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0년 7월에 문을 연 '프레시안 books'가 이번 5월 30일, 191호를 끝으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지난 4년간과 같은 형태의 주말 판 업데이트는 중단되나, 서평과 책 관련 기사는 <프레시안> 본지에서 부정기적으로나마 다룰 예정입니다. 아울러 시기를 약속드릴 수 없지만 언젠가 '프레시안 books'를 재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실린 글을 편하게 검색하고 볼 수 있는 아카이브를 여름 내로 구축하도록 하겠습니다.그동안 '프레시안 books'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참여해 주신 필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도와주신 출판계 관련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프레시안 books'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조합원으로 함께해 주세요! -프레시안 books 편집부 올림
<바른 마음>(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인간의 심리와 행태에 관해 흥미로운 (또는 엽기적인) 사례들을 담고 있다. 도덕심리학의 흐름이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고, 도덕심리학의 분야에서 이뤄진 많은 실험과 관찰의 결과들이 등장한다. 이런 사례들과 실험들과 관찰들을 토대로 저자는 인간의 도덕적 지향은 직감이 우선하며 이성은 주로 직감을 따라 가면서 직감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데이비드 흄의 유명한 언표 "이성은 열정의 하인이며 오로지 열정의 하인이어야 마땅하다. 이성은 열정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그 외의 다른 직(職)은 결코 탐낼 수 없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다. (흄이 사용한 단어 'passion'을 나는 '性情'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 인용문은 왕수민의 번역을 따랐다.)
이것은 사실 철학, 윤리학, 인식론, 인간학, 심리학 등에서 아주 오랫동안 논란거리를 구성해 온 주제이다. 그리고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들어가서 뭔가 대답의 실마리를 찾아내려면 하이트가 제시하는 사례들만으로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들을 낱낱이 풀어놓게 되면 이 서평이 너무나 길어져야 할 것이고, 더구나 그래봤자 어차피 대다수 독자들에게 관심을 끌기도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난해하고 복잡한 주제에 관해 하이트가 나름 하나의 입장을 세우고, 그것을 대중적인 필치로 표현한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피상적인 수준에서만 보면 하이트의 주장이 어쩌면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는 인간적으로나 지적으로나 흥미로운 사례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비위가 약한 사람은 건너 뛰라고 저자가 친절하게 경고하는 사례들이 가끔씩 나오기도 하는데, 비위가 강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엽기적인 사례들이야말로 아주 재밌는 화젯거리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2.
그러나 "이성이 열정의 하인"이라는 흄의 입장, 또는 "기수는 코끼리를 따라갈 뿐"이라는 하이트의 입장은 자체로 옳을 수는 없다. 단지 도덕을 전적으로 이성의 작용이라고 보는 교조적 합리주의가 놓친 부분을 부각한다는 점에서만 옳다.
간단한 예로, 뮐러-라이어 착시 현상을 살펴보자. 같은 길이의 두 선분이라도 화살표 미늘의 방향에 따라 하나가 더 길어 보이는 현상은 누구나 아는 얘기다. 하이트는 이를 가지고 직관이 이성에 선행하는 증거로 사용한다 (95쪽). 그러나 이 착시 현상이 흥미로운 것은 오로지 두 선분의 길이가 (보기와 달리)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된 다음부터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두 선분의 길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왼쪽 선분이 오른쪽 선분보다 더 짧다"고 말하지 않고, "왼쪽 선분이 오른쪽보다 짧아 보인다"고 말한다. 즉, "같은 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짧아 보이기 때문에 이 현상이 흥미로운 것이지, 보이는 대로 왼쪽 선분이 더 짧은 것이라면 전혀 흥미로울 일이 없는 것이다.
사실 흄은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는 마치 이성이 항상 열정의 하인이기만 하다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 입장을 철저하게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 흄 자신이 자기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믿고 그런 주장을 펼쳤을진대, 이렇게 스스로 기대한 설득력은 직감에서 나오리라고 봤을까 아니면 이성에서 나오리라고 봤을까?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이 직감적으로만 옳다고 믿기를 (이성적으로 따진 후에 어떻게 받아들일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바랐을까, 아니면 설령 직감적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더라도 곰곰이 이성적으로 따져봤을 때 옳다고 수긍하기를 바랐을까?
하이트가 자신의 주장을 독자들이 직감적으로만 수용하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이성적으로도 수용하기를 바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흄의 경우에는, 독자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목표로 주장을 펼친 것이 확실하다.
하이트 자신도 물론, 항상 직관이 이성을 이끌고 간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론을 거쳐 애초의 직관적 판단을 뒤집고 새로운 도덕적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고 인정한다. 단지, 하이트는 이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고 본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드문지도 캐묻게 되면 매우 흥미로운 논의로 연결되리라고 보지만, 여기서 파고들어가지는 않겠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만으로도, "이성이 열정의 하인"이라는 흄의 언표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는 점은 충분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3.
하이트는 코끼리-기수의 비유를 정치에 적용한다. 진보파가 선거에서 예상만큼 자주 이기지 못하는 원인이 지나친 합리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즉, 실제 인간의 (즉, 유권자의) 심리는 코끼리가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보파는 코끼리에 의해 좌우되는 심리를 대체로 보수적인 심리로 폄하하면서 자꾸 나무라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유권자들을 소외시키게 된다는 얘기다. (하이트가 코끼리라는 상징에 착안한 것은 아마도 미국 공화당의 상징이 코끼리라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도덕성의 기반을 이루는 심리 체계는 최소한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하이트는 말한다. 그것은 배려/피해, 공평성/부정, 자유/압제, 충성/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다. 그런데 진보파는 이 중에서 배려/피해, 공평성/부정, 자유/압제 등 세 가지만을 중시하는 반면에 보수파는 충성/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을 중시하면서도 그렇다고 배려/피해, 공평성/부정, 자유/압제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선거에서 보수파가 유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말이다.
