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함석헌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곱씹어 봐야 할,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이다. 지난 시기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참사 등 무수한 대형 사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과거로부터 겹겹이 쌓여온 잘못된 적폐’(!)를 바로 잡지 못하고 또 다시 세월호 침몰 참사와 같은 참혹한 비극을 겪게 됐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후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지에 대해서도 정말 함께 잘 생각하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고삐 풀린 기업국가에서 안전한 사회와 더불어 사는 공공의 국가로 가려면, 확실히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이 ‘생각하는 백성’으로, 바꾸어 말해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안전사회와 공공의 국가란 어떤 누가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의 역량과 그 공동의 책임으로 세우고 가꾸어 가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권력을 쥔 자들과 돈의 권력을 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왜냐하면 서울시장의 꿈을 가진 어떤 유명 정치인의 아들이 ‘국민정서가 굉장히 미개’하다는 말을 해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원시적 ‘미개’와 IT 최첨단이 기묘하게 공생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폭로한 이번 사태에서, 정작 그 빼어난 미개함을 과시한 것은 국정 최고책임자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들, 여당정치인들, 대기업주들, 보수 언론들 그리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구축해 놓은 무능- 무책임 지배복합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잘 쓰는 ‘(안전)후진국’ 또는 ‘저개발국’이라는 표현 대신에 내가‘미개국’(未開國)이라는 더 불편한 표현을 쓰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4. 16 세월호 침몰참사 후 정신적 외상으로 할 일을 붙잡지 못하고 가라앉아 있는 동안 나는 중요한 소식 한 가지를 접했다. 흔히 우리는 한국정부의 재난 대처 무능력을 미국이나 일본, 또는 스웨덴의 경우와 비교한다. 그러나 내게 훨씬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중국 쪽 소식이었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 인민일보 국제자매지)는 모든 현대화란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이민위본’ (以民爲本)에 입각해야 하는데, 세월호 사건으로 한국은 그 자랑하던 현대화가 유리조각처럼 산산 조각이 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비록 경제발전 수준에서는 한국보다 못해도 재난구조능력면에서는 한국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것을 은근히 내비췄다.
실제로 중국은 작년 쓰촨성 루산 지진사태로 200여명이 사망, 실종되고 1300여명이 다쳤는데 리커창 총리가 지진 발생 5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구조 작업을 지휘했고 시진핑 주석은 신속하게 현장에 병력 투입을 명령하는 등, 5년 전 쓰촨성 원촨 대지진 때보다 나아진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 받았다. 중국 역시도 5년 전 대지진때는 한국과 비슷하게 비리와 부실공사로 학교건물이 붕괴돼 5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건물 더미에 깔려 숨진 일이 있었으나 루산 지진 때는 그런 류의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중국측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다. 그렇지만 중국 지도부가, 공산당 1당 독재체제 속에서도, 적어도 역사에서 배우고 생각(學而思)할 줄 아는 머리를 가졌다는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만약에 경제적 근대화에 정치적 민주화를 더해 근 50년에 이르는 한국의 재난 대처능력, 나아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민”을 “본”으로 삼는 현대화 수준이 일당 독재국가이며 우리가 곧잘 얕잡아 보았던 중국보다 못하다면 이는 진실로 심각하고 참담한 문제가 된다. 그야말로 “한국의 현대화 수준을 고통스럽게 심문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노벨 경제학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Sen)에 따르면, 가난해도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흉년이 와도 기근을 겪지 않지만 권위주의 체제라면 가벼운 흉년조차 쉽게 기근으로 전환된다. 이런 사정에 대해 센은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민주주의의 권력감시적 역할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자유로운 비판과 감시에 노출된다면 기근을 방지할 정치적 책임을 요구받고 그렇게 할 유인을 갖게 될 것이다. 둘째, 민주주의의 정보적 역할 때문이다. 자유로운 언론과 민주주의의 실행은 기근방지정책에 큰 영향을 끼칠, 제대로 된 정보가 널리 흐르고 전파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는 단지 기근뿐만 아니라 재난 일반에 확대 적용되는 이야기다. (센, <자유로서의 발전>, 세종연구원, 2001, pp. 235-236). 그런데 센의 말대로라면 그간 87년 민주화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고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높은 평가를 받아온 한국의 재난 대처능력이 일당 독재국가 중국보다 훨씬 우월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나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태와 쓰촨성 루산 지진사태가 보여 주는 바, 21세기 초두 한국의 재난대처능력은 중국의 그것보다 열등해 보인다. 어찌 된 영문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센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성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센은 민주주의라 해도 다 같지는 않다는 점에 대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민주화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바로 이것이 문제로 되고 있다. 세월호의 비극은 돌진적 압축성장기에 이어 압축시장화=압축생략 경로를 걸었던 고삐 풀린 한국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거대한 구멍이 뚫였음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위험한 과거유산을 안은 채 국민을 배신하고 쇼크요법으로‘줄푸세’ 정책 기조로 회귀한 국정 최고책임자, 관료집단, 대기업집단의 책임규율 및 책임의식에 그리고 관민유착 파트너십에 중증 암덩어리가 들어 앉아 있음을 말해준다. 모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지만 공사(公私)합작의 ‘살인과 같은 행태’들 때문에 고귀한 생명을 잃었던 모든 아이들/어른들이자 모두의 아이들/어른들이 잠든 우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현대화와 민주주의의 완성은 타자에 대한 적극적 반성을 요구한다. 시민의 성숙도와 그 힘을 가늠하는 핵심적 잣대는 곧 타자에 대한 수용의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로 무고하게 죽은 자는 산자에게 던져진 타자이며 이 타자에 대한 반성적 수용력이 우리가 가는 새 길을 인도할 것이다. 이제 ‘천개의 바람’이 된 깨어난 영혼들이 산자에게 묻고 있다. 온 세계가 한국의 현대화와 민주주의 수준을 묻고 있다. 이 물음에 응답하는 것은 산 자들의 책무이자 곧 시민정치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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