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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도 꼭꼭 숨은 여행지, <닝샤>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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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중국서도 꼭꼭 숨은 여행지, <닝샤>의 매력

8월 중국학교 개교, 교장에 조관희 교수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분들과 유족들에게 깊이 사죄합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이 나라를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혁파할 것을 함께 다짐합니다.
저명한 중국학자이자 중국여행가인 조관희 상명대 교수(중국문학)는 “가기는 쉽지 않지만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로 단연 <닝샤(寧夏)>를 꼽습니다. 중국 회족(回族)의 고향이자 장성(長城)의 보고(寶庫)이면서 아직껏 숨겨져 있어, 중국에서도 독특한 풍광과 문명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인문학습원은 올 여름 조관희 교수를 교장선생님으로 모시고 중국학교를 엽니다. 그리고 <닝샤 여행>을 준비합니다. 베이징, 상하이, 쑤저우, 항저우, 그리고 황산과 장가계 등이 중국 여행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중국 여행의 감추어진 매력을 보여드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중국학교는 앞으로 봄·가을에는 중국문명의 핵심을 이해하는 명강의를 열고, 여름·겨울에는 ‘가기는 쉽지 않지만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를 엄선해 답사하는 학교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유장한 황하와 만리장성, 환상적인 사막언덕이 만나 감동을 주는 닝샤 사포터우(沙坡頭) ⓒ중국학교

닝샤(寧夏)는 중국 서북부의 닝샤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를 칭하며 ‘닝(寧)’으로 약칭됩니다. 줄기차게 달리는 만리장성을 끼고 유장히 흐르는 황허(黃河) 중상류에 위치하지요. 동쪽으로 산시성(陝西省), 북으로 네이멍구(內蒙古), 남으로 간쑤성(甘肅省)과 접해있습니다. 총면적 6만6천4백㎢에 인구 530만명(1997년)의 작은 자치구지요. 성도(省都)는 인촨(銀川). 주민은 한족(漢族)·회족(回族)·몽골족(蒙古族)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닝샤회족자치구 인구의 1/3의 이상이 회족이며, 전체 회족의 1/6이 이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회족(回族, 후이족)은 중국 내 한화(漢化)한, 이슬람교를 믿는 상무강직(尙武剛直)한 소수민족입니다. 중국이 현대화 바람으로 많은 부분이 사라지거나 변하고 있을 때 닝샤만은 이때껏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곳입니다.

<닝샤 여행>을 대표하는 아이콘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回族)의 고향’
▶여러 시대의 장성(長城)을 볼 수 있는 ‘장성박물관’
▶서하(西夏)왕국의 수도로 ‘동방의 피라미드’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서하왕릉’
▶선사시대 유목민족의 ‘예술의 화랑’으로 불리는 암각화의 보고 허란산(賀蘭山)
▶중국 고대불교 예술사상의 큰 유산 ‘수미산석굴(須彌山石窟)’
▶<붉은 수수밭>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전베이푸(鎭北堡)영화촬영소’

이처럼 닝샤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볼거리들이 한데 모여 있는 보물 같은 명소지만, 그 동안 우리에게는 물론이고 중국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지닌 가치가 워낙 크기 때문에 조만간 중국 관광객들의 깃발부대가 닝샤로 향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거라 예상됩니다. 그에 앞서 우리가 먼저 닝샤의 매력에 빠져보면 어떨까요?

<닝샤 여행>은 오는 8월 16일(토)부터 22일(금)까지 1주일간 진행됩니다. 중국 내 다른 성에 비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닝샤 여행>의 동선은 그렇게 긴 편이 아닙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긴 여정이라고 해봐야 하루 5시간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동선이 짧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행지를 충분한 여유를 갖고 둘러볼 수 있습니다.

<제1일차>
첫째 날은 닝샤로 이동합니다. 닝샤의 성도인 인촨(銀川)까지는 아직 국내에서 직접 가는 항공편이 없어 일단 인천에서 베이징에 갔다가 베이징에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합니다. 인촨에 도착한 뒤에는 자유롭게 시내 관광을 하실 수 있습니다(개인 활동).

<제2일차>
둘째 날은 인촨시 시내 관광입니다. 이 날은 닝샤박물관과 승천사탑, 종고루를 답사한 뒤 해보탑과 이슬람사원인 난관청진대사를 답사합니다.

