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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바로 서려면?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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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바로 서려면?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네 권의 책] 아이와 부모와 선생의 영원한 3인4각달리기

1.

교육에 관한 책들이 하루에도 여러 권이 나오는 판국에, 교육에 관한 책 4권을 묵직하게 집어 들고 서평을 쓰자니 좀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사실, 교육에 관한 한 모든 사람들이 나름의 애환과 번뇌를 안고 있으면서도 또 나름의 해법들을 내놓고 있는 게 현실이다.

ⓒ프레시안 자료 사진
일례로, 어떤 이는 이반 일리치나 파울로 프레이리 선생처럼 '학교를 탈피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이는 '그래도 학교가 교육의 핵심이며, 결코 포기할 순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학교는 장래, 특히 취업을 준비하는 기관이 아니라 인격 형성과 민주주의를 배우는 곳'이라 하는 반면, 다른 이는 '그래도 학교는 아이들이 생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좀 더 나가면 어떤 이는 '설사 아이들의 생계를 걱정하더라도 꼭 일류대를 가도록 준비시켜야 하는 건 아니다'고 하는 반면, 어떤 이는 '그래도 생계를 해결하려면 가능한 한 일류대를 가는 게 현실적이다'라고 말한다.

차곡차곡 따지기 시작하면 큰 차원에서 교육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조차 제각기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무런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이렇게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헤매다 보면, '남 따라 장에 가듯' 그저 시류에 떠밀려가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실제 아이를 키우다보면, 뭐라도 좋으니 내면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잡아 줄 일정한 줏대가 있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서 제 앞가림도 잘 하고 다른 이들과도 잘 어울려 사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작은 욕심을 숨기기 어렵다.
이번에 '프레시안 books' 편집자로부터 서평을 위해 추천 받은 네 권의 책들은 이런 점에서 교육 문제에 대한 해답의 방향과 가닥을 좀 명확하게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들이라 본다. 그 책들은 스탠리 아로노위츠의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오수원 옮김, 이매진 펴냄), 채은의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해냄 펴냄), 박찬영의 <작은 학교의 힘>(시공사 펴냄), 그리고 조희연의 <병든 사회, 아픈 교육>(한울 펴냄)이다.

한 권 한 권이 모두 나름의 경험과 성찰에 토대하고 있어 결코 가볍게 읽을 책들이 아니다. 특히, 채은의 책은 이제 만 23살 청춘이 자신의 9년간의 경험을 소상하고도 흥미롭게 정리한 책이라, 나름 박수를 치면서 읽었다.

2.

1933년생인 스탠리 아로노위츠는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교양 수준이 높은 '노동 귀족' 가문 출신”이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조상들이 차르 통치의 횡포를 피해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특히 외가 어른들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 한다. 그 어른들은 미국으로 간 뒤 '계급 사다리'를 성공적으로 오른 숙련 노동자들이었지만 결코 반반한 학교 졸업장이 없었다. 그가 어른들을 “교양 수준이 높다”고 한 까닭은 별 졸업장도 없는 그들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클래식 음악을 즐기며 삶의 지식도 폭넓게 지녔기 때문이다.

▲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스탠리 아로노위츠 지음, 오수원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특히 노동조합이나 대학의 노동자 교육 센터에서 진행한 수업들이 노동이나 사회주의에 관한 글, 소설이나 신문 등을 다루었기에 노동자의 교양 수준이 상당히 고양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노동자 교육 센터에서 좋아하는 문학과 정치를 주제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무렵 학교의 주된 가치는 직업 준비가 아니라 바로 그런 나눔이었다."

아마도 이런 삶의 경험들이 아로노위츠로 하여금 노조 활동가로, 대안 교육 운동가로, 교육 및 노동 문제 연구자로 삶을 디자인하게 도왔을 것이다. 이번에 오수원 씨가 번역한 그의 책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이하 <미래>)는 2008년에 나온 《Against Schooling : For An Education That Matters》이다. 원제를 직역하면 <학교 교육에 대항하여: 참된 교육을 찾아서> 정도가 될 것이다.

