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오전,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현수막을 펼쳤다. 2009년 정리해고 사태 이후 얼마나 많은 현수막을 같은 장소에서 펼쳤던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은 줄어갔다. 해고 노동자들의 절규는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당연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7.30 재보선 출마를 선언한 이 날은 달랐다. '한쪽 귀퉁이에서라도 죽지않고 함께 살 순 없는 것이냐'며 '목숨 뺏는 정치를 끝내겠다'고 했다. 그런 그의 음성에 발맞춰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족히 10대는 넘어 보이는 카메라가 그를 향해 움직이더니, 회견장 밖에서까지 기자들은 질문을 이어갔다.
회견이란 것에 도가 틀 법도 한 그지만, 내심 "당황했다"고 한다. 2009년 정리해고 사태 이후 급격히 찾아온 노안으로, 회견장 안에서는 출마 선언문이 보이질 않아 애를 먹었다. 믿을 건 함께 서 있는 동료 해고자들과, 전날 공장 안 동료가 전해준 쌍용차 작업복. 44세 해고 노동자 김득중은 이렇게 경기 평택을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김 후보를 놀래킨 이런 관심은, 어찌보면 '반증'이다. 그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고, 고위 공직자 출신도 아니다.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도 아니며, 유명 탤런트 출신도 아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했고, 지금은 법원으로부터 '부당 해고' 판결을 받아 든 해고자다. 그런 그가 국회의원을 하겠다니, 그 발상이 왠지 비현실적이라 쏟아진 관심은 아니었을까.
27일 오전 평택시청 인근 선거대책본부 사무실에서 김득중 후보를 만났다. 왜 출마했느냐고 물으니 "이젠 정말 살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여당에 읍소하고 야당에 기댄 채 장례만 치렀다. 약속이란 말만 들어도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출마 선언문에 쓴 그다. "이제는 쌍용차 사태는 물론, 노동자들이 당면한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싶다"며 "당선을 목표로 완주할 것"이라고 밝혔다. <편집자>
프레시안 : 불과 약 다섯 달 전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해고 무효 판결을 받았다. 2009년 당시 쌍용차에 구조적이고 지속적인 경영 위기가 입증되지 않는다는 판결이었다. 유형자산 손상차손 과다계상이라는 일종의 해고 조작까지 있었다는 게 드러나 공장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이전보단 높아졌는데, 국회의원 출마를 선언했다.
김득중 : 해고 무효 판결이 난 2월 7일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공장 안(비해고자)과 밖(해고자)으로 나뉘어 있던 동료들이 반목을 해소하고 마음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아 얘네가 하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구나' 하며 우리 목소리를 경청해 주는 동료들이 늘었다.
당장 회견 날 입었던 작업복만 해도, 공장 안 동료가 출마 소식을 듣고 '얼른 현장을 돌아오길 바란다'며 전날 보내준 것이다. 쌍용차 대주주가 마힌드라로 바뀐 이후 새로 만들어진 작업복인데 운 좋게 체격이 비슷해 사이즈가 얼추 맞았다. 바지는 좀 짧아 그날은 살짝 내려서 입긴 했다. (웃음)
해고 무효 판결에도, 회사는 완강한 입장이다. 바로 상고했고, 새로운 법무법인을 3개나 새로 선정했다. 19명의 변호사를 선임하며 대법까지 끝을 보겠다고 하고 있다. (☞관련 기사 보기 : <"재판 이겼지만 상처 그대로…시간은 쌍용차 편">, <쌍용차 해고 무효 판결에 법정 '울음바다' >)
프레시안 : 그렇다면, 재보선 출마는 쌍용차 사태 해결을 위한 수단인가.
김득중 : 처음에는 그런 고민 속에서 논의가 시작됐다. 올해 10월이 되면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쌍용차는 이미, 10월부턴 신차(프로젝트명 X-100) 생산을 위해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6, 7, 8, 9월이 우리에겐 굉장히 중요한 시기다. 이런 때에 해고자 복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는 기초적인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 해보지 않았나. 대한문에서 국책사업으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내몰린 강정, 밀양 주민들과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농성도 했고, 171일 고공 농성에 41일 단식도 했다. 정말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 그런데 문제가 안 풀리니 '이젠 우리가 직접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7.30선거는 평택 지역에서,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서 우리 문제뿐 아니라 비정규직·정리해고·노조 탄압 등 각종 노동 문제를 전면에 다시 등장시킬 기회이기도 하다. 지난 6년, 많이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쌍용차 해고자들은 다른 힘든 이들에 비해 많은 관심을 받은 편이다. 그런 만큼 우리가 더 앞장서야 하지 않겠느냐란 고민도 있었다.
프레시안 : 출마 선언문에서 '목숨 뺏는 정치를 끝내고 살리는 정치를 만들겠다'고 했다.
김득중 : 그렇다. 출마 경위로 많은 얘기를 했지만, 사실 결정적인 건 '정말로 살고 싶다'는 절박함이다. 쌍용차 사태로 25명이 희생됐다.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지금도 47억 원에 가까운 손해배상·가압류로 벼랑 끝에 내몰려 있는 이들 중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항상 있다. 지부장으로서 빨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관련 기사 보기 : 쌍용차 파업 노동자에게 46억 배상 판결, "사법부마저… ")
당장 22번째 희생자였던 동료(이윤형 씨. 2012년 1월 해고 무효 1심에서 노조가 패소하고 두 달 후 자신의 임대아파트 23층에서 투신했다. 당시 나이 36세. 그의 죽음을 계기로 쌍용차지부는 대한문에 22명의 희생자를 위한 분향소를 차렸다. 지금은 지난해 경찰이 철거한 분향소 자리에는 전에 없던 화단이 설치돼 있다. -편집자)를 생각하면 정말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정말 애착이 갔던 친구였는데 헤아리지를 못했다. 말 수가 적어 혼자 있는 편이었지만, 막상 다가가면 힘내라며 웃어주던 친구였다. 2009년 옥쇄파업을 하던 77일을 함께했고, 소송전도 함께 버텼다. 파업 후 구속된 동안엔 연락이 닿질 않았었는데, 2011년에 갑자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느냐'며 <당신과 나의 전쟁> DVD를 보내줄 수 있겠냐고 했다.
