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세상의 모든 일은 먼저 나부터 실천해야 한다.
지난 번 기고문에서 위헌신청 운동을 주장했었다. 그리고 최근 필자는 공무원 제도와 관련하여 헌법 소원을 '실천'하였다.
필자는 공무원 신분이다. 정확히 말하면 '전문경력관'이다. 원래 별정직 공무원이던 것이 올해부터 일반직 공무원으로 전환되었지만 정작 승진과 겸임 그리고 파견 등 많은 것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불구의 신분'이다. 현대판 카스트제도이다.
관료조직, 그들만의 영토
관료 조직은 외부에서의 진입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고시 출신의 성골을 비롯하여 진골 그리고 육두품 등등의 차별과 장벽이 철옹성처럼 너무도 강고한 조직이다. 관료 조직은 지금은 5급 공채로 그 무늬만 변한 고시 출신 그리고 일반직 공무원이 독점하고 있다. 때로는 분명한 장벽이 그어져 있지만, 때로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내부의 관행과 이른바 '미풍양속'으로 그어진 장벽이 온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기들끼리의 승진, 외국 유학교육 파견, 인공위성 파견, 겸임인 것이고, 여기에 이른바 '전문가 그룹'은 전혀 낄 자리가 없다. 온전히 그들만의 영토이고 그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금자탑이다. 그들의 영토에서는 매사가 모두 이런 모양이다. 그들만이 룰 제정자요, 그 룰에 대한 통제와 견제 수단은 사실상 부재 상태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전문성'이 있으면 승진이 안 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은 왜 승진을 하는가? 전문성이 없어서? 참으로 해괴한 논리이다. 차별을 시정하기 위하여 공무원 제도를 일반직 공무원으로 일원화했다면, 일원화된 공무원은 모두 동일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에 대하여 그들은 불문율처럼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이렇듯 '전문가 그룹'들을 모두 원천적으로 배제한 채 오로지 승진과 조직 불리기에만 골몰해온 이 땅의 관료조직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말하였다. 악(惡)이란 흔히 생각되듯, 특별히 사악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진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부터 민주주의는 시작되어야
사실 이전에 별정직 공무원의 일반직 공무원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도 필자는 국민권익위원회에 일반직 공무원과 동일한 근무와 업무를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별정직으로 구분한 것은 문제가 크다면서 이의 시정을 요구한 바 있었다.
이렇듯 많은 노력들이 합쳐져 일반직 공무원으로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은 '무늬만' 일반직일 뿐 승진도 배제되고 파견과 겸임 모두 배제되었다. 바로 <전문경력관 규정> 제21조 등에서 이와 같은 '독소적' 명문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속임수이다. 그리고 이는 차별 시정을 위하여 기능직과 별정직 공무원의 일반직으로 통합한 공무원 제도 개선의 입법 취지를 명백하게 위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문제의 시정에 관심도 없고, 관료 조직 그들이 선심을 써서 들어주지 않는 한 영원히 개선될 수 없다. 관료조직이 들어줄 리는 만무하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 '헌법 소원'이기 때문에 필자는 이의 부당성에 대하여 헌법 소원을 제기하였다. 물론 항상 그랬듯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실천은 계속되어야 한다. 성취하는 그날까지.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부터 불합리와 부조리를 개선하고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 쟁취를 위한 실천이 이뤄져야 한다. 각자 현장에서 그러한 실천을 행할 때, 비로소 이 땅의 민주주의도 실현된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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