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전직 시의원 A 씨가 있다. 오랫동안 정당 생활을 했고, 수많은 선거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최근 '백수'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공천 낙마 후 곧 오십 줄에 접어들어 어디 발 붙일 직장도 찾기 어렵고, 빠르게 바뀌는 정치 지형 속에서 그를 살려줄 동아줄도 보이지 않다보니 아내가 버는 소득에 의지해 살고 있다. 평범한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에 잠시 있다가 정치의 꿈을 안고 정계에 입문하지 어언 20년이 지나가지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한 번의 시의원, 한 번의 구의원 경력과 정당 활동에서 받은 몇 개의 공로장 뿐이다.
그를 더욱 심란하게 하는 것은 선거 과정에서 남은 적지 않은 빚. 정치 활동을 하면서 정상적인 생업을 유지할 수 없었던 샐러리맨에게 정치라는 '청운의 꿈'은 고민스러운 채무 상환 부담으로 종결되어 간다. 하지만 비단 그만이 백수 정치인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젊은 정치 유망주들이 돈의 절벽에서 떨어져 빛을 잃고 만다.
여유 있는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선거
민주주의 정치 참여에서 기회 균등의 원리가 후보자들의 경제적 능력에 의해 제약되는 이른바 '돈 선거'를 막기 위해, 정부는 선거 공영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헌법 제116조1항과 2항에서 선거운동의 균등한 기회와 선거 경비의 후보자 부담에 관한 원칙을 밝히고 공직선거법에서 선거비용 제한액 제도를, 정치자금법에서 국고보조금, 기탁금, 당비, 후원회 등의 정치자금 조성을 위한 수단을 마련했다. 또한 선거과정에서 발생하는 선거비용은 득표율 15%이상의 후보에게는 제한액 내의 범위에서 전액을 보전해주고, 10~15% 사이의 득표율의 후보에게는 제한액 내에서 50%를 보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득표율이 기준에 못 미치는 경우와 보전되지 않는 항목이지만 불가피하게 지출해야 하는 선거비용이 꽤 존재한다. 게다가 국고보조금, 기탁금, 당비는 정당으로 지급되기 때문에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닌 무소속 후보자들은 자비로 선거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보전을 받지 못하면 선거비용은 오롯이 후보자 본인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지난 6·4 지방선거 이후 '이상한 나라의 선거 기자단'이 진행한 좌담회에서 지방선거에 나선 젊은 후보자들은 선거비용 마련에 많은 고충이 있었음을 이야기하였다. 목소영 새정치민주연합 성북구의원 당선자는 대출과 펀드, 부모님의 지원으로 충당했고, 황종섭 노동당 서울시의원 후보자는 당비 지원으로 대부분을 충당했다고 하였다. 이기중 정의당 관악구의원 후보자 역시 펀드와 마이너스 통장으로 채웠고 그 외의 비보전 항목으로 몇 백만원이 넘는 돈이 개인부담으로 돌아왔다고 밝혔던 점에서 쉽게 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후보자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경이 좋거나 정치적인 성장과정이 탄탄대로가 아니라면 선거 한 두 번에 회복하기 어려운 채무를 안게 된다.
다를 게 없는데 왜?…지방의원은 후원금도 못 받아
선거와 의정활동 과정에서 소요되는 정치 자금의 민주적이고 적정한 충당 방법이 바로 후원회 결성이다. 후원회는 정경유착에 기초해 소수의 인사에 의존하던 정치자금을 소액 다수에 의한 정치자금으로 전환함으로써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적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정치자금법이 모든 피선거권자에게 후원회 결성을 허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대통령선거 후보자, 대통령선거 경선후보자, 지역구 국회의원선거 후보자 등은 정치자금법에서 후원회를 지정할 수 있는 범위로 설정해 대상자들은 법적으로 정해진 기간과 규칙에 따라 후원금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시·도의 광역의원과 시·군·구의 기초의원은 물론이고, 지방의회의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의 후보자들은 후원회를 결성할 수 없다. 지방의원들은 후원회를 통한 정치자금 확보가 원천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황종섭 노동당 서울시의원 후보자는 "시의원, 구의원을 정치인으로 안 보는 것이다. 돈 있는 사람만 나오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고, 이기중 정의당 관악구의원 후보자 역시 "국회의원의 경우는 예비 후보자인 경우에도 모금할 수 있다. 자기들이 법을 만드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라면서 정치자금의 기준으로 보면 국회의원만 '진짜 정치인'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지방의원 후원회 결성에 대한 수많은 헌법 소원과 입법 청원이 제기됐지만, 1999년 헌법재판소는 국회의원은 전업으로 하는 반면, 지방의원은 무보수·명예직에 기초함으로 지방의원의 개인후원회 결성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자금법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고 지금까지도 이 관점이 유지되고 있다.
지방의원이 후원회 결성의 범위에서 배제되는 것은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형평성 문제로도 이어진다. 지방의원 역시 국회의원 만큼 지역의 주민을 대표하며 정치적인 행위와 합법적인 선거과정을 거치지만, 그들에게 후원회가 허용되지 않는 것은 분명 부당한 처사다. 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이 지방의원보다 더 큰 지역구를 가지고 있어 하는 일이 많다고 하지만, 2009년 자료에서 15만 명 이상의 광역의원 선거구는 18개인 반면, 12만 명 이하의 국회의원 선거구는 13개로 광역의원이 국회의원보다 더 많은 인구를 대표하는 경우가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에 비추어 보면 지방의원이 '명예직'으로 대우받는 것은 적절치 않다.
