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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넘어서, '탐욕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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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넘어서, '탐욕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리자"

[기고] '돈보다 생명', 6월 10일 청와대로 함께 갑시다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까지 단원고등학교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며 세월호 소식을 공유했던 단원고등학교 6기 졸업생 최승원입니다.

쌀쌀했던 4월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벌써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이 되었습니다. 사고 이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벌써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도 있습니다. 사고 초기, 진도체육관과 팽목항에서 피해 가족들과 함께 분노하고 울었던, 그 참담했던 현장의 강렬한 기억조차도 불어오는 더운 바람을 맞다 보면 마치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비슷한 기분이리라 믿습니다. 너무도 잔인했던 기억이니까요. 눈에 띄게 줄어드는 분향소의 조문객들을 보면 종종 불안감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흉터 같은 기억을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공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4월 16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 집회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이름을 부르기조차 겁이 납니다"

저는 이제 이 사고 선박의 이름을 부르기도 겁이 납니다. 자꾸 부르다 보면 무뎌질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수많은 생명이, 선생님들과 후배들이 타고 있던 그 배의 이름, 지금 이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가 함축된 그 배의 이름은, 수면 위에 그 존재만 증명했던 위태로운 선미의 윤곽과 겹쳐지며 이 순간 그 무엇보다 가장 무거운 이름이 됩니다.

그저 영혼 없이 그 이름을 내뱉어서는 안 됩니다. 기억과 함의를 하나씩 되새겨가며 입에 올려야 합니다. 단순한 사고로 취급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사건은 '정치적'인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모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가 출항하기 전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선령 규제 완화로 낡은 선박이 들어왔습니다. 승객을 더 태우기 위해 무리한 증축, 개조가 이뤄졌습니다. 더 많은 물건을 실으면서 평형수를 빼냈습니다. 승무원들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엉망진창인 상태로 배에 올랐습니다. 출항 당일, 사람들은 이 불안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 위험한 날씨였지만, 출항하지 않으면 큰 손해인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양호' 판정을 내렸고, 세월호는 죽음을 향한 출항의 기적을 울렸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되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윤을 위해 생명과 안전을 팔아넘긴 정황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세월호뿐만 아닙니다. 해운업계에서는 이런 관행들이 낯설지 않다는 증언이 속속 나옵니다. 문제의 근원에 '해피아'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해피아'들만의 문제일까요? 이후에도 사고는 계속되었습니다. 고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는 현장에서 방화 셔터가 작동하지 않아 화재로 11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예산을 아끼고자 방화 설비와 안전 점검에 소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전남 장성 효사랑요양병원, 21명이 사망한 그 날 새벽 별관에는 단 한 명의 간호사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인건비를 줄이고자 함이었겠지요. 그 간호사도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정말 세월호만의 문제입니까?"

우발적으로 터지는 사건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윤이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혹은 이윤 때문에 위험 정도는 감수해도 된다는 생각들이 깔려있습니다. 불을 댕긴 범죄자도 있지만, 그에게 불을 댕기도록 한 범죄자도 있습니다. 그 기저에는 정치가 있습니다. 안전하게 살게 해달라고, 비극을 막아달라고 뽑아놓은 국민의 대표들은 국민의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비극의 토양을 못 본 체했고, 발생한 비극 앞에서는 무능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정치적인 비극이고,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비극인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도 이 문제를 외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국민담화에서 대통령은 자신과 정부를 분리시키고 '심판자'의 위치에 섰습니다. 그런 인식 속에서 나온 '사과'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신자유주의로 일관하는, 각종 규제 완화로 일관하는 국정 운영 기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저 잘 해나가고 있었는데, 변화가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만 유감을 표명한 것으로 읽힙니다.

이 비극은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하고 있습니다. 재난 대응 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총체적 무능, 그 무능을 감추기 위해 윗선에 '좋은 보고'를 올리기에만 급급했던 관료들의 처참한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국정 운영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한계입니다. 이 끝없이 무능한 모습에 격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권의 무능을 넘어, 더 크게 봐야 합니다. 탐욕에 미친 신자유주의 사회를 심판대에 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청년 좌파'가 말하듯, 신자유주의를 광신하는 정권을 먼저 역사로부터 퇴진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투표 행위를 넘어서야 합니다"

얼마 전 6.4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투표로 분노를 보여주자는 것은 허깨비 같은 말이었습니다. 언론은 '세월호 쇼크', '화난 국민들이 투표장에 몰릴 것이다' 등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투표율은 예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특히 제가 살고 있고, 단원고등학교가 위치한 안산시 단원구의 투표율은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낮았습니다.

이 사실이 보여준 것은 자명합니다. 사람들은 투표를 통한 변화를 믿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있다는 것, 아무리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도 투표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울분을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선거가, 대의 정치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말소됐고, 300여 명이 죽은 이 사고 앞에서도 그 믿음은 회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는 삶과 그 주변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근본적인 부분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가진 자는 끝없이 탐욕을 일삼을 것임을,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행복하지 못한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돈보다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절대 투표 행위로 바뀌지 않습니다. 또 다른 세월호는 계속해서 '양호' 판정을 받으며 출항할 것이고, 또다시 침몰할 것입니다.

"사람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단 한 하나의 가치를 보고 갑시다. 1987년 6월 10일은 군사독재의 족쇄에 묶인 국민의 항쟁이 시작된 날입니다. 2014년 6월 10일은 이윤이라는 족쇄에 묶인 우리의 삶 속에서 분노가 시작되는 날이어야 합니다. 세월호와 같은, 이 탐욕스러운 자본주의 사회에 경종을 울리러 갑시다. 이 사회의 선두에 서서 이윤을 부추기고 있는 자들이 모인 청와대로 갑시다. 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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