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 7월, 열 번째 강의는 충남 부여와 보령 일대에서 이뤄집니다. 백제의 향기가 전해지는 정림사지를 둘러보고 마침 연꽃이 만개했을 궁남지에서 온 몸에 연꽃 향기가 배어들도록 걸을 생각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연꽃이 되어 극락전이 아름다운 만수산 기슭의 무량사에 향기를 흩뿌리고, 보령 성주산 기슭의 성주사지에 계신 낭혜화상 무염선사에게 연꽃향기를 모두 드리고 법문을 들을 것입니다.
폐사지에서 듣는 법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어디 법이 소리로 전해지는 것입니까. 법은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마음 비워 연꽃향기 담았다가 무염선사에게 담뿍 드리면 틀림없이 빈 마음자리에 아름다운 말씀 가득 할 겁니다.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아래는 이지누 교장선생님의 폐사지 답사기 중 충청편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에서 이번 답사지인 성주사지편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내용입니다.
보령의 성주사터에서 나는 전에 없던 경험을 했었다. 미처 글로 다 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마음속에 가득 찼으며, 견딜 수 없도록 아름다운 문장에 휩싸여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교종과 선종이 같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다르다는 종지를 보지 못하였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것이고, 나는 알지 못하는 바이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료하여 날카롭기까지 한 이 글은 절터의 왼쪽에 우뚝 서서 천년을 견뎌온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뒷부분에 나온다. 그 문장을 처음 대한 나는 마치 평생을 찾아 헤매던 광맥을 발견한 사람과도 같이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었다. 까만 빗돌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싱긋이 미소가 번졌지만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옳다! 옳다!”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아직도 성주사터를 생각할 때마다 당시의 경외와 흥분이 만화경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은 감동이 그만큼 컸던 때문이리라. 그 글 한 줄은 수행자로서의 단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릇 수행자라 함은 금강석과 같은 단단함으로 무장된 단호함을 지녀야 하는 것이 으뜸 된 자세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낭혜화상은 뜨겁게 다가온 사람이었다.
낭혜화상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보수라 할 수 있는 교종과 진보적 성향의 선종이 서로의 방법을 내세우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충돌만이 있지는 않았을 터이다. 역사의 흐름 대개가 그렇듯이 충돌이 있으면 화해와 융합을 모색하는 무리들도 생겨나게 마련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낭혜화상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하나의 방법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그의 공부는 교와 선 양쪽 모두 아우르는 것이었으며, 그로인해 그에게는 두 가지의 생각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 생각이 서로 다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조차 머금은 채 한 곳으로 나아갔으니 그 모습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분별하고 가려내는 시비의 근원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비란 서로 다른 생각의 충돌이려니 그것이 사라진 곳에는 오로지 수행자의 본분인 정진만이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그것을 둘로 구분조차 하지 않고 서로 동등하게 두었으니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낭혜화상의 구도행은 당시 신라 하대를 관통하고 있던 보수와 개혁사상 모두를 두루 섭렵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화엄과 북종선 그리고 당나라에 가서 남종선의 홍주종을 익혔으며, 어린 시절에는 유가의 경전까지 읽었으니 이야말로 원융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더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지금 현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것들을 폄훼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마음에 모두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성주사터는 그런 그가 신라로 돌아 와서 중창 불사를 일구어 다시 도량을 일으킨 곳이니 그 아니 아름다운 곳이겠는가. 낭혜화상 스스로에게 분별이 없으니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호하면서도 분명하며, 백척간두의 장대 끝이기도 하며,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와 같은 생각이다. 거기에 더해 그는 수행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한다. “저 사람이 마시는 것이 나의 갈증을 풀 수는 없으며, 저 사람이 먹는 것이 나의 배고픔을 구원할 수는 없으니 어찌 노력하여 내가 마시고 내가 먹지 않겠는가?”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욱 감동이 큰 것이다. 그 때문인가. 언제나 이곳을 찾아도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비석이 오히려 큰 꾸짖음의 할을 토해 낼 뿐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를 나무랄 수도 없다. 비록 냉정할지라도 그 말은 틀린 것이 한 구석도 없기 때문이다. 내 속의 부처를 찾아 가는 길, 그 길은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이 아니던가.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 고독을 두려워한다면 한 발자국도 들여 놓을 수 없는 길, 그 길에서 내가 구하려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안목이다.
전체라는 것은 부분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 부분의 집합이 곧 전체이며 전체는 부분을 평등하게 아우르는 것일 뿐, 그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대하여 우선하며 상하를 나누는 수직적인 사고가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분별을 넘어선 전체, 그곳은 바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인식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禪)의 깊숙한 곳일 테니까 말이다.
살면서 분별의 마음이 가득 차올라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진저리처질만큼 고독에 시달리고 난 다음이면 절로 발걸음이 옮겨지던 곳.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장대비가 하염없던 그리고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소름을 돋게 하는 날까지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은 채 무수히 절터를 거닐었어도 나는 아직 그에게서 벗어날 힘이 없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되돌아서면 저만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낭혜화상은 오직 당신 할 일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제 할 일, 그것이면 모든 것이 충분할 것만 같다. 그것만 제대로 하면 세상 일 어긋날 것 하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제 할 일을 알아차리기는커녕 제 자신의 모습조차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 내가 아닌가.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비롯되고, 나로부터 해결되지 않으면 그 매듭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곳. 성주사터는 나에게 그처럼 치열하게 아름다운 곳이다.
2014년 7월 19일(토) 폐사지학교 제10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출발(오전 7시, 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부여 정림사지/박물관→부여 궁남지 연꽃밭 산책→점심식사 겸 뒤풀이(부여 <구드래돌쌈밥>에서 야채돌솥밥)→부여 무량사→보령 성주사지→서울 도착(오후 7시 30분 예정)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10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관람료, 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울러 폐사지학교 카페(http://cafe.naver.com/pyesajischool)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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