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작업 중이던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고가 또다시 발생했다.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 조선소에서만 두 달 새 8명의 하청 노동자가 숨지고 4명이 다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잇따른 사고가 발생하자 "책임을 통감한다"며 안전 관리 부서를 대표이사 직속으로 격상하는 등의 대책을 내놨다. 그러나 안전 관리·감독의 사각지대를 필연적으로 부르는 사내하청 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무엇보다 조선업에서 크고 작은 재해가 잇따르는 데엔 정부의 감독 부실이 있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업장 안전 관리를 각 기업의 '자율'에 우선 맡기는 '조선업 안전보건 이행평가제도'가 현장에선 사고 예방에 '독'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중, 하청 구조 개선 의지 없는 "무의미한 대책" 발표
28일 밤 숨진 하청 노동자 김 모(39) 씨는 사고 당시 4안벽에서 대형 블록을 이동하는 트랜스포터 차량의 신호수로 일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8시 49분께 김 씨는 2미터 아래 바다로 추락했고 10시 10분께 119구조대가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10시 45분께 숨졌다.
이로부터 불과 이틀 전인 26일에는 선박의 녹을 제거하는 샌딩 작업을 하던 하청 노동자 정 모(44) 씨가 공기호스에 목이 감겨 숨진 채 발견됐고 21일에는 용적 작업 중이던 LPG 선에 불이 나 하청 노동자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다쳤다.
사고가 계속되자 현대중공업은 29일 "고인이 된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국민 여러분에게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입장을 내놨다.
아울러 안전경영부를 비롯한 각 사업본부 산하 9개 안전 환경 조직을 대표이사 직속 안전환경실로 개편하고 총괄 책임자를 전무급에서 부사장급으로 격상하는 대책을 발표했다. 중대 안전 수칙 위반을 발견하면 안전 관리자가 작업 중지권을 즉각 발동해 사고를 예방하겠다고도 밝혔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하청을 불문하고 "상황을 별로 개선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김덕규 현대중공업노동조합 노동안전실장은 "잇따른 중대 사고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3만7000명에 이르는 하청·물량팀 노동자 사용에 있다"고 지적했다. 물량팀은 일정 일감만 마치면 바로 해고되는 2차 하청 노동자들이다.
하창민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 또한 "하청 노동자나 물량팀은 안전 교육도 받지 못하고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는다"며 "(현중이 이날 내놓은 대책은) 의미 없는 대책"이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가장 최근 사고 발생일인 28일은 울산 현대중공업 사업장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이 시작된 날이었다. 감독이 진행되는 중에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하 지회장은 "1년에 2명 이상의 노동자가 숨지거나 크게 다치는 중대 재해가 발생한 경우에나 특별 감독이 시행되고 그나마도 끝나고 나면 더는 (감독관이) 안 온다"며 "사람이 죽어야 안전 관리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허술한 조선업 관리·감독 체계…기업에 '자율' 맡겨
정부의 안전 감독 체계가 애초에 허술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노동부는 조선업 등을 상대로 이른바 '안전보건 이행 평가제'란 것을 시행하고 있다. 기업에 안전 관리 '자율' 성을 부여하는 제도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자 산재 은폐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 평가제에 따라 기업은 1년에 한 번 안전보건 이행 평가 계획을 작성해 제출하고 산업안전보건공단과 대학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 평가반은 3~4일 만에 계획 이행 여부를 평가해 양호·보통·미흡 등의 등급을 사업장에 매긴다. 100인 이상을 고용하는 26개 조선업체를 상대로 진행되며, 우수 등급을 받은 기업에는 이듬해 해당 제도에 따른 안전 평가를 면제 및 유보해준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 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 당장 지난달 6일 하청 노동자 오 모(40) 씨가 작업 중에 철판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현대삼호중공업의 경우, 지난 1월 28일 해당 평가에서 '최고등급'(우수)을 획득했다. 2011년과 2012년 '양호' 등급을 받은 대우조선해양에선 2012년 1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노동자 3명이 작업 중 사망하고 9명이 다쳤다.
"고양이한테 생선 맡긴 식의 안전 관리"
이 제도의 전신은 2006년 도입된 '자율관리 평가제도'다. 정부는 "근로감독관 수가 부족하다"는 점, "사업장의 자율적인 안전관리 활동을 촉진해 사업주의 안전 의식을 제고하겠다"는 점, 그리고 "안전보건 전문 서비스 시장을 활성화해 민관 협업을 강화하겠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이 제도를 도입했다.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과 관계자는 29일 <프레시안>과 한 통화에서 "이전까지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정기 또는 수시 근로감독을 진행했었다"며 "그러다 기업 스스로 산업안전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감독' 중심에서 '평가' 중심으로 안전 관리 방식을 바꾸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도가 시행되고 4년 후인 2010년 7월, 국민권익위원회는 "자율관리업체에 대한 (각종 세제 등) 혜택 제공에도 관리 업체의 사고 발생률이 더 높다"며 "노동부의 직접적인 안전관리 시스템 마련" 등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실제 2008년 자율안전관리업체 사업장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정부가 파악한 사례에서만 100명이다. 대부분 상위 100대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정부는 국민권익위의 이 같은 권고 이후 현재와 같은 '안전보건 이행평가제도'로 그 이름과 형식을 약간 바꾸었다. 하지만 안전 관리를 기업 자율에 일단 맡기고 있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지난해 4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독일·미국 등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산업안전감독관 1인당 담당 근로자 수(사업장수)가 2.5~5배 많은 실정"이라며 "근로감독관 수를 늘리고 재해 반복 사업장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편, 노동부 관계자는 "안전보건이행 평가제도 시행 이후 산업재해 정도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며 "제도 도입 이전보다 체계적인 안전 관리가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잇따르는 조선소 재해에 대해선 "최근 조선업이 호황이 되면서 물량이 늘어난 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며 "정부에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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