닝샤박물관
닝샤박물관은 인촨시 징위난졔(靖宇南街)에 위치해 있으며, 닝샤의 문물을 수장하고 연구, 진열하는 종합적 성격의 박물관으로 현재 1만여 건의 문물을 수장하고 있다. 박물관 내에는 네 개의 기본적인 진열관이 있는데, 닝샤역사문물진열(寧夏歷史文物陳列)은 수백 건의 문물과 사진 등이 닝샤 경내 각 민족의 생활과 발전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고, 서하문물진열(西夏文物陳列)은 가장 대표적인 서하 문물 1백여 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회족민속문물진열(回族民俗文物陳列)은 풍부한 회족의 복식과 전통 생활용구, 공예물, 악기 및 대량의 도편(圖片)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허란산암화전람(賀蘭山岩畵展覽)에서는 역사상 허란산 유목민족의 발전 역사를 재현해 보여주고 있다.

▲서하왕국 제왕의 능묘 ⓒ중국학교

승천사탑(承天寺塔)
인촨 고성 서남쪽에 있는 유명한 사찰 승천사(承天寺) 안에 높이 솟아있는 고탑(古塔)으로 ‘서탑(西塔)’이라고도 한다. 현재 닝샤에 남아있는 1백여 년 된 고탑 중 가장 높은 탑이다. 팔각형으로 된 11층 누각식 전탑(砖塔)이며 높이 64.5m로 시안(西安)의 대안탑(大雁塔)보다도 0.5m가 더 높다.
서하(西夏)왕국 의종(毅宗)이 1050년 병사 수만 명을 시켜 5∽6년의 시간을 들여 승천사와 승천사탑을 건립했다. 서역승이 진상한 불골(佛骨)을 금은으로 된 관곽에 넣어 탑 아래 묻었다고 한다. 1055년 송나라가 하사한 <대장경(大藏经)>을 사원 안에 두었다. 사원과 탑이 완공된 후 위구르(回鹘) 고승을 초청해 강경(讲经)하게 하고 황태후와 황제가 자주 경청했다고 한다. 당시 량저우(凉州)의 호국사(护国寺), 간저우(甘州)의 와불사(卧佛寺)와 함께 유명했으며 서하 불교 성지 중 하나이다.

해보탑(海寶塔)
인촨시에 자리잡고 있으며 건축 연대가 명확하지 않은데, 기록에 의하면 5세기 초 대하국(大夏國, 407~427)의 왕 허롄보보(赫連勃勃)가 지은 것이라 한다. 탑은 누각식 벽돌 건물로 되어 모두 11층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53.9m이다. 평면은 장방형, 매 변의 중앙에 아치문이 있고 문마다 약간 밖으로 돌출되어 있다. 탑신의 외형은 ‘亞’자와 비슷하다. 독특한 예술 풍격을 지니고 있어 중국의 현존하는 수천 기의 탑 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탑실은 장방형으로 문은 동쪽으로 나 있고, 실내에는 4개의 형문이 사면으로 통하게 났다. 나무 층계가 있어 9층까지 오를 수 있다. 옛 닝샤8경의 하나이다.

난관청진대사(南關淸眞大寺)
난관청진대사(南關淸眞大寺)는 인촨시 남환동루(南环東路)에 있는 모스크다(淸眞寺는 이슬람 사원). 청 순치(順治) 원년(元年, 1644)에 남문 밖에 세워졌다가,1953년 확장 공사를 거쳤다. 1,200㎡의 63칸짜리 대전과 남북으로 41칸으로 이루어진 배방(配房) 등 모두 1.3㏊에 걸친 건축군으로 그 규모가 인촨 시구 일곱 개의 사원 가운데 으뜸이다. 1981년에는 아랍 양식으로 이루어진 사원이 중건되었는데, 상·하 이층으로 나뉘어 상층에는 예불 대전이, 하층에는 소예배전과 남녀 욕실과 아훙(阿訇, 이슬람교 지도자인 이맘을 가리키는 중국말)의 거처가 회랑으로 연이어 있다. 대전 앞의 방탑형(方塔形)의 방극루(邦克樓)와 양측의 장랑(長廊)은 전체 사원의 풍격을 혼연일체가 되게 해 전형적인 아랍 이슬람 건축의 특색을 도드라지게 하고 있다.

<제3일차>
셋째 날은 닝샤의 동쪽에 있는 옌츠(鹽池)로 떠납니다. 이곳은 인촨에서 150km 떨어져 있으며 버스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립니다. 여기서는 가오핑푸장성영지(高平堡長城營地)장성유지공원(長城遗址公園), 옌츠혁명기념원(鹽池革命紀念園), 염호(盐池盐湖), 장가장고성유지(張家場古城遺址), 안딩푸장성역참(安定堡長城) 등을 둘러보고 다시 인촨으로 귀환합니다.

