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직업인지라 인연을 돌아보면 그 사람과 어떤 자리에서 처음 만났는지, 첫인상이 어땠는지 정도는 먼지를 좀 털어내면 떠오른다. 그런데 이사람,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아마도 진보의 맹장들이 제도 정치의 벽을 뚫고 국회로 대거 진출한 2004년 총선 즈음이었을 것이다. 화려한 날들이었다. 쟁쟁한 진보정치 신예들과의 만남은 관성화된 '정보 노동'에 염증이 돋던 기자에게도 자극이었다. 그렇게 섞이고 어울리다 첫 만남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게 익숙해진 사람, 박창규 조합원이다.
시의성부터 따지는 직업병이라고 해도 괜찮겠다. 요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서울 동작을에서 그가 '또' 일을 벌인지라, '이 주의 조합원' 대상으로 제격이다 싶었다. 박 조합원은 정의당 노회찬 전 의원의 오랜 참모이자 동지다. 1992년,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연을 맺은 노 전 의원과 사반세기를 함께 먼지 나는 길을 걸어왔다. 함께 치른 크고 작은 선거만 예닐곱 번.
"이번에도 선배가 노회찬 의원 등을 떠밀었다면서요?"
"진보정치의 리더로서, 진보정치가 어려운 상황에선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봅니다. 나도 정당의 당직자로서, 정당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선 노 의원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거죠."
당선 가능성부터 살피는 얄팍한 내 눈엔 또 '맨 땅에 헤이딩'인데, 뭐가 만날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건지.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되면 욕먹기 딱 십상인데 좀 쉬어가면 안 되나? 모처럼 가족들과 제주도로 여름휴가 가 있어야 할 사람이 비행기표 물리고 이게 웬 사서 고생?
"정치가 계획대로만 되는 게 아니니까요." 덧붙이길,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는 프레시안 기자들도 마찬가지일 텐데?" 할 말 없어졌다.
마들연구소가 있는 노원병이 눈에 밟히고, 무엇보다 민주노동당에서 한솥밥 먹던 노동당 김종철 후보와 겨루게 된 처지도 난감하다. "종철이 얘기는 좀… 허허허." 그 심정 어렴풋 안다. 그래서 고약한 질문은 거뒀다. 에둘러 답하기를,
"(2004년) 원내정당이 된 이후의 일들에 대해선 나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를 지지해준 노동자들, 농민들, 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해주는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종북논란, 패권논쟁, 분당, 통합진보당 사태를 겪으면서 진보정치가 좌절을 한 거죠."
자책을 했지만, 사실 박 조합원은 '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해주는 역할'에 충실한 진보정당인이다. 2001년부터 학교급식조례제정 운동을 제안해 기어코 법안을 만든 주역이 바로 그다. 노회찬 전 의원의 대표 브랜드인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 인하 운동도 그의 손을 거쳤다. 2006년 조승수 전 의원과 함께 성사시킨 에너지기본법은 에너지 복지에 관한 제도적 출발점이 됐다.
"그런 건 정말 정책 스텝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죠. 이젠 이해당사자가 있는 경제민주화 운동을 해보고 싶어요.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재벌 소유구조가 아니라 노동자들, 중소기업 등 경제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화하는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공정거래 분야의 집단소송제 같은 건 매우 중요합니다. 이건 박근혜 대통령 공약이기도 하거든요."
비록 진보정치가 다시 황무지에 내몰렸지만, 프레시안은 진보정치에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비주류 편입의 역사라면, 이들이 저변에서 국민들 삶에 각인시킨 진보의 과실들은 약자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프레시안의 성장에도 토양이 됐다고 본다.
덕담으로 한 말이 아닌데 덕담으로 되갚았다. "프레시안에겐 늘 고맙고 미안하죠.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반갑기도 했고…. 협동조합이라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데 조합원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에요."
"그런 거 말고 조합원으로서 아쉽거나 바라는 걸 말씀해 달라고요."
"음…, 협동조합은 출자, 경영, 결과물을 함께 소비하는 3위 일체인데, 그런 면에서 프레시안이 제공하는 기사를 소비하는 것은 되는데 함께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확대돼야 할 것 같아요. 참여의지가 있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도록 열린 프레시안이 되기를."
"박창규 선배 맛있는 거 사주라"는 편집국장의 명을 받아 인터뷰가 끝나고 밥을 함께 먹었다. 나는 갈비탕을, 그는 육개장을 시켰다. 난 맛있게 먹었다. 그도 맛있었기를. 선거 끝난 뒤에 다시 보자 했으니, 그때 '구리참새(동작)' 안주 삼아 마실 소주도 부디 달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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