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불덩어리다. 온몸을 일으켜 과녁으로 날아가는 화살일 수도 있고, 그 불화살을 쏘아 보기도 전에 손을 델 수도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분노에 빠진 마음 밖으로 나와 분노를 응시한 뒤 행동을 취하라고 가르친다. 허상 같은 분노는 촛농처럼 녹아 사라질 터이고, 탄탄하게 살아남은 분노는 잘 벼려진 화살이 된다. 삶과 사회는 그렇게 변한다.
유토피아의 대척점에 있는 디스토피아는 분노를 다룰 수 없기 때문에 분노를 없애버린 세상이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는 화내고 싸우고, 그것 때문에 고통 받을 이유가 없다. 나라에서 지급하는 소마(soma)라는 알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하면 그만이다. 정제된 분노가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는 기대를 버린 헉슬리 자신도 환각제를 통한 구원을 찾았고, 환각 주사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분노한 세상을 견디는 그의 방식은 환각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복지국가의 이상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라는 슬로건에 집약적으로 표현돼 있다. 이런 정책적 이상의 이면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복지가 보장되지 않았을 경우 생길 수 있는 파국적 결과에 대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다. "비참함은 증오를 낳는다(Misery generates hate)." 영국 복지국가의 정초를 세운 베러리지(William Beveridge)의 경고다.
새사연의 <분노의 숫자>는 이런 이상과 경고를 역설적인 방식으로 한국에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의 시민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불평등의 '비참함'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되는지를 꼼꼼한 통계 작업을 통해 기록하고 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불평등의 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증오'를 가리키고 있다.
시작은 요람에서부터다. 한국의 출산율은 인구 유지 수준에서 턱없이 모자란 1.2명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아동가족복지에 대한 지출도 하위권이고, 3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하는 자녀 양육비까지 고려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어린이는 미래'라는 얘기를 꺼내기도 힘들다. 태어나서 아이들이 겪는 괴로움도 통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매년 한국의 청소년 10만 명 당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OECD 평균의 세 배에 달한다.
살얼음판 같은 입시를 지나서 '꿈과 낭만의 캠퍼스'에서도 젊은이들이 숨쉬기도 힘들다. 사립대 등록금은 도시 노동자 가구 월평균 소득의 두 배에 육박하고, 매일 치솟는 주거비도 만만치 않다. 졸업 후에는 악화 일로의 고용 사정 때문에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는 비정규직이기 일쑤다. '분노의 숫자'가 통계로 기록하는 '청춘 잔혹사'다.
취직과 더불어 삶은 본격적으로 갈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자와 여자 간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차별의 그림자는 더 분명해진다. 보호 장치도 변변치 않으니, 차별의 고통은 커진다. 최저임금은 저임금의 늪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낮고, 노동조합은 먼 이웃이다. 실업급여도 낮고 그나마 적용률도 낮으니, 실직은 공포의 대상이다. 자영업이라는 손쉬운 선택지가 있지만, 쉬운 만큼 경쟁이 극심하고 수입은 변변치 않다.
그래도 주거비용과 교육비용은 계속 오르니, 결국 기댈 곳은 빚이다. 30%를 훌쩍 넘는 이자율이 요구하는 제2금융권에 손을 내민다. 열심히 일하고 벌어도 빚만 쌓이는 구조는 그렇게 완성된다. 다른 한편, 대기업의 곳간에는 현금이 쌓이고, 그곳 고위 임원들의 연봉은 치솟는다. 부자는 더 큰 부자가 된다. 삼성과 현대를 거느리는 한국 최고의 갑부 4인방의 자산을 모두 합하면, 서울시 예산보다 많다. 파이는 커지지만 나누어지지는 않는 '대기업 공화국'은 빈곤을 장려하는 사회다.
무덤으로 이르는 길도 험난하다. 노년은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지고 외로워지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OECD 국가들에 비해, 한국의 노인들은 일을 더 많이 하고도 더 가난하다. 자살율도 그래서 높다. OECD 국가 평균의 4배다.
<분노의 숫자>는 숫자의 기록이지만, 결국 분노의 기록이다. 이 책은 스스로 "분노에 무슨 힘이 있는가", "분노를 강요하는 건 아닌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분노의 숫자>는 분노를 차분하게 응시하고 있다. 그렇게 응축된 분노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더러 분노에 휘둘린 흔적들이 보이지만, 이 또한 분노라는 불덩어리를 만지작거리는 책의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이제 한국 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구분될 것이라 한다. '포스트(post) 세월호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지금 분노하고 있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의 분노에 이유가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러면서 분노의 화살을 벼리고 정조준하게 될 것이다. 분노하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도 권한다.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분노의 근원을 이해하고, 성찰적 분노의 연대성을 키워나가는 기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노를 '선동'이라고 하는 이들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분노가 제거된 '환각의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이 책을 통해 깨어나길 바란다. 헉슬리적인 세상의 끝은 참으로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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