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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과의 인사, 5월과의 안녕, 그리고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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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집과의 인사, 5월과의 안녕, 그리고 이별

[취미는 독서] 마지막 날

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 <소년이 온다>(한강 지음, 창비 펴냄). ⓒ창비
이명현(천문학자) : "총성이 멎은 뒤 삼분쯤 지나, 맞은편 골목에서 유난히 키가 작은 아저씨가 한달음에 뛰쳐나왔다. 쓰러진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시 연발 총성이 울리고 그가 쓰러지자, 여태 너를 붙들고 있던 아저씨가 두꺼운 손바닥으로 네 눈을 가리며 말했다.


지금 나가면 개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은편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 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한강이 쓴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펴냄)의 한 구절이다. 34년 전 5월 고립된 광주의 어느 광장에서 벌어졌을 법한 장면일 테다.

34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 전체가 그날 광주의 그 광장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아직 5월이다. 거리로 나가자. 소리치자. 투표하자. 더불어 먼 꿈도 버리지 말고, 4월도 5월도 잊지 말고 정진 또 정진하자.

쓰러진 동지들에게 손을 내밀자. 네가 살아야 내가 살고 내가 살아야 네가 산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어린 시절 학교에선 독서가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주변 어른들은 반응이 달랐다. 가난한 살림에 책값이 부담스러웠던 탓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책 좋아한다고 공부 잘하는 것 아니고, 공부 잘한다고 인생이 꼭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세상살이를 원만하게 하는 이들은 공부는 잘하면서 책은 싫어하는 부류였던 것 같다. 내가 어른이 되고서 깨달은 이런 이치를, 당시 어른들도 알았다. 그래서 책 좋아하는 아이에게 시큰둥했던 모양이다.

대학에 가서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았는데, 그때도 책 좋아하는 게 꼭 미덕은 아니었다. 정파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그냥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사람은 별로 인정을 못 받았다. 공과대학에 다니다보니, 아무 책이나 좋아하는 습관은 공부에 걸림돌이 됐다. 책 좋아할수록 성적은 떨어지고, 인생도 꼬인다.

▲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1권, 이시 히로유키 지음, 안은별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나이 서른에 기자가 됐다. 내 딴에는 잘한 결정이다 싶었다.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하며 돈도 번다. 곧 깨달았다. 책 좋아하는 버릇은 기자 일을 하는데도 별 도움이 안 된다. 학술 담당 기자 등 몇몇 예외가 있을 뿐이다. 책보다는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자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나이 마흔을 넘은 지금, 이제 갓 말을 배우는 아이를 돌본다. 말에 익숙해지면, 곧 글을 배우겠지. 그리고 책을 읽어댈 테고. 책 좋아하는 버릇 따위, 세상살이에 도무지 쓸모없다고 여기면서도,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싶은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취미는 독서'라는 코너에 종종 글을 썼다. 아무 책이나 읽는 건, 사실 취미라기보다 버릇에 가까운데, 내 버릇을 굳이 독자에게 권해야 할 이유를 몰라서, 가끔 민망하기도 했다.

금요일마다 원고 독촉을 했던 안은별 기자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다. 안 기자가 번역한 책을 소개하는 걸로 마무리하고 싶다. <세계 문학 속 지구 환경 이야기>(1·2권, 이시 히로유키 지음, 사이언스북스 펴냄)인데, 책 읽기가 지닌 순기능에 충실한 책이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당장 돈벌이엔 도움 안 되는 이런 지식을 '교양'이라고 하는데, 그걸 쌓고 싶은 마음을 건드린다. 그래서 좋은 책이다.

▲ <오리지널 오브 로라>(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1977년 7월 2일,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스위스의 작은 휴양도시 몽트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아내 베라에게, 지난 몇 년 동안 138장의 인덱스 카드에 전체적인 구상과 뼈대를 기록해왔던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를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원고는 불타지 않았습니다." 2008년, 그의 아들 드미트리가 마침내 32년 간의 침묵을 깨고 <오리지널 오브 로라>(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문학동네 펴냄)를 출간했다.

수수께끼 같은 대화, 끊긴 문장, 순서를 알 수 없게 급작스럽게 끼어든 레퍼런스 목록. 오직 작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했을 단 하나의 완성작이 될 뻔했던 <오리지널 오브 로라>의 불완전한 흔적은, 이제 전 세계 독자 모두 각자의 '로라'를 상상할 수 있는 원재료가 되었다.

저만치 존재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가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단절 앞에 나동그라진 언어들, 완결되지 못한 무언가의 미래를 아쉬워하는 것, 이랬더라면 어땠을까…라는 한숨 섞인 추측. 하지만 흔적의 힘은 생각 외로 완강하다. 여주인공 플로라가 자신의 죽음을 묘사하는 소설을 읽기를 단호하게 거부한 것처럼, 불길 속에서 잿더미로 사라질 뻔했지만 스스로 살아남은 <오리지널 오브 로라>는 희미한 흔적 위에 덧입을 육체적인 물질성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우리는 138장의 인덱스카드 위에 적힌 8000개의 단어를 읽었을 뿐이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에는 최소 4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 <책등에 베이다>(이로 지음, 박진영 사진, 이봄 펴냄). ⓒ이봄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책등에 베이다>(이로 지음, 박진영 사진, 이봄 펴냄)는 저자 자신이 누구인지 굉장히 자세하게 들려주는 책이지만, 나는 끝내 그가 나온 학교도 그가 거쳐 온 집단도 심지어 그의 본명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프로필의 세계보다 훨씬 더 내 가까이에 와서 그는 말했다. "양치는 1분 30초 정도 한다. 늘 3분 동안 닦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1분쯤 지났을 때 "하염없이 이게 뭐하는 짓인가"라고 중얼거리면서 그만둔다." 정말 아무래도 좋은 얘기인데, 순간 엄청난 동지애를 느꼈다. "전 그래서 치과에 돈 좀 갖다 바쳤지요. 이는 괜찮은가요?"

