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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죽으면 의식은 어디로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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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죽으면 의식은 어디로 가나요?"

[프레시안 books] 니컬러스 험프리의 <빨강 보기>

세월호 사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합동분향소에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길게 줄을 서는 것도 다들 마다치 않는다. 잠깐, 넋이라고? 일상에서 우리는 넋, 영혼, 혼백, 영, 의식 등의 단어를 흔히 사용한다. 마치 우리가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될지 궁금할 때,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나'가 두뇌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궁금할 때, 혹은 1988년의 '나'와 2014년의 '나'는 완전히 똑같은지 문득 궁금할 때, 우리는 거대한 심연이 우리를 단숨에 집어삼킨다는 것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한다.

▲ <빨강 보기 : 의식의 기원>(니컬러스 험프리 지음, 조세형 옮김, 이음 펴냄). ⓒ이음
<빨강 보기>(Seeing Red, 한국어판 조세형 옮김, 이음 펴냄)를 쓴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 니컬러스 험프리를 따르면, 이런 질문들은 인간의 삶에서 의식(consciousness)이 담당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내 준다. 책의 서두에서 그는 컨트리 가수 조 킹(Joe King)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을 공개한다. "당신은 뇌가 죽은 다음에도 의식은 살아남는다고 믿나요? 그것을 지지해줄 과학적인 근거는 있나요?"(7쪽). 킹의 질문에 대한 험프리의 대답은 책의 끝에 나온다. 어쨌든, 의식이 중요하다. 의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2004년 봄에 하버드대학교에서 행한 초청강연을 토대로 한 이 얇은 책은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무슨 일을 하는가? 의식은 왜 진화했는가?"라는 무거운 질문들을 던진다. 스포일러를 떠벌리는 격이 될지 모르지만, 저자의 도발적인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의식은 신비스럽고 불가해하게 보이게끔 진화하였다. 의식이 이 세상을 표연히 벗어난 것처럼 보일수록,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은 자신을 더욱더 진지하고 가치 있게 대했을 것이다. 그 결과, 조상들은 더 오래 살고 더 생산적인 삶을 사는 진화적 이득을 누렸다. 요컨대, 의식이 중요한 이유는 '중요함'이 의식의 진화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일관된 주체로서의 자아는 의식이 만들어내는 허상에 불과하다.

의식이 왜 존재하느냐는 무겁고 딱딱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빨강 보기>는 경쾌하고 바삭바삭하다. 녹취록을 다듬은 책이라 마치 저자가 하는 90분짜리 대중 강연에 참석한 느낌이다.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의식에 관한 논의에 그리 밝지 않아서 이 책을 엄밀히 평가할 능력은 없다. 아래에서 책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소개한 다음, 의식의 진화에 대해 한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빨간 스크린을 본다는 것
험프리가 강연장에 들어섰다. 조명이 꺼졌다. 갑자기 스크린이 밝은 빨강으로 채워진다. 강연에 참석한 사람 S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 빨강 보기, 즉 빨강을 본다는 경험 말이다. 빨강을 볼 때 S에게 일어나는 경험을 험프리는 네 가지 요소로 분해한다. 첫째, S는 빨간 감각을 갖게 된다. 둘째, S는 자신이 빨간 감각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셋째, S는 빨간 스크린이 바깥에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넷째, S는 이들을 경험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네 요소는 대개 함께 동시에 일어나지만, 따로 일어날 수도 있다. 시각 피질이 외과적으로 제거되거나 크게 손상된 인간이나 동물은 '맹시(blindsight)'라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시각을 지닌다. 맹시인 사람은 자기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물의 형태나 방향, 심지어 색깔조차도 꽤 정확하게 맞춘다. 맹시인 사람을 빨간 스크린이 무대에 띄워져 있는 강연장으로 데려온다고 하자. 그는 자신에게 빨간 감각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이 스크린이 빨갛게 칠해져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험프리는 맹시가 정상인에게서도 감각(나의 경험이 내게 주는 느낌)과 지각(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분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좋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지각이 감각과 상대적으로 무관한 경로라면, 시각 피질이 손상된 사람이라도 빨간 스크린을 지각하는 데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건에 의해 촉발된다 하더라도, 감각과 지각은 그 사건에 대한 본질적으로 다른 해석이며, 연쇄적으로가 아니라 병렬적으로 일어나고, 둘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더라도 훨씬 나중에 벌어진다."(58쪽)