옌츠(鹽池)
옌츠는 산시(陝西)·간쑤(甘肅)·네이멍구(內蒙古) 세 지역의 경계 지역으로, 닝샤의 동대문에 해당하며 예로부터 서북문호(西北門戶)·관중요충(關中要冲)으로 불리는 군사상의 요충지였다. 한나라 때 현을 설치하였으며 1936년 홍군이 이곳으로 들어와 닝샤의 첫 번째 현급 홍색정권을 건립했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교차하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중국 ‘탄양의 고장(滩羊之鄕)’ ‘감초의 고장(甘草之鄕)’으로 불린다.

또한 옌츠현(盐池縣)은 ‘장성박물관(長城博物館)’이라 불릴 정도로 현 내에 장성이 많이 남아있다. 모두 네 군데에 장성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수대(隋代)의 장성이고 나머지 셋은 명대(明代) 장성이다.

수대 장성은 수 문제(文帝) 개황(開皇) 5년(585)년 돌궐(突厥)의 남하를 방어하기 위해 사농소경(司農少卿) 최중방(崔仲方)이 3만의 장정을 동원하여 영무(靈武)에 쌓은 장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수대 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옌츠의 수대 장성은 매우 진귀한 유적이다. 이 장성은 원래 서쪽으로는 닝샤 링우시(靈武市) 부근 황하(黃河) 동안(東岸)에서부터 동쪽으로 산시성(陝西省) 헝산(橫山)을 지나 쑤이더(綏德)까지 약 7백여 리에 달한다. 옌츠현 내 북쪽에서 보이는 수대 장성은 명대에 축조된 두도변(頭道邊, 深溝高壘라고 부르기도 함) 장성과 나란히 달리다가 어떤 때는 겹쳐지기도 하며 78.4km에 걸쳐 이어진다.

▲닝샤박물관의 가릉빈가상 ⓒ중국학교

<제4일차>
넷째 날은 인촨 인근의 유적지들을 둘러봅니다. 오전에는 유목민족의 ‘예술의 화랑’으로 불리는 허란산(賀蘭山) 암각화를 보러 가고, 수많은 중국 영화를 촬영해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리는 전베이푸(鎭北堡) 서부잉스청(影視城, 영화촬영소)을 관광합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방탑과 쌍탑 두 개의 탑이 쌍을 이룬 바이쓰커우(拜寺口) 쌍탑을 답사한 뒤, 마지막으로 서하왕국 역대 제왕들의 능묘인 서하왕릉(왕복 전동차)을 답사합니다.

허란산(賀蘭山) 암각화
허란산은 닝샤의 서북부에 있으며 인촨시 라오청취(老城區)로부터 56km 떨어져 있다. 남북으로 향하고 있으며, 전체 길이는 250㎞이다. 예부터 서융(西戎)과 강저(羌氐)·흉노(匈奴)·선비(鮮卑)· 돌궐(突厥)·당항(黨項) 등 북방 소수민족들이 이곳에서 장기간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왔으며, 암각화는 그들이 남겨 놓은 역사의 화권(畵卷)이다.

현재 허란산 동쪽 기슭 산 입구와 산 앞쪽 27군데 선상지의 광활한 초원에 대단히 많은 고대 암각화가 분포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허란커우는 허란산 암각화가 가장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통계에 의하면 허란커우에는 암각화 도안이 4,787폭이 있는데 그 중 인면상 암각화가 726폭, 동물암각화가 1,348폭, 부호암각화가 1,666폭이다.

허란커우 암각화 보호구의 면적은 12㎢로 암각화의 분포상황에 따라 보호구를 6개의 구역으로 나누었다. 풍부한 내용의 암각화에는 고대인들이 당시의 방목, 수렵, 제사, 전쟁, 오락성이 담긴 춤, 남녀 관계 장면 등의 생활상과 양, 소, 말, 낙타, 호랑이, 표범 등 다양한 동물도안과 추상적인 부호를 기록하였다. 원시씨족부락의 자연숭배·생식숭배·토템숭배·조상숭배라는 문화의 내연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인류문화사·종교사·원시예술사를 연구하는 문화의 보고(寶庫)이다.