이미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의 핵심 명제는 '학교 교육은 참된 교육을 하고 있지 못하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파울로 프레이리나 이반 일리치 같은 선각자들이 브라질이나 멕시코에서 체험적으로 보여주었듯, 기존의 학교 교육은 '죽었다.' 왜냐하면 기존 학교 교육은 아이들, 특히 가난한 아이들이 자신의 삶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더 이상 자본과 권력의 부속품이 아니도록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학교는 아이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면 정치경제적 계급 질서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지배구조의 부속품으로 잘 기능할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사육시킨다.

이 지점에서 아로노위츠의 통찰이 돋보인다.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차별적 계급 질서가 존재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근본 문제라 보기 때문이다. 이런 질서를 당연시하는 학교는 그래서 "죽은 학교"라 할 만하다. 그러니 아이들이 학교나 사회의 질서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탁월성을 드러내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차라리 지엽적이다.

▲ <그람시의 옥중수고>(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이상훈 옮김, 거름 펴냄). ⓒ거름
이러한 시각은 대학 교육으로도 확장된다. "공공재"여야 할 대학 교육조차 갈수록 사유화, 시장화, 기업화하는 현실은 미국을 넘어 세계화한다. 등록금, 장학금, 연구비, 커리큘럼, 수강 인원, 정년보장심사, 대학 간 비교평가, 취업 등 여러 측면에서 대학은 더 이상 '진리 탐구를 위한 학문 공동체'가 아니다. 교수들은 갈수록 프롤레타리아로 변하고 신분이 불안정한 시간 강사들이 강의실을 채운다. 어머니 세대가 향유했던 대학 부설 노동자 교육 센터 같은 것들도 예산 부족을 이유로 하나씩 사라진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면 대학의 교직원노조나 교수평의회도 별 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현실 진단 위에 아로노위츠는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는데, 안토니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이나 파울로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이 혁명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 그람시의 <옥중수고>는 "하위 주체를 지식인으로 바꾸는 대중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대중이 참된 교육을 통해 능동적 사회적 행위자로 거듭나는 과정, "평등주의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회 집단, 곧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불만 세력이 모인 사회 집단"으로서 유기적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들이 "지배적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시민사회의 제도와 다른 사회 공간에 퍼뜨릴 수 있는 '지적, 도덕적 블록'을 형성하는 일"이 사회 변화의 열쇠다.

한편 프레이리의 '문제제기식 교육'은 주입식 또는 은행적금식 교육과는 달리, 학습의 주체가 더 이상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며, 교육 공간이 교실을 넘어 온 사회로 확장됨을 강조한다. 그의 페다고지(피억압자를 위한 교육론)는 "억눌린 자에게 내재돼 있는 본질적 인간성을 해방시킬 임무"를 띠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더 이상 영리하고 역량 있는 지도자나 전위에 의한 계몽이나 해방이 아니라, 피억압자 자신이 스스로를 변화의 주체로, 그리하여 보편적 인간화 과정의 주체로 정립할 수 있게 "함께 일하는" 방법론이란 점에서 전복적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노동계급 또는 그 자녀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억압자의 권력을 표상하는 자신의 두려움과 대화하게 해서 심리적 억압의 고리를 깨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학생들조차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자유로운 주체로서 살아 있는 생명력을 발휘해야 하므로 교사와 학생이 상호 존중하는 가운데, 더불어 성장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는 시각이다.

"영적 해방뿐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물적 해방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자유의 성취는 영원한 혁명이며, 영원한 혁명의 여정에서 정치권력을 성취하는 일은 단지 예비 단계일 뿐이다."

3.

