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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⑦
마음은 산골에 있나니
문곡 김수항은 젊은 나이에 현직(顯職)에 오르기는 했으나 마음은 늘 산수(山水)에 있었다고 한다. 문곡은 1670년(현종11)에 아버지 김광찬(金光燦)의 상복을 벗었다. 그 뒤로는 벼슬할 생각이 더욱 줄어 영평(永平 현재 경기도 포천 근처) 백운산(白雲山) 아래 밭을 사서 홀로 말을 타고 가보고는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하지만 누구나 팔자가 있듯이 세상의 인망이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특히 이 해와 이듬해인 1671년, 경신 대기근으로 전국이 기아에 허덕이던 상황에서 이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기근이 어느 정도 수습된 1673년 4월, 문곡은 파직되었다. 전 해 8월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 봉분의 석물(石物)에 금이 가는 일이 생겼는데, 당시 문곡이 조사를 간 적이 있다. 당시 종실의 영림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이 사실을 과장하여 상소함으로써 문곡이 삭탈관작되었던 것이다.
문곡은 그날 바로 도성을 나가 반계(盤溪 현재 과천 근처)에 우거하였다. 비록 견책을 받고 파면되었지만 부군은 바야흐로 초연히 즐거워하여 날마다 시골 노인들과 함께 어울려 낚시하면서 마치 애초에 벼슬이 없었던 사람처럼 지냈다. 가을에 다시 백운산에 들어가 고(故) 동은(峒隱) 이의건(李義健 1533 중종28∼1621 광해군13)이 지내던 낚시터를 발견하였다. 문곡은 좋아서 마침내 그 위에 집을 짓고 두자미(杜子美)의 시어를 취하여 송로암(送老菴)이라 이름 지었다.
상복 때문에 일어난 사화
그것도 잠시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특별 서용되고 연경(燕京)에 가는 사은사(謝恩使)로 차임되었다. 1674년 3월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효종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세상을 뜨자 문곡은 지문(誌文)을 지었는데, <현종실록>에 실려 있다. 지문은 무덤에 함께 묻는 지석(誌石)에 쓰는 글이다.
그해 7월에 우리가 갑인예송이라고 부르는 복제 논쟁이 일어났다. 1659년 효종 상을 당했을 때 대신과 유신(儒臣)이 함께 논의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을 기년복(朞年服)으로 정한 적이 있다. 당시 송시열, 송준길의 의견에 따라 <의례주소(儀禮注疏)>의 "비록 대를 이었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라는 설을 인용하여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효종은 몸은 적자이지만 장자는 아닐 경우에 해당되므로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윤선도가 이를 효종의 정통 문제로 비화시켰고, 조정에서는 윤선도를 귀양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다. 이렇게 일부 사람들이 걸핏하면 효종을 서자로 폄하했다고 꼬투리를 잡았다지만, 지지난호에 다룬 바 있듯이 복제 논쟁의 출발은 자칫 상복만 입다가 정사를 돌보지 못할 경우도 생기므로 삼년복을 제한했던 실용적인 이유에서 출발했던 것이지, 결코 정통성 문제가 아니었다. (☞관련 기사 바로 가기 :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그 슬픔과 일상의 화해법)
그러나 이미 윤선도에 의해 정통성 문제로 비화하면서 갑인예송은 환국(換局)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문곡의 형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은 기년복을 주장했던 혐의로 중도부처(中道付處) 되었다.(퇴우당은 그해 8월 현종이 세상을 뜨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하지만 문곡은 그렇지 않았다. 현종은 친히 인사를 단행하여 문곡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하였다. 곧 현종이 죽었다. 숙종 즉위년 12월에 숭릉(崇陵 현종의 능)이 완공되었다. 양사의 이옥(李沃), 이우정(李宇鼎), 목창명(睦昌明) 등이 앞장서서, 4종(種)의 설을 주장했다는 죄명으로 우암 송시열을 삭탈관작하여 내쫓았다.