▲허란산(賀蘭山)의 태양신 암각화 ⓒ중국학교

전베이푸(鎭北堡) 서부잉스청(影視城)
‘동방의 헐리우드’라 불리는 전베이푸(鎭北堡) 영화촬영지를 현지 사람들은 전베이푸(鎭北堡)라 부른다. 과거에는 단지 변방을 지키는 수자리(보루)에 불과했는데, 닝샤에는 이와 같은 수자리가 20여 개 가량 있다. 명 홍치(弘治)에서 만력(萬曆) 연간, 곧 효종에서 신종에 이르는 시기에 명조 정부는 한편으로는 서북 지역에 장성을 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허에서 허란산에 이르는 좁고 긴 지역에 관문을 설치했는데, 남로에는 10여 개, 북쪽에는 네 개의 관문이 있었다.

지형적으로 험준한 중웨이(中衛)의 성진관(勝金關)으로부터 남로가 시작되어 남쪽에서 북쪽으로 견고한 군사 방어체계가 형성되어 몽골 기병의 침범에 대비했으며, 당시 북로 가운데 ‘북쪽을 진압했던(鎭北)’ 것이 오늘날의 전베이푸(鎭北堡)다.

‘푸(堡)’라는 명칭은 성보(城堡), 보루(堡壘)라는 뜻으로, 과거에는 그 안에 대량의 사병이 주둔했을 뿐 아니라 소량의 사병 가족과 농민이 거주했다. 현재 말하는 전베이푸는 신바오(新堡)와 라오바오(老堡)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청 건륭 5년에 닝샤에 큰 지진이 일어나 전베이푸가 훼손되었다. 뒤에 라오바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라오바오와 규모가 비슷한 신바오가 수축되었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이런 보루들은 점차 군사적 가치를 잃게 되었다. 중국의 ‘대약진운동’ 시기에 이곳은 강철을 제련하는 곳으로 쓰였는데, 현재 전베이푸 라오바오의 성곽에는 1958년에 만들어진 흙으로 만든 고로 유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신바오의 성곽 위에 있는 ‘동굴’들은 당시 농민과 노동자가 거주하던 숙소였다.
전베이푸 서부잉스청은 원래 명청시대 변방의 성보(城堡)였다. 1961년 농장에서 노동 개조를 받고 있던 유명한 소설가 장센량(張賢亮)이 이곳을 발견하고 80년대 초 영화계에 소개한 이래로 지금까지 이곳에서는 숱한 영화가 촬영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한 <목마인(牧馬人)> <붉은 수수밭(紅高梁)> <황허의 노래(黃河謠)> <황하절연(黃河絶戀)> <노인과 개(老人与狗)> 및 대하드라마 <대화서유(大話西游)>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 <절지창랑(絶地蒼狼)> 등 60여 편의 TV드라마가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전베이푸 서부잉스청(影視城)은 중국 내에 있는 여타의 잉스청과 비교할 때 고박하고 원시적이며 황량하고 민간의 기풍이 강한 것이 특색이다. 이곳에서 찍은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배우도 많고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도 많아 그야말로 '중국에서 첫손가락 꼽는 곳(中國一絶)'이라 할 만하다. 이와 같이 중국 영화 사업에 대한 특별한 공로 덕분에 “중국 영화가 이곳으로부터 세계로 나아갔다(中國電影從這里走向世界)”는 칭호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 이곳은 중국의 서부와 고대를 제재로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 촬영에 최적지로 알려져 있다.

전베이푸 서부잉스청은 관광과 오락, 휴식이 일체화된 4A급 관광명소로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와 TV드라마의 장면 등이 남아있거나 복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영화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진열관과 고대가구진열관, 예술촬영전시실이 있고 별도로 영화상영관과 찻집·도예방·관광기념품 상점 등이 있다.

▲전베이푸의 <붉은 수수밭> 촬영지 ⓒ중국학교

바이쓰커우 쌍탑(拜寺口雙塔)
바이쓰커우 쌍탑은 인촨시 라오청쥐(老城區) 서북쪽으로 약 50여 ㎞ 떨어진 허란산(駕蘭山) 동쪽 기슭의 바이쓰커우 내에 있다. 그들은 마치 두 쌍둥이형제처럼 산 입구 양쪽을 지키고 있으며 매우 우뚝 솟아 보인다. 바이쓰커우는 허란산의 유명한 산 입구 중의 하나로, 이곳은 산이 크고 계곡이 깊으며 경치가 그윽하고 동쪽으로 틈이 벌어져 시야가 트여있다. 산 입구의 평탄한 구릉에는 커다란 건축물 유적지가 있다. 고증에 의하면, 이곳은 일찍이 서하(西夏) 불조사원의 소재지라고 한다. 쌍탑은 골짜기 입구 북쪽 사원 유적지에 있다. 쌍탑은 동서로 마주보며 우뚝 솟아있고, 서로 약 1백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모두 여덟 면 13층의 누각식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다. 두 탑 모두 평지에 곧게 세워졌으며, 대가 없고 아래층이 비교적 높으며 정남쪽으로 문을 열면 벽이 두껍고 비어있는 원통 모양의 탑실로 들어갈 수 있다.

