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송전탑 반대 투쟁은 경찰의 행정대집행을 막을 수 없었다. 악을 쓰고 버텼지만 밀려드는 경찰들 앞에 속수무책. 그 분들은 뭘 할 수 있었을까? 수백 수천 명의 서명이 실린 탄원서도, 함께 시위하던 시민단체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송전탑에 반대하던 분들이 해야 했던 일은 선거를 잘 해서 자신들을 대변해줄 시장이나 시의원을 뽑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 일은 6.4 지방선거 직후에 일어났다. 새로 당선된 시장은 이 사건에 대해서 "노력하겠다"는 애매한 말 뿐이다. 사실 밀양시에서 출마한 어느 후보자의 공약에도 밀양 송전탑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지역 사회의 현안을 다룰 지역의 대표자들을 뽑는 지방선거가 막 치러진 직후임에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6.4 지방선거 후 밀양, 달라진 것은 없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지방자치제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이라면 후보자들은 그 지역의 당면한 문제나 이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고,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야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바람에 불과하다. 대선과 총선 뿐만 아니라 지방선거에서도 지역별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지역주의 구도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보수 양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들은 굳이 지역의 문제를 파악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 공약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한편 당의 공천을 받지 못했거나, 특정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후보는 아무리 지역 상황에 적합한 공약을 내세우더라도 당선되기가 어렵다. 보수 양당의 후보에 비해서 인적 조직이나 자금력, 그리고 인지도 면에서 월등히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후보는 어지간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후보들의 공약을 면밀히 살펴보아도 '그놈이 그놈'이라 도대체 뽑을 사람이 없다.
지방선거에서도 굳건한 지역주의 구도…공약을 통한 경쟁 부재
다시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시위를 하고,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고, 선거에서 표를 행사했음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럼 이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더 있을까? 아마 직접 정당을 만들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후보를 내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정치적 결사의 자유는 우리나라 국민의 기본권이 아닌가.
그러나 현행 정당법상 이처럼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이 정당을 설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당법이 정당 설립의 요건을 매우 까다롭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법 3조, 17조, 그리고 18조에 따르면, 정당은 특별시, 광역시, 도에 5개 이상의 시도당을 만들 수 있어야하며, 1000명 이상의 당원을 지녀야한다. 그리고 중앙당 사무소는 수도인 서울에 두어야한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정당의 중앙당 사무소가 서울에 있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현행 정당법에서 지역 문제 해결을 위한 정당 설립은 사실상 불가능
정당 설립의 장벽이 너무 높을뿐더러, 그 요건들을 충족시키는 순간 지역정당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지역정당이란, 영남통합당이나 대호남전선처럼 각 지역의 패권을 위해서 총선이나 대선에 참여하는 정당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주민들이 지역의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만든 정당으로, 보수 양당 등의 중앙 정당과는 독립적으로 활동하며 지방선거에 후보를 내는 정당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금까지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어서 생소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 지역정당의 활동이 활발한 곳들을 생각보다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지역정당이란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정당
미국의 경우, 주 별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역 당 외에도 수많은 지역 정당들이 활동하고 있다. 뉴욕 주를 예로 들어보면 무려 23개의 정당이 2011년에서 2014년 사이에 활동했다. 이는 지역 정당의 설립을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인 정치조직 결성의 권리의 행사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2000년대 후반부터 지역분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지역 정당들이 등장하고 있다. 독일이나 영국의 경우, 선거참여와 관련해서만 정당의 등록을 명시할 뿐, 특별한 정당 설립 요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지역 정당들이 지역의 이슈들을 다루며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지역정당의 난립으로 국가 전반의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총선과 같은 전국단위 선거에 출마하는 것에는 자격 요건을 두기도 한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등 지역정당이 활발한 사례 찾기 어렵지 않아
지역정당은 가장 큰 장점은 그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된 공약들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역정당이 중앙정당에 비해서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기도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구당이 사라져서 지역정치가 실종된 오늘, 각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달하는 역할도 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방선거에서의 경쟁을 강화시켜 지역정치가 중앙정치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도 변화시킬 수 있다. 광역시도단체장의 경우 지역에 대한 이해도보다는 중앙 정당의 정치적 고려에 따라서 후보가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 정당의 등장으로 정책적 경쟁이 불가피해진다면, 그런 공천 방식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구나 부산, 광주에서도 서울시장 후보들의 토론회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지역 단체장 후보들의 토론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시장이야 누가 되더라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내가 사는 지역 단체장 후보라면 말이 다르다. 이제 정치는 '우리 동네의 일'이 된다.
가장 큰 장점은 생활 밀착형 공약, 지역 의견 수렴과 정치에 대한 관심 유발도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지역정당이 가능해진다면 기존의 지역주의 구도도 변할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위해서 일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지역정당을 만들어 활동하고, 좋은 후보를 내고 당선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지역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경쟁력을 갖춘 지역정당이 등장한다면 지역정치에 보다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지역정당의 후보자들은 보수 양당의 후보에 맞설 수 있는 조직력과 인지도를 갖춘 보수 양당의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제 유권자의 선택지는 하나 더 늘어난다.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도 보수 양당 위주의 지역주의 구도는 흔들릴 여지가 충분하다.
지역정당은 기존의 지역주의 구도에 변화의 바람을 가져올 수도
'투표율을 높이자'. 매 선거마다 나오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투표를 해서 바뀌는 게 뭔데?" 물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하지만 꽃이 피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듯, 투표를 할 수 있다고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꽃을 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봄을 기다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닐까.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모든 지역에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정치가 있기 마련이며, 있어야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지역정당을 허가함으로써 소리 죽인 각 지역의 정치가 숨 수 있게 할 필요가 있다. 정당 설립 조건의 완화가 시급하다.
'이상한 나라의 선거 기자단' 지난 기사 보기1편 : 선관위는 정말 정치적 중립일까?4편 : 미혼 후보자는 선거운동 절반만 하라?5편 : 속옷만 입을 뻔한 후보들,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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