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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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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죽인 이방원, 진심은 이랬다

[낮은 한의학] 태종의 건강학 ①

조선 왕의 건강을 살펴보는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전 대구한의대학교 교수)의 '낮은 한의학' 연재가 매주 수요일 계속됩니다.

이상곤 원장이 조선 왕의 건강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당시 왕들의 모습이 오늘날 현대인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왕들은 산해진미를 섭취하였지만 격무와 스트레스, 만성 운동 부족 등으로 건강 상태는 엉망이었습니다. 이 원장은 "왜 왕처럼 살면 죽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현대인의 바람직한 건강 관리법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태종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의 건국을 가능케 했던 일등공신입니다. 그 과정에서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죠. 조선 건국 후에는 '왕자의 난' 등을 통해서 정도전은 물론이고 자신의 혈육을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즉위 후에는 왕권 강화에 전력 질주해 조선의 기틀을 잡았죠.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태종의 건강을 살펴봅니다. 의외로 태종은 '무사'보다는 '문사'의 이미지에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되기까지 자신이 했던 일을 때로는 자책하는 섬세한 캐릭터였습니다. 그의 건강도 이런 캐릭터와 무관하지 않았고요. <편집자>

조선 건국을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고, 건국 이후에도 왕권 중심의 권력 재편을 위해 피의 숙청을 단행했던 태종은 어떤 체질이었을까? 우리는 태종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기골이 장대한 후덕한 인상을 떠올린다. 아마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할을 한 탤런트 유동근이나, 최근 <정도전>에 나온 안재모의 이미지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의사를 조롱한 똑똑한 왕

하지만 사실 태종은 기골이 장대한 건강 체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록을 하나 살펴보자. 태조 3년 6월 1일, 앞으로 태종이 될 정안군 이방원은 명나라 황제의 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풀고자 사신으로 떠난다. 태조는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놓고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 여정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이처럼 조선 건국의 현장을 누비며 정몽주, 정도전을 죽이고,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를 살육했던 태종은 의외로 파리하고 허약한 체질이었다. 반면에 그의 성정은 강명(剛明)했다. '강(剛)'은 성격이 칼처럼 날카로웠다는 이야기고, '명(明)'은 머리가 명철했다는 이야기다. 태종이 현직에서 물러난 세종 2년 10월 28일의 기록에 바로 이 말이 나온다.

"일찍이 의원 원학(元鶴)이 상왕전에 시종하였다. (그런데) 상왕이 종하가 의술에 매우 능하다는 말을 듣고, (…) 종하로 하여금 원학과 더불어 번갈아 입직케 하려고 원학을 보내어 종하를 부르니, 종하가 상왕의 강명(剛明)함을 꺼려서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자신할 만한 경험이 없다 하여 나가지 아니했다.

원학이 다시 사람을 보내서 불렀으나, 또 가지 않으므로 의금부가 (종하를) 신문한즉, 종하가 말하기를, '상감께서 명철하오신데 만일에 방서(方書)를 물으시면 어찌 대답하오리까. 그래서 가지 못했나이다' 하므로, 곧 대역으로 논죄하여 (종하를) 참형에 처하고 그 가산을 적몰하였다."

조선 왕조 내내 진료를 꺼렸다가 참형에 처한 유일한 의원이 바로 정종하였다. 사실 정종하가 태종의 치료를 꺼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금의 서적에 능통한 태종의 지적 능력은 여러 차례 당대 의학에 대한 논평으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의원들 공부 좀 더 하라'는 태종의 태도는 오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태종 15년 1월 16일 궁중에서 여덟 살 되는 아이가 병이 나자 조청이라는 의원이 약을 지었는데, 어른 분량의 약을 지었다. 소아는 약 분량의 반만 짓게 되어 있었으므로, 태종이 조청에게 '몇 살까지를 소아로 규정하는지'를 물었다. 조청이 '5, 6세까지를 소아라고 한다'고 답하자 태종은 <천금방>이라는 책을 찾아서 이렇게 반문하며, 조청을 질책했다.

"2~3세까지를 영아라 하고, 10세까지를 소아(小兒)라 하고, 15세까지는 소아(少兒)로 구분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파고지(破古紙)'는 <동의보감>에서 신장의 기능이 떨어져서 정액이 저절로 나오고 허리가 아프며 무릎이 차고 음낭이 축축한 것을 치료하는 성기능 개선제다. 이름 자체가 오래된 문창호지를 뚫는다는 뜻이어서 벽지와 착각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태종은 "도벽지(塗壁紙)를 파고지로 우기는 이들이 있다"며 "의학자가 방서에 밝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 <정도전>의 태종 이방원(안재모). ⓒ한국방송

태종이 앓았던 심신의 병, 풍질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이성이 되기를 원했던 태종은 정작 궁중 생활을 좋아했을까? 태종 2년 9월 19일의 기록은 궁중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답답했는지 잘 보여준다.