감각은 세상을 지각하기 위한 원재료로 사용되지 않는다. 감각과 지각은 서로 독립적인 정신적 과정이다. 험프리의 이 대담한 주장이 맞다고 치자. 우리의 뇌가 감각 자극에 별로 관심이 없다면, 왜 뇌는 그 자극을 표상하는 부가적인 일을 하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 것일까? 뇌가 감각에 열렬하게 관심을 두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기능적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지각은 있지만 감각을 상실한 맹시 환자들을 들여다보면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다. 맹시 환자들은 자신의 보기가 "자신과 관계된" 것이라고 더는 느끼지 못한다. 즉, 환자들은 손상된 시야를 활용해 자신이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한사코 부정한다. 환자들은 맹시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신이 어떻게 맹시를 해냈는지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지닌 놀라운 능력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 무엇보다도, 맹시 환자들은 자기 자신의 자아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찰을 바탕으로, 험프리는 감각이 하는 일을 밝혀낸다. 감각은 주체가 외부세계와 사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해 주며, 지금 이 순간의 경험에 '나됨(selfhood)'을 부여한다. 감각을 가지면서 주체는 비로소 의식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의식은 왜 진화의 역사를 통해서 선택되었을까? 험프리는 머나먼 옛날 바다에 떠다녔던 원시동물로부터 현재의 인간에 이르는 가상의 진화적 궤적을 제시한다. 최초의 단계에서, 감각은 그저 자극이 있는 부위에 나타나는 국소적인 꿈틀거림 반응에 불과했다. 원시동물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신적으로 자각하고 있다고 가정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동물의 삶이 점차 복잡해지면서, 감각은 점차 몸 안으로 "사유화"되어 궁극적으로 그 전체 과정이 외부세계와 유리된 채 뇌 안에 있는 내적인 고리 안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외부세계를 점점 더 정밀하고 충실하게 표상해내는 내적 과정이 동물에게 생존상의 이득을 주었으리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요컨대, 의식은 사람들에게 자아라는 허상을 심어주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식이 형이상학적으로 주목할 만하다고 – 정상적인 시공간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고 – 생각한 우리의 선조들은 자아로서 스스로를 더욱더 진지하게 대했을 것이다." (147쪽). 신비스럽고 속세를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자아가 점점 중요해질수록 인간의 자신감은 더욱 부풀려지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인간 영혼으로서, 나는 죽어서도 보존되는 아주 특별한 뭔가를 지녔다는 신념이 인간으로 하여금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게 하고,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위해 높은 곳을 지향하게 한다.
의식의 그 기능은 어떻게 번식을 증대시켰는가?
"의식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의식의 본성을 이해하는 왕도라는 험프리의 견해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의식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고 보게 할 자아를 만들어내도록 고안되었다는 험프리의 제안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의식을 지녔던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이 의식을 지니지 않았던 다른 조상들보다 생존과 번식상의 어떠한 이점을 누렸는지 좀 더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현상적으로 두터우면서 실체적인 자아,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육신의 죽음조차 뛰어넘는 자아를 가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더 높은 번식 성공도를 거두었다는 말일까?
이 문제에 대한 험프리의 입장은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한 곳에서는 자아 관념을 지닌 조상들은 "자신감과 자기 중요성이 더욱 부풀려지며 각자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게"(147쪽) 되었으리라고 험프리는 제안한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더 생산적인 삶을"(144쪽) 살았다고 본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성공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게 되고,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위해 높은 곳을 지향하게 되었으리라고 본다.(144쪽) 자신의 삶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거나, 더 생산적인 삶을 누린다거나, 더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은 물론 모두 바람직한 일들이지만, 그 결과 어떻게 더 많은 상대와 짝짓기하여 더 많은 자식을 낳을 수 있었는가는 좀 더 보충설명이 필요한 듯하다.

이러한 의문은 물론 험프리가 <빨강 보기>로 이룩한 성취에 비하면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 이 책은 빨강을 본다는 사소한 행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의식, 영혼, 정신, 자아처럼 우리를 문득문득 괴롭히는 거대한 질문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역자의 꼼꼼하고 정확한 번역도 즐거운 독서를 경험하게 해준다. 뇌가 죽은 다음에도 의식은 살아남는지 물은 컨트리 가수에게 험프리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이제 짐작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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