아마도 '서머힐' 학교는 그러한 아이들의 내면적 자유가 착실하게 성장하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가장 생명력이 긴 '탈학교의 학교'가 아닐까 한다. 채은이의 부모는 아이 셋을 모두 서머힐에서 키웠다. 총 28년간이라 한다. 만만치 않을 학비를 감안한다면, 28년간 서머힐 학교가 채은이네 가족의 덕을 입기도 했으리라. 서머힐의 아빠인 토니가 "오랫동안 우리를 믿어준 채은이의 부모님께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다.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이하 <서머힐>)를 쓴 채은이는 1999년부터 2008년까지 꼬박 9년간 서머힐에서 성장했다.

▲ <서머힐에서 진짜 세상을 배우다>(채은 지음, 해냄 펴냄). ⓒ해냄
서머힐에 대해선 일반적으로 대안학교를 바라보는 시각처럼 크게 '문제아들의 집합소'라는 입장과 '자율적인 성장 공간'이란 입장이 있다. 겉보기엔 문제아 집합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율적 성장 공간에 가깝다. <서머힐>을 읽으면, 아이들끼리 또는 샘들과 다투다가도 화해하고 성장하는 숱한 얘기들이 나온다.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고 혼자 고독을 씹다가 배우고 갈등 속에 배운다.

서머힐은 나름의 제도와 규칙, 문화가 있다. 사소한 문제가 있으면 옴부즈맨을 찾거나 식구총회(미팅)에서 '말'을 한다. 아이들이 벌칙을 정한다. 다수의 찬성 의견에 따라 결정이 되지만, 소수의 반대 의견도 경청한다. '가해자-피해자' 도식에 갇혔다가도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마침내 화해한다.

이는 모두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이자, 나름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다름 속에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규칙도 200여 가지가 넘는다. 하지만 규칙이 생동하는 소통 과정을 압도하진 못한다. 말하고 들어주고 결정하고 반성하고 화해하고 깨우치는 과정이 총체적으로 원만하게 어우러진다. 물론 한국의 일반 학교처럼 일사불란한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할 뿐인데도, 타인을 무시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바로 이런 공존의 법칙이 학교생활 곳곳에 녹아 있다.

크게 보면, 서머힐은 배움과 성장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저 "귀한 인연"으로 함께 사는 공간이기도 하다. "진짜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곳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아가는 부모의 경험들이 자녀관계를 통해 아이들 속에 일정한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런 흔적들이 서머힐에 집합적으로 모인다. 하나도 아니고 7~80명이 같이 모여 사는 이 공간을 그나마 사람 사는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힘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와 사랑이다.

자유란 스스로 느끼고 성찰한 바에 토대해 행위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놀이가 그래서 중요하다. 수업 참여도 자유다. 심지어 1999년 영국 교육부가 "수업을 강제하지 않으면 폐교시키겠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실컷 놀다 보면 하고 싶은 것도 생기고 책임감도 느낀다. 스스로 움직여 배우게 된다. 랜디 포시 교수는 "학교에서 스포츠를 가르치면, 학생들은 스포츠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팀워크·리더십·전술·정신력 등을 동시에 배우는 것(간접적 배움)"이라 했다. 서머힐은 입시 준비 학교가 아니라 삶을 준비하는 학교, 관계를 배우고 삶 자체를 배우는 학교다.

또 사랑이란 존중과 이해, 공감과 신뢰로 표현된다. 그것은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며, 아이가 뭔가 하고자 할 때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다. 물론 더 나은 방향이나 내용을 위해 서로 친구처럼 편안한 대화를 할 필요는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가정환경이나 부모, 친구관계에 의해 생긴 상처들이 또 다른 관계나 존재를 왜곡할 때 자유와 사랑이 특효약이 된다. <서머힐>은 이를 증명해주는 생생한 보고서다.

"오랫동안 서머힐에 살면 양보와 타협을 연습하게 되고, 신속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상대방의 성격을 파악하는 법을 습득하게 된다."

'서머힐의 힘'이다. 또 서머힐은 일반학교에서 문제아 또는 지진아로 '낙인'찍혀 제대로 성장하기 어려운 아이들조차 의젓한 성인으로 자라게 돕는다. "누구에게도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서머힐을 "자기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집보다 더 집 같은 곳"이라 부른다.