서하왕릉(西夏王陵)
중국 서부의 닝샤회족자치구에 위치한 서하왕릉에 대한 고고학은 20세기 1백대 고고학 대발견의 하나로서 중국 소수민족 고고학역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770여 년 전, 중국에는 세 개의 왕조가 병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중원에 위치한 한족정권 송(宋)나라, 동북에 위치한 여진족 왕국 요(遼), 서북에 위치한 당항족(黨項族, 탕구트족) 왕국 대하(大夏) 즉 서하(西夏)였다.
서하는 독립된 왕국으로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기원 1227년 몽골 칭기즈칸의 대군이 서하왕국을 공략하고 서하 당항인들을 궤멸적으로 살육했다. 이때 서하왕조의 서적들도 모조리 타버렸다. 이 지역에서 위세를 뽐냈던 서하왕조는 후대에게 또 하나의 비밀만 남겨주었다.

20세기 70년대 초, 서하왕릉 유적지가 우연히 발견된 이래, 30년 동안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서하왕릉을 여러 번 조사·측정·발굴함으로써 서하왕릉의 분포와 구조가 초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서하왕릉은 약 50㎢나 되는 황량한 사막에 구축되었는데, 도합 9기의 황제 능원과 250여 채의 귀족 무덤들이 있다. 서하왕릉은 중국에서 현존 왕릉 중 규모가 제일 크고 지면 유적이 제일 완전하게 보존된 왕릉의 하나로서 베이징 명나라 13릉의 규모와 맞먹는다. 9채의 왕릉은 모두 각기 독립되고 완전한 건축군체이다. 왕릉은 북쪽에 앉아 남향하고 있으며 네모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장엄하고 엄숙하고 웅위롭다.
서하왕릉의 능탑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고 있다. 능탑은 능성의 서북쪽, 묘실의 바로 후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축은 토담대, 팔각추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상부는 점점 안으로 들어가 계단 모양으로 되었으며 제일 큰 직경이 34m 가량 된다. 탑 기반의 윗면은 7층인지 5층인지 아직 확정할 수 없다. 능탑은 서하 능원에서 중요하고 또 특수한 건축물로서 중국 기타 지역의 능묘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능탑은 서하 귀족들의 독특한 장례풍속을 반영하고 있다.

▲한자보다 더 복잡한 서하 문자 ⓒ중국학교

<제5일차>
다섯 째 날은 인촨에서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오전에는 중국의 아름다운 5대 사막 중 하나인 사포터우유람구(沙坡頭遊覽區)를 답사한 뒤, 닝샤 이슬람사원 가운데 가장 독특한 모습을 자랑하는 동서융합의 이슬람사원 퉁신청진대사(同心淸眞大寺)를 탐방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국 고대불교 예술사상 큰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수미산석굴을 찾아갑니다.

사포터우유람구(沙坡頭遊覽區)
닝샤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 중웨이시(中衛市, 중위시) 서쪽 18㎞, 자치구 수부(首府) 인촨시(银川市)로부터 189㎞ 지점에 있는 국가5A급 여유경구(旅游景區)로 닝샤·네이멍구·간쑤의 3개 성이 교차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사포터우(沙坡頭)의 옛 명칭은 사퉈(沙陀)였으며, 원대(元代) 사산(沙山)으로 불리었고 청 건륭(乾隆) 3년인 1738년 지진 발생 후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길이 약 2,000m, 높이 100여 m, 비탈 길이가 200여 m에 달하는 사막언덕이 생겨나 사포터우(沙坡頭)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모래 위에 앉아 사막 언덕 꼭대기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 때 모래 속에서 ‘웅웅’하는 종소리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중국 3대 명사(鳴沙) 중 하나인 사포밍중(沙坡鳴鐘)이 있는 곳이며 ‘사도(沙都)’로 불린다. 모래 언덕 아래에는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누천(淚泉)이 있고 물길이 황하로 유입된다.