이를 계기로 한 달에 서너 번씩 전화 통화를 했다. '어떻게 사느냐, 형은 사는 게 재밌냐. 나는 정말 괴롭다. 주위에서 이상하게 본다. 불법 빨갱이라고 하는데, 형은 이러면 어떻게 하냐. 정말 힘들다.'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평택에 와서 와락(쌍용차 해고자와 가족들을 위한 심리치유센터)에 함께 가자'는 얘기도 했는데 '형이라도 잘 살라'고 하곤 했다.
그러다 재작년 초에, 친구 소개로 평택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면접을 본다고 연락이 왔었다. 그때 만나 술 한잔 하며 '면접 잘 봐서 합격하면 평택에서 자주 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게 그 친구의 얼굴을 본 마지막이었다. 일주일 만에 털털한 웃음으로 '안 됐다'고 전화가 왔다.
복직 투쟁으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그렇게 놓쳤다. 뒤늦게야 살던 아파트에서 투신했단 걸 알았다. '조금만 더 부여잡아 볼걸'이란 안타까움, 미안함이 있다. 출마를 선언한 지금도 계속 그 친구를 생각을 한다. 인제야 우리가 많이 당당해졌지, 파업 후 1~2년은 어디 가서 '쌍용차를 다녔다'는 말도 못했다. 그런 사회적 냉대와 괄시가 있었다.
'이 친구가 죽지 않고 함께 있었다면, 이런 당당한 활동들을 함께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사라지질 않는다.
프레시안 : 쌍용차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 '죽음'이 화두다. 일하다 사고로 죽는 노동자만 노동계 집계로는 한 해 2500명을 넘는다. 26일 기자회견에서 후보가 얘기했듯, KT와 현대중공업에서 쌍용차보다 더 많은 노동자가 자살과 죽음으로 내몰렸다.
김득중 :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외환위기 이후 노동법이 개악돼 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김대중 정권 들어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정리해고를 가능케 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그 이후 '보호법'이라는 이름을 단 기간제법, 파견법 등이 줄줄이 제정 및 개악되며 '평생 일터'를 망가뜨렸다. 이런 법들을 통과시켰던 국회들도 문제가 생길 거란 걸 모르지 않았다. 기업들이 악용할 것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국회는 노동 문제를 주변부 이슈로 다루었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결정적인 순간엔 배제하는 방식의 논의가 반복됐다. 큰 정당의 여야는 결정적인 순간엔 늘 통합과 상생을 얘기했다. 당장 쌍용차 국정조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 대선 공약이었고 김무성 당시 선대본부장이 약속했던 것이다. 야당 대선 주자들의 눈물과 다짐도 사라졌다. 우리뿐 아니라 많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프레시안 : 그래서 기대지 않고 직접 해결하겠단 건데, 혹여 국회에 입성한들 무소속 의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김득중 : 알고 있다. 사실 국회에 혼자 들어가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는가. 여기저기서 투쟁하는 국회의원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맞다'고 생각한 이상 굽히지 않고 가야 하는 게 아니겠나. 혼자 힘으론 안 되는 게 많겠지만,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도 설득하고 싶다.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느끼고 있는 절박함을 해고자로서 국회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프레시안 : 특정 정당에 속하지 않은 무소속 '노동자' 후보다. 여기에 담긴 특별한 의미가 있나.
김득중 : 내가 노동자이니 노동자 후보다.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겠나. (웃음) 무소속으로 출마한 건 어떤 계산 속에 나온 전략은 아니다. 일단 내가 당적이 없다. 30대 초반 젊었을 때는 민주노동당에서 열과 성을 다했다. 이견이 있어도 토론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던 그때가 참 좋았다. 그리고 그런 정당의 노력이 (일하는) 현장에도 파고드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다 당이 확대되면서 내부의 분열이 보였다.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를 떠나 안타까웠다. 선거 때만 되면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며, 현장에 있던 나로서는 당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좀 바랬던 게 솔직한 마음이다.
지금은 '노동자' 후보라는 이름으로, 각계각층의 시민사회단체, 노동 조직, 야 4당(정의당·통합진보당·녹색당·노동장), 이 모두를 지역에서 다시 한 번 묶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 이런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오늘(27일) 오전엔 평택 지역 진보정당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무소속 진보 단일후보'로 나를 추대하고 지지한다는 기자회견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프레시안 : 당선이 목표인 게 맞나. 야권연대로 중도 하차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김득중 : 아니다. 당선이 목표다. 야권연대는 아예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미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을 아우르는 공동 선거대책본부가 구성됐다.
다른 정당의 후보들보다 늦게 준비한 감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는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의 정의와 양심을 실천하려는 사람들, 쌍용차 투쟁에 마음을 모아주고 눈물 흘려줬던 마음들을 믿는다. 쌍용차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유권자를 만나 표를 구걸하는 방식의 선거 운동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투표만 하면 뭔가 다 바뀌는 것처럼 얘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선거는 4년에 한 번씩 벌어지는 행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우리 문제를 실천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할 거고, 이를 계기로 사회적 연대가 평택으로 모였으면 한다.
당당하게 완주하겠다. 많은 조언과 비판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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