▲ 영국 서머힐 학교의 풍경. ⓒhttp://www.summerhillschool.co.uk/

<서머힐>에는 자유롭고 포용적인 학교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서머힐 학생 중에서도 부모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아이의 성장이 달라진다. 부모가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면, 또 부모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거나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의 성장은 지체되거나 왜곡될 수 있다. 오죽하면 채은이가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육체적으로는 자식을 놓아 주어도 정신적으로는 놓지 못하는 부모들"이 있다고 안타까워할까?

반면, 자신의 부모는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배워나가고, 그냥 놓아두면 독립적이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란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에 별 혼란을 느끼지 않고 책임성 있는 성인으로 클 수 있었다 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불안과 불만, 불평과 두려움 같은 성장 저해 요인들을 자유와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면서 자존감, 자신감, 자긍심을 드높이는 교사와 부모가 존재하기에, 그런 요소조차 성장 촉진 요인으로 고양되었다.

"난 네가 네 길을 찾아갈 거라고 확신해. 넌 특별한 능력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야."
"학교를 절대시하지 마. 그러면 괜찮아."

4.

박찬영의 <작은 학교의 힘>(이하 <작은 학교>)은 <서머힐>의 한국 사례, 그것도 사립이 아니라 공립에서의 대안적 사례를 다양하게 보여준다. 시골의 작은 학교 아이들이 창작 로켓 만들기 대회, 청소년과학탐구대회, 글짓기 대회, 미술대회, 체육대회, 생활영어회화대회 등 각종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는 것을 보고 현직 교사 박찬영은 깜짝 놀란다. 도시의 학교도 아니고, 유능한 교사도 있긴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학교 학생들이 가진 특별한 힘이 '강한 자존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작은 학교 교육'이야말로 아이들에게 높은 자존감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작은 학교의 힘>(박찬영 지음, 시공사 펴냄). ⓒ시공사
다른 나라의 어느 유명한 의사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너는 손이 크고 힘이 세니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겠구나"라고 말한 것에 자극을 받아 진로를 결정했다 한다. 한창 뛰어놀며 자신의 잠재력이나 소질을 탐색해야 할 시기에 '큰 학교'에 가서 경쟁적인 점수 따기 공부만 한다면 아이들의 자존감을 고양하거나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요컨대, 전교 100명 이내의 작은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선생님과의 친밀한 교류 속에 자존감을 고양할 수 있다. 또래와의 인간적 관계를 통해 인성 발달도 잘 이뤄지며, 자연스레 학업 성취도도 올라간다.

<작은 학교>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전국 곳곳의 사례들을 자세히 보여주며, '공교육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공교육 혁명이란, 왕따나 폭력, 허세와 경쟁이 치열한 학교 현장을 우정과 환희, 자존감과 협동심으로 가득한 곳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교육의 목표가 오로지 '다른 아이보다 잘 하는 것'이 될 때, 진정한 배움은 사라지고 오직 경쟁의 논리가 교실을 지배하게 된다."

그 배경은 당연히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이며 그 매개 고리는 부모들이다.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에 대해 마음속 깊은 곳에 불안감을 품고 있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부모가 현실(사회나 기업)에서 경험하는 두려움이나 열등감은 아이들에게 최고가 되기를 강요하는 강박증과 조급증을 낳는다. 부모들 또한 어마어마한 '교육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국내에서는 부모나 아이나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에 시달리고, 아이를 해외로 보낸 경우엔 거액의 학비를 감당하느라 '기러기 아빠'들의 심신이 소진되며, 친밀한 가족 관계도 파괴된다. 종종 뉴스에 나오는 기러기 아빠의 자살 사건은 결국, 인생이나 교육에 대한 통찰이나 철학의 부재가 삶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운동장이나 체육 시간까지 없앨 정도로 경쟁 분위기에 압도당한 학교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까? 당연히도 일부 학생들은 좋은 성과를 낸다. 하지만 대다수 학생들은 좌절감, 열등감, 절망감, 배신감, 무력감, 죄책감 따위에 시달리다 마침내 자살까지 감행하기도 한다.