이 지적에는 상당한 울림이 있다.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한국에서 진보파는 전통적 가치라든지 평균적 대중의 정서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치, 논리, 이론, 신조, 이념 등을 푯대로 삼아 현실 사회를 변혁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현실 사회에서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적응하기보다는 그것을 고치려는 경향을 드러내게 된다. 선거에서 보수파는 유권자 다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정서적 메뉴를 개발해서 상품으로 내놓는 반면에, 진보파는 정서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치를 따지면서 유권자를 계몽하려 든다.
선거 전략가들 또는 정당의 정책개발자들은 명심해야 할 얘기다. 이와 비슷한 지적은 국내에서도 이미 무성하게 나와 있는 상태지만, 한국의 진보파 전략가들 중에는 아직도 이 문제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다수로 보인다. 하지만 이 얘기 역시 제한적인 의미로만 타당하며, 그 타당성은 일반적이고 느슨한 차원에 국한된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차원에서는 정서-호소-전통-집단-보수 대 이치-계몽-변화-개인-진보라는 구분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도록 섞여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간단한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하이트는 자유/압제 기반의 전형적인 예로 미국 버지니아주의 문장을 소개한다 (318쪽). 이 문장은 선을 상징하는 여성이 쓰러진 압제자의 가슴팍을 밟고 서 있는 그림이다. 옆에는 왕관이 벗겨진 채 내팽개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독재자는 필시 이렇게 되리라"(sic semper tyrannis)는 뜻의 라틴어 문장이 적혀 있다.
이것이 자유/압제 기반을 형상화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것뿐인가? 이 문장은 버지니아주의 전통에 정서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동시에 집단적 일체감을 부각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압제자를 쓰러뜨린다는 국면만 보면 전복을 정당화하는 것 같으면서, 아울러 압제자를 몰아내는 것이 진정한 권위라는 국면에서 바라보면 권위를 강조하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버지니아주는 2008년과 2012년에 "진보파" 오바마를 선택했다. 이것만 보면 진보를 선택한 주의 문장인 만큼 자유/압제를 상징하는 의미가 부각될 듯하다.
그러나 버지니아주는 1948년에 트루먼에게 표를 준 이후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오직 1964년만 빼고 줄기차게 공화당 후보를 선택했다. 케네디(1960), 카터(1976), 클린턴(1992, 1996)이 대통령에 당선될 때에도 버지니아에서는 졌다. 이 기간 동안 오직 존슨만이 1964년 버지니아에서 승리했다. 이렇게 보면 버지니아주의 문장은 자유/압제보다는 전통과 권위의 상징으로 읽혀야 맞다.
이런 지적은 하이트의 주장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주장을 일정한 맥락 안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일 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진보파가 대략적으로 이치와 계몽을 지나치게 중시하느라 관습과 권위를 소홀히 여기는 경향은 진보파 스스로 깊게 반성을 해야 할 대목일 것이다. 이런 잘못은 소위 "계몽주의의 오류"에 속하는 핵심 요소 중 하나로서, 인간의 삶을 과도하게 지성 중심으로 파악하고자 했다가는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누구나 깨달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이런 깨달음을 진보정치의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연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해서 하이트의 주장은 얼핏 도움이 될 듯하면서도 그 도움의 형체가 명확하지는 않을 뿐이다.
4.
마지막으로, 한국어 번역에 대해서 한 마디를 남긴다. 나 같은 딸깍발이라면 정확성을 추구하느라 답답하고 난삽하게 번역했을 문구와 어휘들을, 대중적 가독성을 위해 한국어 일상어에 가깝도록 의역하고 재구성한 역자의 노력은 치하할 만하다. 단, 'liberal'을 '진보주의자'로, 'libertarian'을 '자유주의자'로 번역한 데 대해서는 한 마디 평을 아낄 수 없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아마도 하이트 자신이 'liberal'의 미국식 의미가 진보주의라고 그리고 같은 단어의 유럽식 의미를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libertarian'에 가까울 것이라고 서두에서 밝힌 때문일 것이다(24-25쪽). 하지만 한국에서는 통상 "진보주의"라고 하면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약간이라도 구별되는 의미에서 'liberal(미국식)'을 가리키려면 그냥 "리버럴"이라고 적거나, 아니면 "사회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편이 그나마 혼동을 줄이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개혁적 자유주의"나 "복지국가 자유주의"라는 용어도 가능하다.)
'libertarian'은 기왕에 "자유지상주의"라는 번역어가 거의 정착된 단계이며, 자유주의의 갈래 중에 보수적인 지향을 특정할 때에는 "신자유주의"라든지 "레세-페르 자유주의" 등의 용어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알립니다.
<프레시안>와 웅진지식하우스, 예스24가 함께 준비한 <바른 마음> 출간 기념 공개 좌담회가 6월 16일(월) 저녁에 열립니다. 노회찬 정의당 전 대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이자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오래된 연장통> 저자),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닥치고 정치><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강신주의 맨얼굴의 철학 당당한 인문학> 등)가 패널로 참석하고, <논객시대> 저자 노정태가 사회자로 나섭니다. <프레시안> 조합원과 프레시앙 후원 회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신청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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