문곡은 그날 바로 강가로 나갔다. 숙종도 문곡에 대해서는 승지를 보내어 설득하면서 "우상(김수항)이 오지 않으면 승지도 궁궐로 들어오지 말라."고 하였다. 문곡은 마지못해 도성에 들어와 입궐하였다. 1675(숙종1) 1월 14일이었다. 숙종의 문곡에 대한 정성은 확실히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세자 시절 스승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복(三福)의 준동
당시 소인배들은 은밀히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에게 붙어 안팎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선동하여 조정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남은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었다. 국구(國舅 현종의 장인) 김우명(金佑明)이 상소하여 이정(李楨)과 이연(李㮒)이 궁인(宮人)과 간통한 짓을 한 일을 들춰내자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이 갑자기 입궐하여 상을 뵙고는 김우명을 불러들여 말의 출처를 물어보라고 청하였다.
이정과 이연이 스스로 변명하자 숙종은 또 갑자기 그들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두리어 김우명이 그들을 무함했다는 죄를 받게 될 판이었다. 이에 현종비인 명성대비(明聖大妃 김우명의 딸)가 숙종과 함께 편전(便殿)에 나와 발을 드리우고 대신을 만나 친히 이정과 이연이 음란한 짓을 한 일의 전말과 선왕이 깊이 근심했던 정황을 유시하자, 대신이 마지못해 비로소 그들의 죄를 청하였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할 뿐 완전히 법대로 처벌하지는 않았고, 윤휴와 홍우원(洪宇遠)은 도리어 허물을 대비에게 돌려 겉으로는 권면하고 경계시키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사실 협박하였다. 윤휴는 대비의 행동거지를 단속하십사 청하고, 홍우원은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를 끌어다가 남녀는 각기 안팎에서 자리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는 의론을 펼쳤으며, 그 외에도 번갈아 가며 무도한 말을 올린 자들이 전후로 계속 이어졌다.(이때 윤휴의 발언은 후일 그가 사사되는 이유가 되었다.)
문곡은 "이정과 이연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이므로 혹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그 궁인은 법대로 분명히 처벌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숙종에게 간언하였다. 또 "나라에서 종족(宗族 왕실)을 대하는 도리는 오직 사랑을 돈독히 하고 재물을 넉넉히 주어 부귀를 누리게만 하면 되는 것이니, 안팎의 경계로 말하면 엄격히 제한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강조하였다. 숙종도 수긍하였다. 1675년(숙종 원년) 2월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문곡은 출근하지 않고 사직상소를 올렸다.
무관들의 동요
이런 일도 있었다. 지중추(知中樞) 유혁연(柳赫然)이 평산(平山)에 있으면서 훈련대장(訓鍊大將)의 직책을 면하여 주기를 원하니, 숙종은 그에게 조리(調理)를 하고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유혁연은 조금 재기(才氣)가 있기는 하나, 경솔하고 천박하며 교만하고 내실이 없었다. 젊어서 옛 장수 이완(李浣)에게 추천을 받아 벼슬에 나왔었으나 뒤에는 이완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많은 군사를 거느린 지 여러 해가 되매 무사(武士)들의 마음을 크게 잃었고 군사들도 또한 유혁연을 원망하는 이가 많아서 이완을 추모하였다.
유혁연은 삼복과 인친(姻親)을 맺어 어두운 밤이면 뒷문으로부터 가만히 서로 왕래하였다. 이정과 이연이 귀양 갈 적에 강가에까지 전송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종일 문을 닫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매우 괴상하게 여기었다.
좌의정이었던 문곡과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 김우명 아들)가 비밀히 의논하여 유혁연의 병권(兵權)을 제어하려 하였지만, 유혁연이 영의정 허적(許積)과 서로 교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려웠다.