▲ 입학전형 설명회에 참가하기 위해 줄을 선 학부모들(위 사진은 본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문제는 많고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작은 학교'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하나의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일례로, "도시의 큰 학교들이 가진 공통적 문제 중 하나가 바로 1, 2학년에 50대 이상의 담임교사 비율이 매우 높은" 점인데, 그래서 "20~30대의 젊고 친절한 여교사"가 많은 유치원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살뜰히 챙김을 받으며 자란 초등 아이들이 학교에 가길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작은 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세 번씩이나 갈 정도로 학교를 좋아한다. 한 번은 공부, 두 번은 놀이를 위해서다.

시골 작은 학교는 자연 속에 있기에 아이들은 자연을 닮아간다.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론이나 발도르프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에 속해 있고 자연주의적 체험학습을 강조하는 작은 학교 교육이야말로 좋은 교육이다." 자연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상상력과 깨달음을 키우는 "새로운 낯섦"이자 아토피 등 질병까지 치유하는 병원이다.

또한, 교직을 '밥벌이'로 보는 '직업 교사'들이 많은 도시의 큰 학교(여기는 업무 부담도 상대적으로 작고 대충 '묻어갈 수' 있다)에 비해, 시골의 작은 학교는 잘 가르치려는 의욕이 큰 젊은 교사, 교사 자신의 관점보다 아이나 학부모의 마음을 중시하는 '성직자적' 교사들이 많다. 작은 학교에서는 "한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관계 속에 아이들은 책임감, 자존감, 협동심, 배려심을 키운다. 게다가, (농어촌 근무자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인사평가 체계 탓도 있긴 하지만) 작은 학교에 은근히 열정적이고 우수한 교사가 많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열정적 교사는 작은 기적을 만들며, 아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소중한 꿈을 키워주려 한다. 학업 성취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작은 학교에서는 모든 아이가 교사의 눈에 들어온다."

교사와 학부모 간의 소통 문제도 있다. 일례로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하거나 협박한 건이 2006년 7건에서 2011년 146건으로 폭증했다. 아이의 행동이나 성격, 또래와의 관계 등과 관련, 소통이 잘 안 되고 불신이 큰 결과이다. 특히 "두려움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만 말하거나 아예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는" 아이의 말만 듣고 학부모들이 거친 항의를 하거나 교육청에 민원을 넣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학생들이 선생을 왕따시키는 '선따'도 있다. 교사들의 회의감이나 사기저하가 상상 이상이다. 도시의 큰 학교일수록 이런 증상은 크다. "소통이 사라진 교실에서는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오해와 반목의 감정만 생겨난다."

▲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받고 있는 고등학교 학생들. ⓒ연합뉴스

반면, 작은 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10명 내외이고 학부모도 학교 근처에 거주하기에 대화가 잦다. 상호 신뢰가 형성되기에 교사와의 대화는 곧 아이를 위한 긍정적 대화가 되고 소통도 잘 된다. 아이와 교사 간은 물론, 부모와 교사 간에도 "갈등은 있어도 왕따는 없다."

<작은 학교>는 그 구체적 증거들을 다양한 학교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일본 학력평가 1위를 기록한 히가시나루세 학교, 충남 논산의 도산초, 경기 광주의 남한산초, 경기 양평의 조현초, 전북 임실의 대리초, 전남 영광의 묘량중앙초, 충남 아산의 거산초 등이 그 증거다.

