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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옆 그 남자, 박근혜 옆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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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옆 그 남자, 박근혜 옆 그 남자

[취미는 독서] 열여섯 번째 날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살짝 휘청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엔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이념이 바뀌고, 소수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토지가 더 폭넓게 분배됐다. 주류 이념과 경제 질서가 바뀐 것, 한마디로 '혁명'이다.

이런 역사를 소설로 꾸며보면 어떨까 싶은, 먼지 쌓인 소망이 있었다 물론, 소설 쓰기가 아무나 할 일은 아니다. 오랜 습작과 취재가 필수. 게으르고 둔한 나로선 그저 꿈만 꿀 뿐이다.

▲ <정도전을 위한 변명>(조유식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휴머니스트
내가 눈여겨봤던 인물은 이성계를 도왔던 여진족 무장 퉁두란(이지란)이었다. 여진족 출신으로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그는 일종의 경계인인 셈인데, 여러모로 구미가 당겼다. 북방의 거친 들판을 누비던 야생의 기질을 안고 구중궁궐에 들어갔을 때 느꼈을 거북함. 성리학 교양으로 똘똘 뭉친 사대부들과 교류하며 느끼는 콤플렉스와 답답함, 우월감, 어색함. 칼과 붓 사이의 간극. 이런저런 간극 사이를 오가는 경계인, 퉁두란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던 게다. 경계인다운 면모가 확 두드러지게끔 퉁두란을 아예 '젠더' 측면에서도 '비주류'로 묘사해보자, 하는 데 까지 구상을 하고 더는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를 공중파 방송이 드라마로 만든다는 게다. 더구나 내가 탐냈던 인물, 혁명가 정도전과 경계인 퉁두란이 비중 있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내가 먼저 다뤄보려 했는데….' 아쉬운 바람 한줄기가 허파를 휘감고 지나갔다. 실제 전파를 탄 드라마 <정도전>은 드문드문 봤다. 그러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전후한 대목에서 확 몰입해서 봤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꼬박꼬박 챙겨 볼 것 같다.

그리고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한영우 지음, 지식산업사 펴냄), <정도전을 위한 변명>(조유식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등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책장에서 다시 꺼내 만지작거릴 것 같다. 소설 <퉁두란> 집필은 드라마 다 본 뒤로 미뤄야겠다. (드라마 끝나면, 금세 다른 핑곗거리가 튀어나오겠지, 슬프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오늘 '프레시안 books'에는 내가 쓴 서평이 하나 올라간다. 로널드 드워킨이 쓴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이 그것이다. 진작 그 책을 다 읽은 후, 어쩌다가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쓴 이 책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도 손에 넣게 되어, 어쩌면 같이 서평을 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쭉쭉 읽어나갔다.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명성을 알게 된 것은 잡지 <베너티 페어> 때문이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 나는 '멋진 저널리스트/칼럼니스트'의 모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유쾌하면서도 역동적인 문장으로 세상만사를 들쑤시며 촌평을 날리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알마 펴냄). ⓒ알마
<신이 사라진 세상>과 마찬가지로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또한 유작이다. 열정적인 연설가이기도 한 히친스는 어느 날 자신이 후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항암치료를 하며, 그 와중에도 '전투적 무신론자'인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극성 종교인들과 논쟁을 하고, 남아있는 삶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발병 이전까지 히친스의 인생철학은 주로 니체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겪으며, 그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격언은 딱히 옳은 것 같지 않다고, 니체 본인이야말로 그가 걸린 매독으로 인해 더 강해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빈정거린다.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그 어딘가에서 어떻게 윤리적인 태도와 좋은 삶을 꿈꿀 수 있을까. 히친스에게는 그 질문에 대답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설령 여유가 있었다 해도, 로널드 드워킨처럼 칸트주의를 복원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던 분께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편히 쉬시길.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입시가족 : 중산층 가족의 입시 사용법>(김현주 지음, 새물결 펴냄)을 읽으면서, 거의 20여 년 전 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하자마자 느꼈던 생경함을 기억해냈다. 강북 끄트머리에서 성장했던 나는, 외국어고등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처음으로 '강남 8학군 출신'을 만났고, 그들(정확하게는 그 집안)의 재력과 문화적 풍요에 기가 죽었다. 그때 처음으로, "부잣집 애들이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구나"라는 말을 입 밖에 내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주변의 반응은 뜨악했다. '돈'과 '인생'의 상관관계를 대놓고 말하는 게 어딘지 불경하다는 표정들이었다.