"금년에는 종기가 열 번이나 났다. 의자 양홍달(楊弘達)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깊은 궁중에 있으면서 외출하지 아니하여, 기운이 막혀 그런 것이니, 탕욕(湯浴)을 해야 된다'고 하였다."

간관들은 왕에게 지지 않고 온천 행을 반대한다. 태종의 반응은 그의 성격을 다시 한 번 잘 드러낸다.

"간관들이 '전하는 춘추가 젊어서 반드시 병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20, 30대의 젊은 사람은 반드시 병이 없는가? 간관이 내 병의 치료를 못하게 막으니 나는 가지 않겠다."

태종이 온천을 포기하면서 강무(講武)를 가겠다고 하자 간관들은 다시 한 번 왕의 강무를 막는다. 강무는 사냥을 통해 무예를 익히는 행사인 만큼 말달리기를 포함하는데 태종은 말을 빨리 달리는 스피드광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 말미에 조영무가 나서서 신하들의 걱정을 대변한다.

"여러 아랫사람들이 사냥을 안 했으면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마음대로 말을 달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자신의 건강 이상을 토로했으나, 정작 실록은 태종이 즉위한 지 13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인 병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앞에 자신이 지목한 종기가 자주 발생하였다는 것 외에 크게 주목할 만한 질병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재위 8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병이 나기 시작한다. 13년 8월 11일에는 태종이 자신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내가 본디 풍질(風疾)이 있었는데, 근일에 다시 발작하여 통증이 심하다. 지난밤에 조금 차도가 있었으니, 경들은 우려하지 말라."

풍질의 증상은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되고, 실록은 그 때마다 구체적으로 태종의 고통을 기록한다. 동년 11월 16일에는 "임금의 손이 회복되지 않아 흙을 잡기가 어려웠다"고 기록했고, 세종 1년 4월 29일에는 "(태종의) 오른팔이 시고 아리며 손가락을 펴고 구부리는 것에 차도가 있어 속히 돌아갈 것을 명했다"는 부분도 있다.

실록의 증상을 종합하면 태종의 풍질은 지금의 목 디스크와 유사한 질환이었다. 그럼, 풍질은 도대체 어떤 질병일까?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자연에서의 대기와 인체 내부에서 흐르는 원기가 그것이다. 자연에서의 대기가 풍이 되면 감기 증상을 유발하여 오한 발열하는 것이고,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면 뇌혈관 질환이나 관절염 등 풍병을 발한다.

내부의 원기가 풍이 되어 풍질이 생겼다면 어떤 원인으로 풍이 생겼고, 어떤 장부와 관계가 있을까. <난경(難經)>은 풍은 간과 관계가 있으며 끈기 있게 일을 많이 하거나 화를 자주 내고 기가 흥분하여 가라앉지 않으면, 간의 혈이 허해지면서 신경통 신경마비 오십견 등의 절육통(節肉痛)이 생긴다고 경고한다. 애간장을 태운 것이 풍의 원인이 된다는 의미다.

격변의 건국 현장에서 수많은 피를 뿌리며 애간장을 태웠던 이방원(태종)은 과연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평가하였을까? 태종은 왕권의 강화라는 큰 목적을 위해서 형제, 처가, 사가 모두에게 피를 뿌렸던 인물이다. 조선의 확립이라는 큰 목적의 뒤에서 개인이 겪어야할 인간적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

태종의 속내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태종 재위 16년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면서 그는 이렇게 전지를 보낸다.

"가뭄의 연고를 깊이 생각해 보니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무인(戊寅), 경진(庚辰), 임오(壬午)의 사건이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음이다. 그러나 (그 일) 또한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지 내가 즐겨서 한 것은 아니다."

가뭄이 하늘이 주는 벌로 생각한다는 격정적인 토로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른 부담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볼 수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태종은 자신을 괴롭힌 풍질 또한 자신의 업보가 낳은 어쩔 수 없는 병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는 약물을 택하기보다는 차라리 온천을 찾았다. 실제로 태종의 풍질은 온천을 오가며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나의 풍질은 약이 효험이 없다. 비록 의서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천에서 목욕하여 병을 고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내 장차 이천 온천에 가서 목욕하여 시험하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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