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관 앞에 있는 (연)못에 철갑상어를 넣어 길러야 한다"
"바닷물고기를 기르는 구역과 민물고기를 기르는 구역을 갈라 꾸려야 한다"
"아이들이 수조에 있는 물고기들을 찾아볼 수 있게 소개판들도 붙여놓아야 한다"
언뜻 보면 수족관 관장의 지시 같기도 하지만, 수족관 관장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은 제1비서가 현지지도 과정에서 수행원들에게 늘어놓은 말이다. 김정은은 중앙동물원과 송도원 국제소년단 야영소를 둘러보면서 시시콜콜히 수행원들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하달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정은 제1비서는 노동자 합숙소를 둘러보면서 "침실에 낮은 침대를 놓아주고 그 밑에 생활용품을 놓을 수 있게 할 것"을 지시하는가 하면, "여성 근로자들이 생활하게 될 방에 거울을 설치해주면 여성 근로자들이 옷맵시도 보며 좋아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병원을 찾아서는 "의료도구 소독을 잘할 것"을 지시하고, 전시된 치약 칫솔을 보고는 "좋은 구강위생용품을 정상적으로 보장해 줄 것"도 당부했다. 참으로 자상한 최고지도자이다.
최고지도자가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지시를 하달하니, 김정은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수첩을 들고 뭔가를 받아적기에 바쁘다. 침대 높이와 물고기 배치 위치까지 지정해주는 상황이니 수첩에 깨알같이 적어놓지 않으면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세심한 지도 → 최고지도자 없이는 일이 안된다
현지지도를 통한 최고지도자의 세심한 지시. 북한 매체들의 선전대로 '북한 곳곳에 최고지도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의 손길이 이렇게 세심하게 미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최고지도자의 지시 없이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연결된다. 최고지도자가 가구 배치와 건물의 관리 운영에 대한 것까지 일일이 지시하는 상황에서 최고지도자의 지시 없이 하부에서 자율적으로 일을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최고지도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제멋대로 시행했다가 자칫 최고지도자의 노여움을 사게 되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데 누가 나서서 먼저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의 지키는 최상의 방책은 위에서 시키는 것만 피동적으로 하는 '복지부동'일 수밖에 없다.
아랫사람들에게 권한과 자율성 주지 않는 한 ‘복지부동’만 늘어
북한 관료들을 많이 만나 본 전직 통일부 고위당국자는 필자에게 "북한 관료 중에 능력 있는 사람은 장성택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름대로 고위직이라는 북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지만,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더라는 것이다. 모두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만 기다리고 있을 뿐 '스스로 일을 꾸려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더라며 이 전직 당국자는 통일 뒤 북한 관료조직에 대해 우려를 표한 적이 있다. (장성택이 북한 관료의 예외로 인정받은 것은 장성택이 김일성의 사위라는 특수한 지위로 인해 상대적으로 큰 자율성을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이 반영된 듯하다.)
그렇다면, 북한에 정말 인물이 없어 관료들의 수준이 이렇게 하향 평준화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북한 관료들의 수준이 떨어진 것은 바로 정치체제의 작동 방식과 관련이 있다. 최고지도자가 모든 것을 관장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는 자율적 권한을 주는 대신 일이 잘못될 경우의 처벌만 뒤따른다면 조직은 극히 피동적으로 변하게 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않은 채 위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오늘의 북한 관료집단을 피동적이고 무능력하게 만든 것은 북한의 최고지도자들이다.
최고지도자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한다고 해도 국가의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려면 결국에는 아랫사람들에게 권한과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침대 높이와 물고기 배치까지 지시하는 '깨알' 리더십으로는 북한 관료사회의 복지부동만을 심화시킬 뿐이다.
* 북한학 박사인 안정식 기자는 SBS에서 한반도 문제를 취재, 보도하고 있으며 북한포커스(http://www.e-nkfocus.co.kr)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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