내가 느끼기에 그는 눈길이 머물기 가장 어려운 곳을 고집스럽게 찾아내서라도 그 속을 꼭 확인할 것 같은 사람,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폐기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가능성에 일일이 인사를 들려줄 것 같은 사람이다. "싸잡거나 단언하거나 확실한 하나의 방향을 지시하는 말들"의 가장 강도 높은 예를 양 끝에 놓고 그 사이에 놓칠 수 있는 목록을 추가하면, 이 근방에서 제일 긴 띠가 나올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보름은 '잘 될 거다'와 '다 망했다'를 사이를 격렬하게 방황하던 시간이었는데, 거기서 빠져나와도 아무 일 없다고, 무심하고 짤막하게 설득해내는 이 책을 만난 건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책등에 베이다>에 등장하는 책들 대부분을 아직 읽지 않았다는, 사실은 제목조차 몰랐고 눈길조차 준 적 없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그가 내게는 영원히 추방될 뻔한 어떤 가능성들에 먼지를 털고 기름을 칠해서 찾아와준 셈이기 때문이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2014년 5월 30일 오늘, 나는 이사를 했다. 이른바 '분리형 원룸'에서 투룸으로 옮겼고, 반지층에서 등기부상 2층 중국집에서는 3층으로 부르는 층수로 올라왔다. 새 집에는 거실이 아닌 복도가 있다. 책을 보관하기에는 좋지만 밥을 먹은 후 늘 펼쳐놓는 밥상 위에 던져놓은 잡지들을 멍하니 뒤적거리는 그런 사소한 삶의 낙을 누릴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햇볕이 들어오고 바람이 잘 통한다. 새 집에서 첫 샤워를 하고, 첫 원고로 이번 프레시안 books의 '취미는 독서'를 쓰고 있다.

▲ <이사>(사무라 히로아키 지음, 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 ⓒ대원씨아이
이사는 모든 이가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상적이지만 그리 사소하지 않은 이벤트라고 볼 수 있다. 나처럼,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처럼,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을 사는 속도가 빠른 사람들은, 이사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 이삿짐 아저씨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책은 읽어도 읽어도 티가 안 나고, 옮겨도 옮겨도 티가 안 난다. 그렇게 한창 푸닥거리를 하고 나면 문득 이 책이 떠오르는 것이다.

일본의 만화가 사무라 히로아키는 <무한의 주인> 등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수많은 대중문화의 레퍼런스를 오가며 솔직히 잘 알아듣기도 어려운 농담들을 쏟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유의 작품들 가운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사>(김동욱 옮김, 대원씨아이 펴냄)다.

도쿄 변두리 지역의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1년 선배를 짝사랑하는 청년의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페이지를 넘기고 있노라면 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어디서 끝날지 짐작할 방법이 없다. 적어놓고 보니 대단히 상투적인 표현인데, 사실이 그렇다. 사무라 히로아키는 '타케 이테아시'(Take it easy를 일본어처럼 읽은 표현)라는 필명을 둘러대고, '여러분이 만화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시종일관 무언가를 인용하고 농담을 한다.

<이사>는 국내에 세 번 번역되어 나왔다. 최초의 번역본은 하이북스에서 나왔고, 그 다음에는 세주에서 나왔다(의외로 하이북스 번역본을 모르는 분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세주판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하이북스 것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원에서 정식으로 판권을 구입하여 오늘날 유통되는 판본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인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기가 아예 없다면 세 번이나 출판사를 바꿔가며 발행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기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인지도가 높지 않을 리도 없다. 나는 이 애매한 대중성에서, 어떤 면에서는 프레시안 books라는 희한한 매체를 연상하게 된다. 말해놓고 보니 무슨 말인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건 '취미는 독서'니까 괜찮다.

아무튼 그렇다. 나는 오늘 이사를 했고, 어제도 오늘도 원고를 썼다. 새 집에서 쓰는 첫 번째 원고가 프레시안 books에 보내는 마지막 원고가 되었다. 성심성의껏 내 책을 운반해주고, 책의 판형에 딱 맞게 짠 앵글 책장 앞에서 고심하며 창의적인 배열을 선보여준 이삿짐 직원분들 덕분에, 아까 나는 제대로 청소도 안하고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가 가진 두 권의 <이사>를 찾아 헤맸다.

누군가 이사를 떠나며 끝나는 작품들의 결말은 대체로 쓸쓸하다. 하라 히데노리의 <내 집으로 와요>(대원씨아이 펴냄)가 대표적으로 그런 만화다. 그런 식으로 공연한 감상에 젖어들 무렵, 마감 시간이 분 단위로 촉박하게 다가오지만 나는 다시 <이사>의 몇(십) 페이지를 읽었고, 여러 차례 웃은 후 이 원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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