기성정치, 중앙정치의 독점
재미있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장도 후원회 결성이 허용된 지 얼마 안 됐다는 점이다. 2005년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에서 정치자금법으로 법명이 변경되면서 겨우 후원회 결성 범위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역사적으로 지방자치제 자체에서 정치자금 조성이 배제됐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한국처럼 지방정치인만 제한적으로 모금과 기부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보기 어렵다. 미국의 정치활동위원회, 독일의 스폰서협회, 일본의 정치자금단체, 영국의 경제인간담회 등 우리의 후원회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단체의 후원은 중앙과 지방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왜 우리는 중앙과 지방의 차별을 둘까?
기자단 좌담회에서 황종섭 후보자가 "정부에서 만들어 놓은 정치 후원금센터 홈페이지가 있는데, 여기서 국회의원 후원은 정말 쉽게 할 수 있게 되어 있다"면서 이 시스템에 지방의원 이름 넣는 것이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고 이야기하자, 이기중 후보자는 "국회의원에게 갈 돈이 시의원, 구의원들에게 갈까봐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시의원, 구의원이 재정적으로 자립이 가능하면, 국회의원 눈치를 안 볼 것이니까 관리도 힘들고"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후원회를 바라보는 입법권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거대 정당의 한 당직자도 "지방의원 후원회 결성을 입법하지 않으려는 것에 국회의원을 비롯한 중앙의 정치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독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히면서 대체로 지역구의 정치 유망주들의 싹을 자르기 위함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다만 이는 재정적인 자립만이 아니라 공천권 등 근본적인 정치 구조, 정치적 의사결정이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독점적인 권력을 차지할 수 있도록 형성돼 있고, 그러므로 구조적인 측면에서 후원회 결성을 막는 움직임도 해석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지방의원의 후원회 결성 불허는 지방정치의 활성화로 발생하는 중앙정치의 이익 분산을 우려한 정치적 결정이며, 지방자치의 중앙 종속화를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적 문제점인 셈이다.
우리 모두가 함께해야 할 정치인 키우기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전직 시의원 A 씨는 곧 있을 7·30 재보선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저곳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 역시 자신의 지역구에서 10년 이상 활동한 지역 정치인이지만 다음 선거를 준비하기엔 그의 삶이 녹록치 않다. 그저 적당한 조직 밑에서 가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직장을 찾기를 원할 뿐이다. 당직자 시절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던 그의 모습은 초췌한 가장의 구직 전선 속에서 바래갔다. 그를 보며 안타까움과 함께 현재의 시스템의 한계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가 지역정치에 투신했던 그 시절, 후원회를 통해서 크지는 않지만 그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치자금을 조성할 수 있었다면 그가 이렇게 무너졌을까? 유력 정치인 밑에서 '콩가루'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공천에 안절부절 하는 그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지역의 전문가로 평생을 헌신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중앙 정치에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를 신뢰하였던 주민들은 그가 시의원 공천에서 떨어졌다는 걸 잘 알지 못한다. 새로운 후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 대신 공천을 받은 이는 지역구의 유력 정치인의 심복이었다. 소주 한 잔 털어넣으며 지역의 문제와 해결점, 구조적 한계를 지적하며 가슴을 쳤던 그의 모습이 보고 싶다. 어느새 흰 머리가 희끗희끗 그의 머리위에 내려앉았지만, 아직 그의 눈동자는 맑고 깊다. 열정적이며 지역을 잘 알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 용기를 가진 그 같은 정치유망주를, 왜 우리는 키우지 못하는 걸까?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지방자치제도는 자기결정의 자유, 실질적 평등의 달성, 민주적 여론 형성, 전체주의에 대한 방파제 역할 외에도 '민주주의의 학교' 기능을 수행한다. 지방자치 학교에서는 훌륭한 시민뿐만 아니라 훌륭한 정치인도 양성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명예직'이라고 생각하는 지방의원직은, 실은 보다 큰 책임과 임무를 수행하는 정치인을 길러내는 교육 과정으로 이들에게 충분한 성장 동력과 바탕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길러내야 함이 마땅하다.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했던 정치자금의 이미지를 벗기고 지방의원에게 지방자치와 민주주의에 더 가까운 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모금과 기부를 허용해야 한다.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역할로써의 후원회는 1980년 12월 도입된 이후 정치주체들의 정치자금 조성에 상당한 편의를 제공해 주었고, 유권자 스스로 정당이나 정치인을 후원함으로써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자발적인 정치참여 의식을 높이고, 나아가 음성적인 정치자금을 양성화시키는 데도 기여한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국회의원의 경우 1인당 평균 후원금 모금액이 세비연액의 100%를 넘어서서 보다 풍부한 정치활동에 필요한 바탕이 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후원금 현황이 공개되면서부터 후원금을 받는 정치주체는 국민의 감시와 견제에 놓이게 됐고, 효율적이며 투명한 정치 활동을 해야 할 유인이 발생해 점진적인 정치발전과 정치문화 개선 효과를 유발한다.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지방의원도 후원회를 허용한다면 양·질적인 성장을 이루고 지방자치제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후원은 정치인에게 투표보다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후원자들은 그들이 지원하는 정치인을 그들의 가치와 목표에 부합하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키울 수 있다. 동시에 시민들은 민주적인 정치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기성 정치인에게 맡겨진 육성의 임무를 유권자가 가져오는 것이다. 지금도 정계에는 미래가 창창한 젊고 유능한 정치 신인들이 유권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 시대의 멋진 정치인을 길러내는 일은 지방의원직에서 시작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