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년(숙종10) 12월 현종비이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세상을 떴다. 이듬해에는 가뭄이 들었다. 1684년 5월,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최신(崔愼)이 상소하여 "윤증(尹拯)이 박세채(朴世采)에게 편지를 보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지닌 학문과 심술(心術)이 그릇되었다고 비방하고 헐뜯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자기의 아비를 위해 유감없이 묵은 원한을 풀기 위한 수작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윤증이 스승인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배사론(背師論)이었다. 윤증의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였다.
윤선거는 젊어서부터 기개와 절조가 있고 명망이 높았는데, 병자호란 때 강도(江都)의 변고를 겪은 뒤로는 심회가 비통한 나머지 종신토록 버려진 사람으로 자처하며 학문에 힘쓰고 지행(志行)을 독실히 하여 사림들이 높이 받들었습니다. 설사 강도에서의 일에 혹 미진한 점이 있었더라도 결국 성취한 것이 이처럼 훌륭하여 후생 말학(末學)이 가벼이 논의할 수 없으니, 최신이 상소에서 논한 것은 참으로 망녕되고 경솔하다는 평가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대의(大意)는 단지 송시열을 위해 무함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을 뿐이니, 어찌 윤선거를 무함하려는 뜻에서 나왔겠습니까.
문곡은 스승과 문생 사이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질문하고 허물이 있으면 바로잡도록 넌지시 충고하는 것은 본디 의리상 당연한 일이지만, 남과 사사로이 논의하면서 스승의 학술과 심술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임을 걱정하였다. 그러면서 윤증의 자품이 아름다워 한 시대의 중망을 누리고 있었는데 식견이 밝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옳지 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고 애석해하였다. 숙종도 고개를 끄덕였다.
율곡을 끌어들인 자충수
1685년(숙종11)에 들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사학(四學) 유생이, "연전에 윤증(尹拯)이 사국(史局)에 서한을 보내어, 율곡(栗谷)이 젊어서 선(禪)을 배운 일을 망녕되이 끌어대어 자기 선친의 일을 해명하며 '율곡은 참으로 입산(入山)한 잘못이 있었지만 선친은 애당초 죽을 만한 의리가 없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선현을 무함하여 욕보인 것이다"라고 서울과 지방에 통문(通文)을 돌려 그 죄를 성토하였다. 식자들이 대부분 이를 지나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나 사관(四館)에서 급작스레 그 유생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는 벌을 내리자 사람들이 또 불평하였다. 이진안(李震顔)이 상소하여 이 사안을 말하고 윤증을 더욱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승정원이 이진안의 처사가 잘못되었다고 보고하자 숙종은 이진안 역시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도록 명하였다.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던 일을 지적한 것은 거꾸로 윤증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오바'한 것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었을 적에 윤선거는 부친을 만나기 위해 종실인 진원군(珍原君)의 종으로 위장하여 남루한 옷차림으로 성을 나와 남한산성으로 갔던 일이 있었다.
나중에 효종(孝宗)이 여러 차례 소명을 내렸으나 윤선거는 이 일로 자책하며 관직에 나오지 않았다. 효종이 그 까닭을 묻자 송준길(宋浚吉)과 조복양(趙復陽)에게 물었을 때 송준길 등은 "그는 처와 함께 죽자고 약속했으나 처와 함께 죽지 못하였고, 벗과 함께 죽자고 약속했으나 벗과 함께 죽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비통에 잠겨 폐인으로 자처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 뒤에 윤선거도 상소하여 "두 신하의 말이 실상 아닌 것이 없지만, 신의 본심은 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벗을 위한 것도 아니라 단지 신의 몸이 구차히 살아난 것을 비통해하는 것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종으로 변장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한 일을 아울러 상소에 언급하여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자책하였다. 문곡은 윤선거의 그 뜻이 가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윤선거의 본의를 알 수 있으며, 종신토록 폐인으로 자처하여 그 뜻을 확고히 지켰으니 그가 스스로 처신한 것도 숭상할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윤증이 끌어들인 율곡 입산 문제는 당초 무리가 따른 논리였다. 첫째, 이 사안은 이미 선조 때 정리된 일이었다. 둘째, 만일 율곡의 입산을 허물로 삼는다면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행적 역시 실절(失節)로 인정해야 경우가 맞는 것이었다.
나아가 당시 율곡을 흠집 내려는 사람들은 다시 율곡의 입산 문제를 들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윤증의 논리는 좋은 빌미였다. 1650년(효종1)에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려 했을 때 경상도의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인이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이이에 대해 "천륜을 끊고 불가로 도망하여 숨었다"라고 비난했던 적도 있었다. 문곡은 윤증의 말이 이런 불필요한 소모전의 구실이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문곡은 상황을 성찰하는 방향에서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하였다.
윤증의 편지 내용이 선현(율곡)을 무함하여 욕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신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사학 유생들이 몇 년이 지난 뒤에 그것을 들추어 비난한 것은 신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끌어대어서는 안 될 일을 끌어대어 선정신(율곡)에게 참으로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은 도리에 합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윤증을 위해 변명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잘못을 덮어 가리는 데에만 힘써 기어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으로 귀결시키고자 하니 그 마음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불편한 시절
가끔 역사의 어떤 일들이 그러하듯이, 문곡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범 서인계는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나뉘어졌다. 문곡은 노론으로, 윤증은 소론으로 부른다.