공교육 혁명을 이루려면, 아이들이 제 나름의 속도로 자라도록 기다려주는 자세(교사)도 필요하고 인구 변동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탄력적 학구제나 교사의 자율성 보장(행정)도 필요하다. 부모들도 아이를 학교에 맡기고 '끝'이 아니라 부단히 '참여'하며 혁신을 같이 만들어가야 한다. 도시의 큰 학교라 해서 포기할 순 없다. 경기 분당의 보평초에서는 혁신학교로서 안전과 신뢰의 학교 문화를 만들어 '전문적 학습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교사 및 학부모가 각기 '3무 3행 운동'을 펼쳐 큰 효과를 냈다. 공교육이 무너진다고 걱정만 할 일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접근하면 희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5.

2014년 6·4 선거에 서울시 진보교육감 후보로 나선 조희연 교수가 쓴 책 <병든 사회, 아픈 교육>(이하 <아픈 교육>)은 한국의 교육위기를 보다 큰 사회 현실과의 관련성 속에서 해명한 뒤 대안을 모색한다. 그 맥락에서 자신이 교육감 후보로 나선 배경을 설명하듯, 살아온 과정과 하고픈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병든 사회는 아픈 교육을 낳는다. 교육의 아픔은 다시 사회의 병을 심화시키고, 이 두 가지는 서로 악순환의 관계를 형성한다. (…) 그래서 (…) 전환이 필요하다."

▲ <병든 사회, 아픈 교육>(조희연 지음, 한울 펴냄). ⓒ한울
그렇다. 전환, 변화가 절박하다. 어른들의 무관심과 욕심, 고정관념, 타성, 불감증 따위가 아이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현실을 연장시키고 있다. "위기의 감수성"조차 상실한 탓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병든 사회와 아픈 교육의 악순환은 지속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근본적 대책이란 과잉경쟁과 왜곡된 경쟁구조를 혁파하는 것이다. 초기 산업화 시기인 1970년대식 사회운영 시스템, 고도 산업화 단계 또는 민주화 시기인 2010년대식 사회운영 시스템은 달라야 한다.

현재의 교육은 경쟁교육이며 과잉경쟁이다. 자기 파괴적 경쟁, 비합리적 경쟁, 부도덕한 경쟁이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한 사회에서 '개인안전망' 경쟁이 과잉으로 치닫는다. 그리하여 "경쟁이 갖는 고유한 합리성을 파괴하면서, 한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인적 자원'의 형성과 배분을 왜곡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일례로, 논술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체계적으로 정립할 좋은 기회조차 과잉경쟁 속에서 암기경쟁으로 변질된다. 중고교 학생들이 동아리 활동이나 토론을 통해, 또 체육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통해 상상력과 소양을 키워야 함에도 입시 전쟁에 휘말려 점수 기계로 사육된다. 비정상적 과잉경쟁을 정상화해야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비합리성의 극치로까지 왜곡된 '과잉경쟁 구조' 자체를 수술하기 위한 국민적 개혁으로서 교육개혁을 이뤄나가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학벌체제나 대학서열화로 상징되는 기득권 질서를 혁신하는 걸로 압축된다.

그간 경기, 전라, 강원 등에서 진보교육감이 등장하고 혁신학교 실험이 이뤄졌지만, 일부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왜곡된 경쟁교육 시스템 자체를 혁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 대학 학벌 체제, 그리고 대학 입시 체제가 버티고 있다. 이러한 혁신(대입, 학벌, 대학서열화 타파)이 이뤄지면서 초중등 교육 내부의 혁신(혁신학교, 무상급식, 학생인권조례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비로소 교육의 정상화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혁신교육 시즌2'의 뼈대를 이룬다. 그것은 교육과 사회의 병을 동시에 고쳐 악순환의 재생산 구조를 전환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인식은 대학 입시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초중등 교육의 기형성이 바로 잡히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영국의 서머힐이나 한국의 작은 학교 실험들이 모두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긴 하지만, 자칫 '그들만의 유토피아'에 그칠 위험도 있다.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동반하지 못하는 혁신은, 설사 그 당사자들에겐 아무리 좋은 대안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고립된 섬'과 같은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현실을 총체적으로 볼 때, 한국 교육 문제의 뿌리는 대학 입시 체제와 바로 맞닿아 있다. 그 진정한 뿌리는 대학 졸업장이 지니는 사회경제적 권력 효과에 있고, 이것은 결국 이 사회 전체의 기득권 시스템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기득권 시스템이야말로 모든 교육 문제의 '몸통'이다.