어영대장(御營大將) 신여철(申汝哲)은 옛 재상 신경진(申景禛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申砬)의 아들)의 손자였다. 현종이 훈신(勳臣)과 척족의 오랜 장수들이 다 죽어서 나라에 믿을 만한 신하가 없다고 여기어 외척 가운데에서 선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신여철에게 명하여 문치(文治)를 갖추고서 무과(武科)의 과거에 나오게 하였더니, 붓을 놓은 지 두서너 해가 못되어 유혁연과 나란히 대장(大將)이 되었다. 신여철은 집안이 본래 장수의 자손이므로 사람됨이 빈틈없고 긴밀하여 무사들이 모두 친하게 의지하였다. 복선군 이남이 그를 농락하려고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 신여철은,
자가(自家 당신의 높임말. 공자(公子) 이남을 가리킨다)는 왕손(王孫)이고 이 몸은 군사를 거느리는 관원입니다. 왕손이 군사를 거느린 관원을 찾아본다는 것은 피차가 모두 마땅하지 못합니다.
라고 거절하였다. 이남은 신여철이 자신에게 붙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신여철의 병권(兵權)을 견제하였고 자기를 따르는 남인(南人)을 동원하여 신여철을 탄핵하여 제거하려 하였다. 당시 조정의 장수나 정승이 모두 이남 등과 연결되었기에 이남 등이 꺼리는 자는 오직 두 문곡 등 서너 명의 대신들과 신여철 뿐이었다. 문곡은 신여철에게 자리를 굳게 지키고 동요하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신여철은 겁을 내어 허적에게 병권의 해임(解任)을 청하였다. 얼마 있다가 복평군 이연과 복창군 이정이 죄를 받았으므로 신여철이 갈리지 않게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국역숙종실록> 1년(1675) 5월 1일)
영암으로 귀양가다
숙종은 반년도 안 되어 복창군 이정과 복평군 이연을 석방하였다. 문곡은 "은혜에 치우쳐서 법을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하였다. "선왕(현종)께서 깊이 근심하며 난처해하셨던 점을 대비(명성대비)께서 전에 이미 신하들에게 친히 유시하셨으니, 만일 선왕의 근심을 부당한 근심으로 여기고 대비의 하교를 굳이 믿을 것 없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결코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숙종은 화가 났다. 숙종은 자신과 어머니 명성대비 사이를 이간하였다 하여 처음에는 중도부처(中道付處)를 명하였다가 멀리 영암(靈巖)으로 유배 보냈다. 문곡의 〈행장〉을 쓴 김창협은 "이때 부군의 차자가 한번 나오자 역적 윤휴(尹鑴)의 무리는 심장과 간장이 도마 위에 놓인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부군 자신은 비록 좌절당했으나 자전(명성대비)을 흔들려는 뭇 소인배의 소행도 그로 인하여 저지되었으니, 이는 실로 부군의 힘이었다."고 평가했다.
문곡은 유배지에 간 뒤로 두문불출하고 날마다 <논어>와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송독하고 연구하였다. 유배당했다는 사실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암이 경상도 장기에 유배 가 있었는데, 문곡은 매달 서찰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강론하고 토의하였다. 문곡은 1678년(숙종4)에 철원(鐵原)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1680년(숙종6) 3월에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과 복창군 이남이 반역을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모두 귀양 가거나 처형되었다. 경신대출척이었다. 문곡은 유배지에서 서용되어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마침 질병이 있어 사직하고 즉시 부임하지 못하였다. 숙종은 여러 차례 신하를 보내 문곡을 불렀다. 문곡도 할 수 없이 입궐하였다. 숙종은 즉시 불러 술을 내리며 말하였다.
지난날 대간들이 무도하여 방자하게 임금을 속이고 나 또한 어려서 깨닫지 못한 나머지 해를 꿰뚫을 만큼 충성심이 지극한 경을 처벌하였으니, 오늘날 경을 보자니 내 몹시 부끄럽다.
