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노동자에서 정치인까지, 익명도 좋고 기명도 좋습니다. 분량도 상관없습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은 글을 써서 sns@pressian.com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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