▲ 정시모집 논술고사를 치르기 위해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수험생들.(위 사진은 본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연합뉴스

생각해 보라. 대학 서열화란 무엇인가? 일부 대학을 졸업하기만 하면 평생 기득권층에 편입되어 상대적인 안락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무언의 법칙'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차적 실천은 대학 입시 체제를 바로 잡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도 특정 대학 출신이 사회경제적 기득권층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타파해야 한다. 단순히 일류 대학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 방식으로만 가능한 게 아니라, 대학 이후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창출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의 방향이나 내용,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수많은 대화와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과연 사람들이 이런 식의 대안적 전망을 얼마나 공유할 수 있는가, 기존의 기득권 구조라는 틀 속에서 형성된 우리 자신의 가치관이나 습속을 얼마나 반성하고 기꺼이 바꿀까 하는 문제가 사회적 변화 과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6.

이제 긴 논의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스탠리 아로노위츠의 <미래>는 조희연의 <아픈 교육>과 상통하고, 채은의 <서머힐>은 박찬영의 <작은 학교>와 상통한다. <미래>가 제도권 교육의 무능성, 비효율, 상업화 등을 폭로하면서 '탈제도화'를 지향한다면, <아픈 교육>은 제도권 교육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대학 공공성 강화와 병든 사회를 혁신해야 한다고 본다. 둘 다 강조하는 것은 교육 문제를 교육 문제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사회 또는 경제 시스템과의 연관성 속에서 함께 풀어내지 않으면 참된 교육 혁신은 안 된다는 것이다.

채은의 <서머힐>은 직접 9년 동안 경험한 배움터를 중심으로 앎과 삶을 풀어나갔고, 박찬영의 <작은 학교>는 직접 15년간 초등 교사로 일하며 느낀 삶과 앎을 풀어냈다. '서머힐'은 일종의 사립 대안학교로, 놀이와 자유, 사랑과 자율 등의 키워드를 실천하는 가운데 아이들을 개성적으로 키워낸다. <작은 학교>는 주로 대안적인 혁신을 추구하는 공립 초등학교를 다양하게 보여주는데, 공립학교의 한계 속에서도 자연, 놀이, 사랑, 소통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두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공통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이 가능하다.'

▲ 2012년 당시 '희망의 우리학교' 학생과 김형태 서울시 교육의원, 김태균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대표, 신난초 통합진보당 전 청소년위원장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그렇다면 이 네 권의 책이 모두 갖는 공통분모는 없을까? 그것은 결국 '삶의 주체 바로 세우기'가 아닐까 한다. '스스로 서서 더불어 사는' 아이가 되도록 돕는 과정이 곧 바른 교육 아니겠는가?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거치는 교육 과정은 일차적으로 가정, 이차적으로 학교, 삼차적으로 친구의 영향을 받는다. 자유, 놀이, 사랑이 자율성, 자존감, 사회성의 형성에 결정적이다.

그런데 가정의 부모, 학교의 교사, 마을의 친구들조차 전체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으로부터 압도적인 영향을 받는다. 많은 어른들이 자유, 놀이,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잘 실천하지 못하게 되는 데는 사회구조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학의 서열화와 연결된 기득권 구조가 그 가장 대표적 예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부모와 교사가 올바른 가치관과 일관된 실천력을 보여주면서 가정과 학교, 마을 공동체를 혁신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학 서열화 및 정치경제적 기득권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힘들더라도 이것이 꾸준히 이뤄질 때 '삶의 주체 세우기'로서의 교육은 그 건강성을 제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을 바로 세우는 교육 혁명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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