이때 문곡은 옥사를 다스렸다. 당시 숙종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반역을 꾀한 변고가 일어났는데도 우두머리만 처형되고 나머지 패거리는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갔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문곡은 번번히 형벌의 남용을 근심하였다. 숙종에게 올린 헌의의 대부분은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처벌을 타당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조사해야 합니다'
앞에도 나왔던 유혁연(柳赫然)은 이천(伊川)의 둔병(屯兵)을 통솔하였다. 이 군대를 허견의 처남 강만송(姜萬松)을 시켜 거느리게 하였고, 허견은 모반할 적에 실제로 이를 무력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곡은 그가 세 임금을 모신 숙장(宿將 오래된 장수)인 데다 그 자신이 모반에 참여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므로 사형을 감하여 논죄하라고 특별히 건의하였다.
이원정(李元楨)은 체찰부(體察府)를 다시 설치하라고 건의해서 여러 역적이 그의 말을 끌어다 논거로 삼았지만 그 정상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번 신문하고는 즉시 석방하였다. 그러다가 이원성(李元成)이 재차 고변하고 유혁연과 이원정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더욱 빈번하게 나오자 마침내 모두 사형되었다.
또한 대간이 맨 처음 윤휴의 죄를 말하면서, "대비의 행동거지를 단속하라[照管]"라고 한 윤휴의 말을 가지고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의 간악함을 이어받았다고 규정하고는 그를 주벌하라고 청하였는데, 한 번 아뢰고는 바로 숙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문곡은 숙종을 만나,
윤휴의 이 말을 미루어보면 마음이 실로 괘씸하고 엉큼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가지고 곧장 정인홍, 이이첨과 같은 죄로 단정하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도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 형벌을 시행할 적에는 자세하고 신중해야 하며 또한 사죄(死罪)에 대해서는 세 번 심리하는 법이 있습니다. 더구나 지난날 총애가 비상했던 사람을 심문도 않고 곧장 사형에 처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윤휴가 이 말을 할 적에 신은 경연 석상에 입시하지 못하여 다만 '돌보시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그 후에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들으니, 윤휴는 '단속하시라'고 했지 돌보시라고 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허적(許積)도 상 앞에서 잘못된 말이라고 대놓고 비판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간의 계사에 말한 것은 아마도 이로 말미암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곡절을 분명히 말하지 않고 느닷없이 '단속하시라'라고 글월을 고친 것도 온당치 못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 잘못 전해진 사실이 있어 짚어두자면, 윤휴는 사문난적으로 몰려 탄압을 받아 죽은 게 아니다. 윤휴는 정치적 과욕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였다. 아무튼 윤휴가 국문을 받으면서 자백하지 않자, 숙종은 1678년(숙종4)에 그가 올린 비밀 상소를 꺼내어 의금부에 내려 증거로 삼았고, 윤휴는 마침내 이 때문에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밖에서는 너무 느슨하게 논죄한다고 문곡을 탓하는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10년 뒤, 장희빈이 왕비가 되던 무렵, 경신대출척 때 이 몇 사람이 죽은 것을 모두 문곡의 죄로 삼았다. 잘못된 기억이 오해를 낳은 것인지, 왜곡된 기억으로 오해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실록을 다시 편찬하다
경신대출척으로 남인들이 실각한 뒤, 이미 편찬되었던 <현종실록>의 기록이 부정확하고 왜곡되었다는 공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현종 연간에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는 정책과 사건이 여럿 있었으니만큼 그를 둘러싼 이해와 관점의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이렇게 해서 편찬된 실록이 <현종개수실록>이다. 개수(改修)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현종개수실록>은 <현종실록>을 다시 편찬한다는 기조로 편찬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종실록>을 남인 중심으로 편찬했기 때문에 환국이 마무리되면서 <현종실록>의 개수 논의가 나오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1680년 7월 10일, 판교(判校) 정면(鄭勔)은 <현종실록>의 개수와, 예송에서 윤선도의 상소를 지지했던 조경(趙絅)을 현종 묘정(廟庭)에서 내오라는 두 가지를 주장했다.