사포터우의 북면(北面)은 텅그리사막(腾格里沙漠)이 위치하며, 아래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황하 남안(南岸)에는 샹산(香山) 산줄기가 첩첩하게 솟아 있으며 만리장성이 굽이굽이 지나고 있어 서북의 웅장한 경관과 강남의 수려한 풍광이 자아내는 감동적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막 언덕 아래 동남쪽으로는 소박한 원림이 하나 있어 옛날에는 번왕원(蕃王园)이라 하였는데 현재는 동가원(童家园)이라고 한다.
2005년 10월 중국지리잡지사(中國地理雜志社)가 조직한 전문가들에 의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사막’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로 인해 CCTV 등에 의해 ‘중국의 10대 재미있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퉁신청진대사(同心淸眞大寺)
퉁신(同心)은 회족(回族)의 정신적 중심지이다. 주민 절대다수가 이슬람을 믿고 있으며 퉁신(同心)에 있는 모스크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이다. 건축 외양은 중원의 특색을 띠고 있어 닝샤의 여타의 모스크가 아라비아풍인 것과 차이가 있다.

퉁신모스크는 퉁신현 남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명 만력 연간(1573∽1620)과 청 건륭 56년(1791), 청 광서 33년(1907)에 중건되고 확장되었다. 지상에서 7m 높이의 푸른 벽돌로 쌓은 대 위에 건립되었는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미나렛(喚拜樓, 예배를 알리는 높은 첨탑)이 있고, 미나렛을 지나면 대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약 1천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한다.

1958년 전국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새롭게 개방된 뒤에는 국무원 종교국과 닝샤 회족자치구 정부에서 전면적인 개수를 하여 닝샤의 주요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수미산석굴(須彌山石窟)
수미산석굴은 퉁신(同心)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류판산(六盤山) 지맥의 수미산 동쪽 산록에 있으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구위엔시 위엔저우구(固原市原州區) 경내에 있다. 수미산은 처음에는 펑이산(逢義山)이라 불렸는데, 당대에 수미산은 경운사(景云寺)라 불렸고, 오대와 송, 서하, 금, 원을 거쳐 명초까지 이러한 명칭이 이어졌다.

수미산은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수미루(須米樓) 소미루(蘇弥樓) 수미루(須弥樓) 등으로 음역되기도 하며, 묘고(妙高) 안명(安明) 선적(善積) 등으로 의역되기도 하는데, 인도 전설 속의 불교 명산을 가리킨다. 전설 속의 수미산은 높이가 200만여 리에 달하며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세 배에 해당한다.
수미산석굴은 북위 효문제 태화 연간(北魏 孝文帝 太和 年間, 477~499)에 처음으로 창건되었는데, 북주와 당대에 걸쳐 흥성했던 중국의 10대 석굴 가운데 하나이다. 그 규모나 풍격은 다통(大同)의 윈강(雲崗), 뤄양(洛陽)의 룽먼(龍門)석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수미산석굴은 1982년 국무원 포고령으로 국가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고, 현존하는 동굴은 162좌인데, 각 시대의 조상과 채회, 벽화, 석각 제기를 보존하고 있는 동굴 70여 좌와 조상 350여 개, 한장문각기(漢藏文刻記) 12곳 등이 남아 있다. 북주와 수당대에 개착한 대형 묘굴의 석조 조상이 가장 유명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1천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수미산석굴은 자연의 풍화 침식과 지진 등 자연적인 파괴와 인위적인 훼손으로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수미산석굴(須彌山石窟)의 장관 ⓒ중국학교

<제6일차>
이제 답사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인 엿새째에는 진나라 장성(彭陽縣 古城镇)육반산 홍군장정기념관(六盤山紅軍長征纪念館)을 참관한 뒤, 마지막으로 싼관커우 명나라 장성을 답사하는 것으로 <닝샤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황푸미 고리 진장성(黃甫謐 故里 秦長城)
황푸미(皇甫谧)는 <황제삼부침구갑을경(黄帝三部针灸甲乙经)>을 저술, 침구이론체계를 완성한 인물이다. 지금의 구위안시(固原市) 펑양현(彭陽縣) 구청진(古城镇) 사람이다. 그러나 일찍이 간쑤성(甘肃省) 링타이현(靈台縣)에서 그를 자기 지역 사람이라고 여겨 링타이현에 황푸미기념관, 능원, 공원, 기념정 및 황푸미 조각상을 세우고 황푸미문화교류협회까지 구성했다. 최근 황푸미의 고향이 닝샤 구위안시 펑양현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두 지역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전국(戰國)시대 진 장성(秦長城)이 남아있어 더 유명하다. 진 장성은 간쑤성 징닝현(静寧縣)에서 닝샤 시지현(西吉縣)으로 들어와 위안저우구(原州區)를 지나 허촨향(河川鄕) 황허촌(黄河村) 황쟈좡(黄家庄)에서 펑양현(彭陽) 경내로 들어온다. 이곳의 장성은 2진(镇) 2향(鄕) 10(村)에 걸쳐 있으며 전체 길이는 약 80여km이다. 진 장성이 비교적 잘 보존된 곳은 바이양진(白陽镇) 바이차촌(白岔村) 구간과 멍위안향(孟塬鄕) 위위안촌(玉塬村) 구역이다.