사람은 철학이 변하거나 조국과 민족 때문에 돌아서지(갈라서지) 않는다고. 옆에 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 하나로 갈라선다고. 그런지도 모른다. 또 상처는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경우가 많다. 당연하다. 자주 접하니까.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그런 상처를 감당하며, 그 상처 때문에 옳고 그름을 혼동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이런 부류의 인간을 군자라고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이라고 했다.
상처 때문에 갈라진 사람들은 더 강고한 무리를 형성하였다. 동이불화(同而不和), 서로 빌붙어 비틀린 마음을 갖는다. 공자의 말에 나온다. "군자는 비틀린 마음을 갖지 않고 서로 빌붙지 않으며, 소인은 서로 빌붙으며 비틀린 마음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진영 논리에 기댄다. 거기서는 부족한 실력도 사사로운 욕심도 추악한 이해관계도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 허접하기 짝이 없던 교학사 한국사교과서의 저자들이 큰소리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나 영악한가? 그들은 알고 있던 것이다. 변변한 연구논문 하나 쓰지 못하던 사람들이 진영 논리에 붙어서 행세를 하는 양상은, 공영방송사 앞에서 가스통을 들고 설치면서도 진영=패거리로 위장하는 태도와 거리가 멀지 않다.
내수사라는 관청
세월이 수상해지던 1687년(숙종13) 정월, 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가 있었다. 문곡은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때 왕실의 재물을 관리하던 내수사에서 호남에 궁장(宮莊 왕실 소유 전답) 언전(堰田 저수지)을 고쳐 쌓으려고 본도의 백성을 징발하라는 상의 유지를 받들어 비변사에 공문을 보냈는데, 문곡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호남은 여러 도 가운데 기근이 가장 참혹합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책은 다 썼으며 백성을 소란에 빠뜨릴 만한 일은 일체 보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도 새해가 되기 전부터 백성들이 잇따라 유랑하고 도적이 횡행하여,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이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초봄이라 진휼 정책을 막 시작했으니,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다급한 심정이 날로 심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때에 일개 궁장을 고쳐 쌓기 위해 죽음에 임박한 백성을 내몰아 부역에 동원한다면 백성이 얼마나 원망하고 욕하겠습니까. 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성상의 뜻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문곡의 상소에 숙종은 언전 수축을 중지시켰다. 아직 내수사의 운영과 성격, 그리고 내수사에 대한 비판에 대한 연구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쌓이지는 않았다. 다만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다[不與民爭利]'는 유가(儒家)의 이념에 배치되는 관청이었던 점에서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성리학 이념과 왕실의 이해가 대립하는 가운데, 내수사는 위축과 팽창을 거듭했으나 조선 왕조가 망할 때까지 폐지하지 못하였다.
어머니 명성왕후의 삼년상이 끝나자 숙종은 사가로 내쳐져 있던 장씨를 불러들였다. 이로부터 약 10년간, 숙종은 군왕이라기보다 사랑에 빠진 필부의 모습으로 일관했다. 더불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고, 번듯한 신하들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갔던 일은 이미 작년에 다룬 바 있다.
마무리 인사
문곡은 주량이 컸다고 한다. 늘 필자는 문곡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대목을 보고 조금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술을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격과 인품을 알 수 있는 말이 있다.
집에서는 물자 생산과 이익 증대를 일삼지 않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유지할 뿐 조금도 재산을 불리지 않았다. 의복은 화려한 것을 입지 않았다. 물품을 사양하거나 받는 것은 신중하고 엄격하면서도 너무 심하게는 하지 않았으니, 두 번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으레 받는 물건들을 다 의주(義州)에 놓아두고 가져오지 않았다.
배운다는 것은 흉내 내는 것, 본받는 것[學之爲言效]이라고 했다. 한 1년 동안 필자 딴에는 본받을 만한 선배 한 분의 인생을 따라가며 시대를 살펴보고 싶었다. 로드 뷰처럼. 문곡 김수항에 대해 문집이나 실록에 적히지 않은 사실도 많을 것이다. 특히 문집에 당사자에 대한 좋지 못한 기록을 남기기는 어렵다.
또한 양반이라는 신분, 명문가라는 처지는 현대인들에게 거리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랴. 그게 역사인 것을. 우리는 역사라는 삶의 무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현실이 주어지는 경우도 많다.
거듭 느끼지만 조선시대는 참 연구된 부분이 많지 않다. 인물이든, 주제든, 시대든 참 모르는 게 많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 병이 된다. 당연히 역사학자에게 첫 번째 책임이 있다. 잘 모르면서 현대사회의 시각으로 조선을 재단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역사학자가 비역사적 접근을 한 셈이다.
동료 학자들과 <문곡집> 28권의 번역을 마쳤다. 모두 6책으로 출간되는데 4책은 올해, 2책은 내년에 나올 것이다. 귀양 가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서 그런지 더 좋은 자료가 있었을 법한데 그렇지 못하여 많이 아쉽다. 하지만 문집이 매우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느낌이다. 둘째 아드님 삼연(三淵)이 아버지 문곡을 잘 알았던 듯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중에 저승에서라도 뵐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그때 조선이 어떠했는지 찬찬히 물어보고 싶다.
비판과 격려를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한다. 이 지면을 주선했던 강양구, 김용언 기자, 특히 원고를 챙겨준 안은별 기자에게 감사한다. 필자도 조합원이 되었다. <프레시안>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언론으로 쑥쑥 자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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