숙종은 정면의 상소에 대해, 위의 일은 누구나 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문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국(史局)의 일은 엄중하고 비밀스러워 신은 상세히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듣건대 너무 소략하여 신빙성을 고구하고 후세에 남길 수 없다 합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혼조(昏朝)의 뭇 소인들이 꾸민 것으로, 인조(仁祖)께서 모든 제도를 개정하면서 고(故) 판서(判書) 이식(李植)에게 수정할 것을 명하였는데, 미처 편찬을 끝내지 못하였고, 효종조(孝宗朝)에 이르러 비로소 일을 마쳤습니다. 이미 선조(先朝)의 고사(故事)도 있으니, 지금 별도로 한 책을 편수하여 이전 판본과 함께 보관하도록 해야 할 것이나, 일의 대체가 중대하니, 춘추관 당상관으로 하여금 실상을 받들어 살피게 한 뒤에 품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국역숙종실록> 6년 7월 15일)
문곡의 의견은, ① 일정한 범례나 사실 기재의 요령이 없다, ② <승정원일기>만 증빙자료로 써서 경솔하게 만들었다, ③ 상소 등의 기록이 곡절을 알 수 없게 소략하다, ④ 인대, 입시 설화의 기록이 맥락이 없다, ⑤ 주요 전장을 상소하기 어렵다, ⑥ 찬술한 뒤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현종대왕실록개수청의궤> 경신년 9월 27일) 문곡은 <현종실록>이 시정기찬수범례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편찬 관행도 이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은 "영릉(寧陵 효종의 능)을 옮길 때에 선왕(先王)께서 몸이 편찮으셔서 친히 거둥하지 못했는데, 윤휴가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아래에서 신하 중 누군가 그만두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실록에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하며, 왜곡의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실록 개수를 위한 여론이 모아지고 7월 29일에 실록청을 구성했다. 개수이기 때문에 시정기를 산절하는 일이 없으므로, 각 방(房) 당상과 낭청은 차출하지 않고 도청(都廳)만 두었다. 총재관은 대제학을 지낸 영의정 문곡 김수항이 맡았다.
그러나 <현종실록>의 개수는 <현종실록>을 편찬할 때와 조건이 같을 수 없었다. 사무실, 인원 등의 준비가 끝난 10월 5일, 실록개수청에서는 "당초에 실록을 찬수한 뒤에 시정기(時政記)를 이미 세초(洗草)하였는데, 지금 개수할 때를 당하여 빙고할 근거가 없으니, 기해년에서부터 갑인년까지 사관(史官)이 사사로이 간수하고 있는 초본(草本)을 수납하도록 하십시오."라고 건의하여 숙종이 따랐다.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다. <현종실록> 편찬을 마치고 당연히 사초를 세초하여 조지서(造紙署), 호조로 보냈을 것이니 사초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 사관이 사장(私藏)하고 있는 사초가 있으면 그것이라도 가져오게 했다. 동시에 <승정원일기>도 관례대로 이송해 오게 했다. 아울러 실록 원본도 택일하여 실록개수청으로 실어오게 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10월 26일,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천연두에 걸려 경덕궁(慶德宮)에서 세상을 떴다. 그에 따라 실록개수청은 일단 업무를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가져왔던 <현종실록> 원본도 다시 봉안했다. 1681년(숙종7) 국장이 끝나고 3월 13일 다시 실록을 이안(移安)해왔다. 다소 곡절은 있었지만 1683년(숙종9) 1월 15일에 <현종개수실록>은 인출 작업을 마쳤고 담당 관원의 수 일부를 줄였다. 모두 28권을 인출했고, 다섯 곳의 사고에 분장하기 위해 총 140권을 장황(粧䌙)한 뒤에 공장(工匠)들도 감하했다. 개수를 마치고 <승정원일기>를 다시 승정원으로 반납하고, 초초, 중초 등은 세초할 때까지 춘추관에 보관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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