남아있는 것들은 높이가 2∽13m로 고르지 않고 성벽 아래는 7∽10m, 꼭대기 넓이는 2∽?m, 다진 황토층은 0.1∽0.3m로 다양하다. 창청위안(長城塬)·멍위안위안(孟塬塬)·바이차(白岔) 등지에는 곳곳에 장성의 보루가 남아있으며, 교통의 요지나 시야가 확 트이는 곳에는 보와 봉화대가 있다. 보는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120m, 남북 넓이 60m이다. 남아있는 돈대의 기반은 둘레 60m, 높이는 17m이다. 봉화대는 2∽3리, 혹은 4∽5리 등으로 일정치 않으며 원추형으로 쌓여 있고 바이마묘(白马庙)·당차(黨岔)·야오완(姚湾)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류판산 홍군장정기념정(六盤山紅軍長征纪念亭)
류판산(六盤山)은 풍광이 수려한 관광지이자 중국혁명사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곳이다. 산 아래에 비석에 새겨져 있는 마오쩌둥의 사(詞) <청평악(清平乐)·류판산(六盤山)>는 후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 홍군의 대장정 승리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는 1986년 류판산 정상에 홍군장정기념정을 지었으며, 중국의 전 중앙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이 기념정에 기념사를 남겼다.
  
류판산 홍군장정기념정은 계단, 화단, 비정(碑亭)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159개로 이루어진 계단은 높이가 42m이며, 타원형의 화단에는 동서로 12m, 남북으로 15m로 소나무·잣나무와 여러 꽃들이 심어져 있다. 정자는 팔각형의 터 위에 세워져 있으며 면적은 약 700㎡이다. 정면에는 마오쩌둥이 노동자·농민·홍군을 이끌고 류판산을 넘는 모습을 조각한 부조 벽화(길이 10m, 높이 7.5m)가 있다. 기념정 중심은 둘레 15미터의 정방형으로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한백옥(汉白玉)으로 난간을 둘렀다.

정자 꼭대기는 녹색의 유리 기와로 되어 있으며 12개의 회백색 화강암 기둥이 이를 받치고 있다. 정자의 처마에는 후야오방이 쓴 ‘장정기념정(長征纪念亭)’ 글씨가 새겨진 한백옥 현판이 걸려 있다. 정자에는 커다란 비석이 있는데 정면에는 마오쩌둥의 글씨로 새긴 사(詞) <청평악·류판산>이 있고 뒷면에는 닝샤회족자치구위원회, 닝샤회족자치구인민정부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마오쩌둥과 중앙 홍군이 류판산을 넘었던 과정과 당시 국민당과 격전을 벌인 상황 및 홍군의 영웅적 기개 등에 관한 것이다.

류판산 홍군장정기념관(六盤山紅軍長征纪念館)
류판산 홍군장정기념관은 닝샤회족자치구 구위안시(固原市) 룽더현(隆德縣)의 류판산 위 해발 2,832m에 위치한 류판산 홍군장정기념정의 옛 터에 확장하여 지은 것이다. 기념관의 총 면적은 5.2만㎡이며 전시관, 장정기념정(長征纪念亭), 류판산 홍군장정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에는 4개의 전시실이 있어서 홍군 장정과 관련된 유물 1백여 건과 문건,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비는 높이 26.8m, 길이 18m, 넓이 4.5m로 정면에는 장쩌민 전 주석이 쓴 ‘류판산 홍군장정기념비(六盤山紅軍長征纪念碑)’ 10글자가 새겨져 있고 동·서 양 측면에는 마오쩌둥의 시 <칠율(七律)·장정(長征)>과 사(詞) <청평악(清平乐)·류판산(六盤山)>이 새겨져 있다.
<류판산 장정 과정>
1934년 마오쩌둥은 장졔스(蒋介石)의 국민당군에 패하여 괴멸직전에 몰렸다. 그 결과 장시성(江西省)의 근거지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패주하는 과정이 이른바 장정(長征)이다. 1934년 7월부터 36년 12월까지 이루어진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마오쩌둥이 패주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류판산에 도착하였다. 이 산만 넘으면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드디어 안전지대에 진입한 것이다.

