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구한 예방접종이 있다. 오랫동안 일본식 용어인 천연두라고 불렀던 두창 예방접종이다. 두창 백신은 영국의 의사 제너가 고안해 구한 말 지석영이 도입했다. 제너는 우두로 세계인을 구했으며, 지석영은 이 우두법을 대한제국에 도입에 우리 조상을 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신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예방접종은 감염병은 물론이고 일부 암, 예를 들면 바이러스에 의한 여성의 자궁경부암 등 질병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고 건강한 삶을 지켜준다. 하지만 이런 예방접종이 극소수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때론 독이 되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도 하고 치명적인 장애를 유발하기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예방접종을 기피하는 사례가 꽤 있으며, 아예 대놓고 백신 맞지 않기 운동을 벌이는 집단이나 사람도 있다. 구미 선진국에서도 한때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다.
백신 부작용, 간접적 사실관계로도 인과관계 인정. 그러면 가습기 살균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대법원이 예방접종 후유증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1998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6년 전 생후 7개월 때 디티에이피(DTaP) 백신(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혼합 백신)을 맞고 곧바로 몸에 경련이 생기는 등 후유증을 겪다가 1급 난치성 간질이 생긴 올해 열일곱 살의 청소년이 예방접종 후유증을 겪고 있다고 인정했다. 이는 예방접종과 후유증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의학적·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더라도 간접적인 사실관계 등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어서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법원이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야만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던 관례와 비교하면 전향적인, 아니 이례적인 판결이다. 재판부는 "예방접종과 부작용의 인과관계는 간접적 사실관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론되면 증명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소식을 크게 반기는 사람들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회사 쪽을 상대로 피해 보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또 일부 피해자는 이들 기업뿐만 아니라 제품 허가를 내주고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정부까지 한데 묶어 소송을 벌이고 있다. 특히 최근 정부가 주관한 건강검진과 개별 환경 조사 등을 받기는 했지만, 피해 3등급과 판정 불가를 받은 사람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이 자신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가 엿보인다.
반면에 감염병 예방접종 관리를 책임지는 질병관리본부에서 백신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는 이번 판결로 "부모들이 예방접종을 기피할까 걱정된다"고 했다. 그는 아마 백신 개발과 접종의 역사에서 빚어진 많은 부작용 논란으로 시민이 접종을 거부했던 사례를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백신, 즉 예방접종의 역사에서 안전성 또는 부작용 논쟁거리는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백신의 효시인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1796년 여덟 살 된 소년에게 우두 접종을 한 뒤 두창에 걸리게 해서 자신의 방법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려 했을 때도, 안전성과 윤리성에 대한 의문과 공격이 쏟아졌다. 백신 반대 운동가인 조지 깁스는 당시 "병든 짐승의 피 속에 있던 혐오스러운 바이러스"를 접종한다며 맹비난했다.
영국서 백신 부작용 엉터리 논쟁으로 접종 기피 결과 홍역 환자 20배 증가
최근 벌어진, 가장 유명한 부작용 논란은 2000년 홍역, 볼거리, 풍진의 혼합 백신인 엠엠아르(MMR)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앤드루 웨이크필드 박사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영화 <마스크> 등의 주연 배우로 유명한 짐 캐리 등 유명인사가 가세했다. 언론도 논쟁이 벌어진 수년 동안 진실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많은 사람이 MMR 백신 공포에 휩싸여 접종을 기피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영국의학협회는 2007년 앤드루 웨이크필드 박사를 불러 청문회까지 벌였다. 동료학자들은 MMR 백신과 자폐증 간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그의 주장은 표본 수가 적고 연구 설계도 엉성한 가짜 연구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웨이크필드 박사의 주장은 백신에 대한 공포와 기피증을 빚어냈다. 그 결과 영국 등 선진국에서 홍역 발생률이 2000년대 중후반 7년 동안 무려 20배나 증가하는 비극이 생겼다. 구미 선진국 사회가 한 연구자의 엉터리 주장으로 엄청난 홍역을 치른 것이다.
선진국에서도 이런 불신이 있으니 백신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유엔이 후원하는 소아마비 백신 접종 프로그램이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려는 전 지구적인 음모의 일부라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서 감염병이 유행해서 고귀한 생명이 안타깝게 희생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에이즈가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병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에이즈 치료제의 효과 또한 부정했다. 남아공에서는 당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많은 에이즈 고아들이 태어났고 또 죽어갔다.
대법원 판결로 백신 접종 기피 가능성 우려는 기우
백신을 불신하는 문화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 문화다. 따라서 방역 당국자의 우려와는 달리 이번 대법원 판결로 부모들이 예방접종을 기피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 부모들이 혹시 인터넷 등을 통해 외국, 특히 선진국에서 벌어진 백신 부작용 논쟁이나 백신 안 맞히기 운동 등에 관한 소식을 접하고 이를 따라 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부분은 있다.
올해 홍역 환자가 지난 22일 기준으로 총 225명이 발생해 지난해보다 두 배 넘게 늘어났다. 특히 초·중·고 및 대학생 환자는 72명으로, 집단생활을 하는 학생의 비율이 3명 중 1명(32%)꼴이었다. 홍역이 늘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영국 등에서 10여 년 전부터 빚어졌던 MMR 백신 부작용 논란의 여파로 우리나라에도 백신 접종을 기피하는 일부 부모들이 있지는 않은지 의심이 든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이 홍역 예방접종을 받은 것으로 방역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와 같은 대유행이 벌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홍역은 전염력이 강하기 때문에 학교와 같은 곳에서 환자가 한 명이라도 발생하면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 특히 그 집단에 미접종자가 있거나 또 접종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방어 면역력이 감소한 학생들이 있으면 더 그렇다. 그럴 경우 학교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도 홍역을 치르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백신 접종을 게을리하거나 기피해 감염병이 유행한다면 그 사회를 건강사회라고 할 수 없다. 백신 접종을 게을리해 홍역과 같은 감염병에 걸린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다른 감염 취약 집단에 병을 전파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 겸 가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홍역이 유행하는 사회는 건강사회가 분명 아니다. 극히 일부에서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이 혹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해 백신 접종을 기피하거나 이를 부추기는 사회는 더더욱 건강사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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