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안전 제일>이라는 단편입니다. 주인공은 수백 명의 운명을 책임진 여객선 선장입니다. 어느 날, 선장은 배에 구멍이 나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배가 가라앉을 것으로 판단해 해운회사와 정부에 구조 신호를 보냅니다. 다행히 선장의 빠른 판단력으로 승객들은 전원 구조됩니다.
그런데 배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항구에 무사히 정박했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승객을 구조선에 태워 보낸 선장이 계산이 틀렸던 겁니다. 배는 위태한 상태에서 바다 위를 떠 왔습니다. 그래도 선장은 땅을 밟은 후 비로소 안심을 했고, 승객이 전원 구조됐다는 사실에 대해 ‘영웅적인 일’을 했다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해운 회사는 선장을 해고합니다. 해운 회사의 사장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배에 값비싼 의사를 부른 선장을 '비겁자'라고 칭했습니다.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겁니다. 처음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신문은, 시간이 흐른 후 '알고 보니 선장이 비겁자였다'는 이야기를 써 판매 부수를 올렸습니다.
여론은 그를 '겁쟁이' '비겁자'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승객을 구조선에 태워 내보낼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역경을 헤쳐나갔어야 했다는 겁니다. 선장이 배에 난 작은 구멍에 겁을 먹어 과잉 대응했다는 것이죠. '영웅적인 결단'을 내린 선장을 고용하려는 해운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선장은 씁쓸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민낯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 제일>은 우리의 얄팍한 본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준석 선장은 <안전 제일>과 같은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을 지도 모릅니다. 사고 해역에서 사진을 찍고, 의전을 신경쓰던 많은 사람들, 사고 당일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도 몰랐던 청와대 비서실장까지도, 모두가 <안전 제일>과 같은 상황을 두려워했을 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을 살리는 것보다, 어떤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지, 어떤 비난을 감내해야 할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배는 가라앉았습니다. 304명의 사망실종자는 차가운 바다 속에서 결국 나오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안전 제일>에 등장하는 군중이었을 수 있었습니다. 선주였을 수도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만약 침몰하지 않았다면 <안전 제일> 속 등장 인물들처럼, 우리는 그저 그런 사람들을 비판한 후에 또 다시 제 2의 세월호가 운행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겁니다. 우리 사회의 '세월호'들은 안심하고 일상 곳곳에서 운행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안전 제일>의 군중이 될 수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많은 현실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부인하고 싶은 일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물론 일부는 여전히 현실을 부인하고,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생떼 같은 아이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수장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에게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을 쏟아냅니다. '자식 죽은 것이 유세냐, 권력이냐'라고 말이죠. 선거 분위기에 묻혔는지, 주요 일간지에는 어느덧 '세월호 특별법'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세월호 참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분노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우리 모두에게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에게 책임질 것을 물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 스스로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사고 후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배 한 척이 가라앉은 사건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침몰한 사건으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분노는 있는데, 반성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심지어 책임은 묻는데, 지는 이는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 모두의 자화상'으로 여긴다면,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할 것은 '반성'입니다. 책임져야 할 사람, 반성해야 할 사람이 하지 않는다면, '왜 너희는 반성하지 않느냐'고 삿대질하기보다는 우리가 먼저 책임지고 반성해 저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반성'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책임지는 이가 없는데, 왜 우리가 반성해야 하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릅니다. 또 반성은 책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프레시안>은 '반성'합니다. 기자들이 싸잡아 '기레기'로 불리게 된 것에 '반성'하고, '워치 독'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한 데 대해 반성합니다. 나아가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나눠 지고 있는 시민의 입장에서 '반성'합니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했던 안이한 행동들이 세월호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들, 쓴소리하는 지식인들을 외면했던 것에 대해서도 반성합니다. 이 같은 취지로 <프레시안>은 '반성합니다' 릴레이 기고 연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반성'은 일상에서 시작합니다. 반성하는 것만이 새로운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작은 열쇠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우리 사회를 '세월호'로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서 '반성'은 시작됩니다. <안전 제일>에 등장하는 군중으로 남아 있기에, 우리는 너무나도 멀리 왔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봤고, 너무 많은 것에 분노했습니다. 지금, 유족들이 곡기를 끊고 있고, 어떤 '누군가'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방해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는, 아직 차디찬 바다 속입니다.
'반성합니다' 릴레이 기고는 세월호 참사 100일 째인 7월 24일부터 시작됩니다. 릴레이 기고는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먼저 <프레시안>부터 반성하겠습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노동자에서 정치인까지, 익명도 좋고 기명도 좋습니다. 분량도 상관없습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은 글을 써서 sns@pressian.com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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