싼관커우 명장성 유지(三關口明長城遺址)
닝샤는 예부터 ‘관중의 장벽(關中屛障)’이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어, 역대 왕조는 거의 대부분이 닝샤에 장성을 축조했다. 곧 중국의 진(秦) 한(漢) 수(隋) 명(明)에 이르는 역대의 장성이 닝샤에는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어 총 연장이 1,500여km에 달한다. 그래서 닝샤는 '중국의 장성박물관'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명대에는 장성을 '변성(邊城)'이라 칭했으며, 닝샤 경내의 주요한 것으로는 서장성, 북장성, 동장성과 구위엔(固原)의 내변성(內邊城)이 있으니, 길이는 모두 약 400여km이다.

명대에는 몽골의 타타르부(韃靼部)와 와라부(瓦剌部) 등이 내몽골의 아라산타이디(阿拉善台地)에서 허란산 츠무커우(赤木口, 오늘의 싼관커우)로 들어와 평원의 각지에서 유목을 했다. 명의 통치자는 변방의 안전을 위해 특별히 싼관커우에 장성(명대에는 변장(邊墻)이라 부름)을 축조하고 관애(關隘)를 설치해 고대 인촨성을 방어하는 ‘사험(四險)’의 하나로 삼았다. ‘하동장(河東墻)’은 명 성화 8년(成化八年, 1472))에 처음 세워졌는데, ‘동대변(東大邊)’ ‘횡성대변(橫城大邊)’이라고도 부른다. 서쪽으로 횡성(橫城)에서 북으로 1km 떨어진 황허 강변의 황사쭈이(黃沙嘴)에서 시작해 동으로 수이통거우(水洞溝), 홍산바오(紅山堡), 칭수잉(淸水營)을 거쳐 옌츠현(鹽池縣)을 지나 서쪽으로 딩비엔현(定邊縣) 옌창바오(鹽場堡)에 이르러, 전장 약 400여km에 달한다.

장성은 150m마다 돈대를 쌓았는데, 높이는 3장, 너비는 2장, 장정(墻頂)은 매우 넓어 너댓 마리의 말이 병행을 할 수 있었다. 성화 15년에는 닝샤 순무 장전수(張禎叔)와 왕쉰(王詢)이 전후로 장벽의 바깥에 '품(品)'자 형의 깊은 갱을 4만4천 개나 파서 적들이 장벽 근처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중 홍산바오 일대는 호구(壕溝)의 깊이와 너비가 모두 2장이나 되어 ‘심구고루(深溝高壘)’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보(城堡)가 닝샤에는 모두 150여 군데 있다. 고대에는 30km마다 성을 세우고, 15km마다 보를 세웠으며 보의 관할구에는 봉화대를 세웠는데, 교통의 요로나 장성의 선로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봉화대를 두어 변방과 내지를 서로 연결하였다.
싼관커우 장성은 인촨시 서쪽으로 40여km 떨어진 허란산 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 관문은 닝샤와 내몽골 아라산쭤치(阿拉善左旗)의 경계지로 인촨에서 바인호트(巴彦浩特)에 이르는 공로를 뚫고 지나가고 있다. 여기에서는 끊어진 채로 남아있는 장성의 유지를 볼 수 있다. 싼관은 동에서 서로 터우다오카(頭道卡)와 얼다오카(二道卡), 싼다오카(三道卡)가 설치되어 있으며 후대 사람들이 이를 일러 싼다오관(三道關)이라 불렀다. 이곳의 산맥은 구불구불하고 지형이 험준하다. 원래 두 산이 잇닿은 오목한 땅에 관문을 세운 것이다. 예전에 싼관커우 일대는 종횡으로 장성과 돈대, 봉화대가 좌우로 연이어 있어 실로 서쪽으로 대사막을 아우르는 목구멍과 같은 요새의 험준함(西控大漠咽喉要道之險)을 지니고 있었다.

▲<닝샤 여행> 답사로 ⓒ중국학교

이번 <닝샤 여행>의 자세한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싼관커우의 장성 유적 ⓒ중국학교

이번 <닝샤 여행>은 8월 16일(토)~22(금)일까지 6박7일간 진행되며 참가비는 참가자 15명 이상 188만원, 20명 이상 183만원입니다(모든 단체여행경비 포함하며 NO-TIP NO-OPTION NO-SHOPPING). 참가 마감은 항공편 예약 관계상 7월 11일입니다. 이번 트레킹은 (주)녹색세계여행이 진행하고 인문학습원이 후원합니다. 자세한 내용 문의와 참가신청은 전화 02-2055-3700 팩스 02-2055-3900 이메일 gochina1@kornet.net (주)녹색세계여행 신영미 대리에게 연락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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