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철종입니다. 철종은 흔히 강화도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조 이후 정쟁 과정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강화도로 유폐된 사도세자의 아들 은언군 이임의 손자가 바로 훗날 철종이 된 이원범입니다. 후사 없이 죽은 헌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새로운 왕을 찾아야했던 왕실, 정확히 말하면 안동 김 씨 세력은 강화도의 농사꾼 이원범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원범은 갑작스럽게 궁궐로 들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죠. 농사꾼에서 왕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철종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하고 조선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이 왕을 괴롭히던 건강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낮은 한의학'은 (개인에게도 조선에게도 동시에) 비극적이었던 그 삶을 되돌아봅니다. <편집자>
왕이 된 강화도령
정원용이 남긴 <경산일록>을 보면, 헌종이 죽고 이틀 후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부분이 이렇게 담담히 묘사된다.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사도세자는 한 명의 정실과 두 명의 후궁에게서 모두 5남 3녀를 낳았다. 적장자 정이 어린 나이에 죽자 둘째 산이 왕세손이 되어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가 되었다. 두 번째 후궁 순빈 임 씨의 두 아들 중 첫째 아들 은언군 임의 세 번째 아들 전계군 이광이 바로 철종의 아버지다.
한때 정조의 총예를 한 몸에 받으며 조정을 호령했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 홍 씨)으로 들였으나 아이 없이 죽고 말았다. 그러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자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왕위를 잇게 하려 했다. 이런 시도는 결국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던 정조가 홍국영과 갈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똥은 은언군의 일가로 튀었다. 1786년(정조 10년) 아들 담(湛)이 모반죄로 유폐를 당하자, 그 친아버지 은언군도 강화로 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은언군은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아내 송 씨와 며느리 신 씨가 가톨릭 신부로부터 영세 받은 일로 아내, 며느리와 같이 죽임을 당했다.
은언군의 손자이자 철종의 이복형 회평군 명도 모반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면서, 은언군 일가는 허울뿐인 왕족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철종이 갑작스럽게 헌종의 뒤를 이은 까닭은 무엇일까?
철종(1831~1863년, 재위 1849~1863년)의 즉위는 안동 김 씨의 장기 집권 책략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 씨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그는 왕위를 이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19세 농부에 불과했다.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은 불가피했다.
철종 2년(1851년) 9월, 순원왕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이 왕후로 들어오면서 안동 김 씨의 위세는 더욱더 세졌다. 1852년부터 철종은 직접 통치를 했지만, 이미 안동 김 씨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해 민생고로 인한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최제우가 주창한 동학이 민심을 파고든 것도 바로 이 때다.
왕이 막걸리를 찾았던 이유
할아버지, 할머니, 이복형까지 죽임을 당한 마당에 궁궐 안에 들어와 안동 김 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여러 야사는 철종이 왕이 되고 나서도 강화에서 농사지으며 마시던 막걸리와 우거짓국을 잊지 못했다고 전한다. 철종은 왕비가 사가에서 구해온 막걸리를 즐겨마셨다.
이런 철종의 상황은 건강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 강화에서는 없었던 온갖 질병이 나타난 것이다. 철종은 왕이 되고 나서 한평생 한약을 먹다가 죽었다 할 정도로 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그 약마저도 그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처방된 약물을 살펴보면, 그가 겪었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잘 보여준다.
철종이 복용한 약물은 대부분 보약이다. 조선 후기의 의학 흐름이 질병 치료보다는 예방 위주의 보약이 우선이었던 데다가, 급격한 환경 변화에 노출된 철종 자신이 허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임종이 가까웠던 33세(1863년) 때, 세 번이나 지속적으로 처방된 특별한 처방이 눈에 띈다. 바로 '교감단'이다.
교감단은 교감귀비탕, 교감지황탕, 교감군자탕으로 귀비탕, 지황탕, 군자탕과 합방하여 복용한다. 교감단을 처방하는 병증은 <동의보감> '기울증' 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기울은 기가 몰려서 풀리지 않는 증세다.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이 마음에 맞지 않거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억울하거나 고민하다 보면 칠정이 상하여 음식을 먹고 싶지 않고 얼굴이 누렇게 뜨면서 몸이 여위고 가슴 속이 답답해진다. 교감단은 바로 이른 기울증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인 것이다."
탈영증과 실정증이라는 증상에도 교감단은 효과적인 처방이다. 이 증상은 신분 추락에 따른 부담으로 근심 걱정이 생겨 신경증이 된 것이다. 예를 들면, 귀족으로 살다가 천민이 되거나 부자로 살다가 가난해져 심리적인 허탈감이 몸을 수척하게 하거나 기운이 없어지게 하는 증상이다.
이런 처방을 염두에 두면, 철종은 갑작스런 신분 변화와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고통을 받았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왕의 보약은 사실은 강장제
철종이 가장 자주 고통을 호소한 질병은 소화 불량 증세였다.
왕위에 오른 직후인 20세 때도 사군자탕 계열의 가미군자탕이나 향사이진탕을 복용하였고, 26세와 30세가 되면서 체증을 자주 호소하여 향사육군자탕 계열의 처방이나 사군자탕 계열의 처방을 자주 복용하였다. 심지어 공진단 계통의 보약을 처방할 때도 반드시 소화를 돕는 사군자탕 계열의 공진군자탕으로 복용하였을 정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철종이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가장 자주 복용한 처방은 의외로 강장 처방이 대부분이었다.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즉위 이듬해인 1850년 1월 20일부터 철종은 가미지황탕을 지속적으로 복용했다. 가미지황탕은 육미지황탕에 몇 가지 약재를 가감한 것이다. 육미지황탕 복용의 의미를 <동의보감>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들이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성생활을 하여 정기가 줄어들거나 타고난 체질이 허약한데도 불과하고 성생활을 많이 하여 원기가 너무 쇠약해져서 식은땀이 나거나 정액이 절로 흐르며 정신이 피로하고 권태감이 심하며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지 않고 손발바닥에 열이 나는 증세를 말한다."
철종이 꾸준히 보용된 공진단 처방의 의의도 대동소이하다.
"남자가 장년기에 이르러 진기가 몹시 약한 것은 타고 날 때부터 약하고 허한 것이 아니므로 성질이 마른 약재를 쓰지 말아야 한다. 진기를 보하는 약품은 많으나 약효가 매우 약하여 효력을 보기 어렵다. 이럴 때는 바로 이 처방을 쓴다."
철종에게 자주 처방된 귀용원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음혈(진기)이 고갈되어 얼굴빛이 거무스레하며 귀가 먹고 눈이 어두우며 다리가 약하고 허리가 아프며 오줌이 뿌연 것을 치료한다."
25살이 되는 해 여름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생녹용을 일컫는 수용(水茸)도 복용했다. 녹용의 보양 효과는 정력 강화의 의미가 크다. 즉, 안동 김 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에게 철종은 일종의 '종마'였던 것이다. 철종은 매일 녹용, 공진단, 귀용탕, 육미지황탕으로 보신하면서 후사를 두는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철종은 철인왕후 김 씨를 비롯하여 8명의 부인과 5남 1녀의 자식을 낳았다. 또 여색을 즐겨서 조정 일을 더욱더 방치했다. 하지만 이런 철종의 자손 중에서 정작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은 박영효에게 시집간 영혜옹주 한 사람이었다. 결국 철종은 19세에 즉위해 3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숨을 헐떡이는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인물이 바로 강화도령 철종이었다. 그의 불행한 삶은 좋은 약이 건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삶이야말로 건강을 지키는 핵심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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