▲ <입시가족 : 중산층 가족의 입시 사용법>(김현주 지음, 새물결 펴냄). ⓒ새물결
<입시가족>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학력자본의 재생산' 파트였다. 자녀의 지위가 부모의 지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일반적인 통념이지만, 여기선 '중산층' 가족(이 책은 2005년 당시 40대가 주축이 된 부모 24팀을 인터뷰하면서 시작했다. 그러니까 소위 '386 세대'거나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학교를 다닌 세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의 기원을 조금 더 높이 거슬러간다. "조부모가 종사했던 직업군과 현재 부모가 종사하고 있는 직업군을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혼란기에 "(화이트칼라 계층으로 일컬어지는) 신중간계급"에 속했던 조부모의 교육열이 부모에게, 그리고 지금의 자식들에게 상속되었음을 밝힌다. 특히 아버지와 친조부모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와 외조부모 간의 상관관계는 인상적이다. "어머니의 신중간계급 획득은 외조부가 신중간계급일 때 의미 있게 나타났다."

이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 사이의 밀접한 결합을 통해 계급재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추적하는 장으로도 이어진다. 저자 김현주는 연구자 최샛별의 논문을 인용하며 한국 근대사에서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경제자본을 획득해 부를 축적한 계급 또는 집단이 서구의 고급문화를 자신들의 문화자본으로 수용함으로써 다른 계급 또는 집단과 구분 짓는 메커니즘으로 사용"했음을 지적하고,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 이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상기 여성 집단[즉 1965~1990년 사이에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을 다닌 여자 졸업생]은 어떻게 해서 계층적 하향이동을 경험하지 않고 상류층 출신의 계층적 지위를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야말로 드라마 <밀회>가 겹쳐 떠오르는 지점이다.

<입시가족>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중산층 가족의 세속적 욕망, 그리고 그것이 '경제적 부'에만 머무르지 않는 '좀 더 나은 인간'을 지향하는 '착한' 욕망을 모두 아우르다보니, 때때로 전체적인 논점이 흔들린다는 인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실체 없는 '중산층'의 재생산 욕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참고점으로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
지난주부터 통 책을 읽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는데 어제 모처럼 몇 권의 책을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긴 했었다. 이를테면 조지오웰이 <1984>를 지을 때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유럽의 마지막 인간" 정도였던 게 기억난다. 유럽이라는 거대한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과연 마지막 인간은 어떻게 될까? 우리 모두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서 쓴 것이 <1984>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나무그늘아래 꿈처럼 너무나 아름다운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현경 옮김, 민음사 펴냄) 그 중에서 칸과 마르코 폴로의 대화 부분이 몇 번이고 귀에 메아리쳤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칸이 이렇게 묻자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지옥 같지 않게 사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쉽고 두 번째는 어렵습니다. 쉬운 것은, 나도 지옥이 되면 됩니다. 두 번째는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마치 지옥 같지 않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 사람들에게 공간을 넓혀주면 됩니다. 두 번째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싸워야하니까…'

이 참혹한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참혹한 짓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 아니란 것을 이번 사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지옥 같지 않게 살려는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도록, 제발 사람들이 숨 좀 쉬며 살 수 있도록 나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이종필 지음,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이명현(천문학자) :
'유체이탈 화법' 박 대통령이 꼭 봐야할 책이 있다.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이종필 지음, 글항아리 펴냄)가 바로 그 책이다.

그런데 그냥 보내면 절대 안 된다. 화법을 몽땅 '이랬다 저랬다 제멋대로' 화법으로 바꿔서 보내야만 한다. 프로토콜이 맞아야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화법 맞추기는 반드시 비전문 정부 유착 업체에게 돈 많이 주고 맡겨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이랬다 저랬다' 화법이 나올 테니 말이다.

마침 한국을 방문해서 뭐 뜯어먹을 것은 없는지 노리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이 책을 한권 보냈으면 한다. 단, 역시 정경 유착이 강한 민간업체에게 번역을 맡겨야만 할 것이다. 어차피 읽지 않을 것이니 '콩글리시'가 더 좋겠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고깃덩어리를 수직으로 자르면 고기의 단면이 나오지요. 기자가 하는 일이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5년 전 언론인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언론 글쓰기 수업에서 현직 기자였던 강사가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당시 언론사 입사 시험을 준비하던 내게 이 직업에 접근하는 틀이 되어 주었고, 후에 정말 기자가 되고 나서도 종종 떠올랐다. 나는 <언더그라운드>(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문학동네 펴냄)나 <인 콜드 블러드>(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시공사 펴냄)와 같이 기성 언론이 사건을 소화하는 방식에 한계와 문제의식을 갖고 '입체적으로' 쓰인 책들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걸 읽으면서 언론 종사자로서 깊게 회의하면서도 그 단면적인 접근 방식이야말로 언론의 필요가치이자 특성, 의무라는 생각을 재확인하곤 했다.

사건을 추적하는 기자들이 조사한 단서 하나하나를 메모지에 적어 벽에 붙인 뒤, 그것들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려 실로 잇거나 하는 장면이 영화에 많이 나온다. 우리는 신문이나 방송 뉴스에서 그 관계도를 작은 단위에서 적절히 끊어 준 상태를 본다. 아니, 봐야 한다. '단면'의 의미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언론은 실이 떨어진 채 흩날리는 메모지들만을 주워 가장 자극적인 형태로 분칠하기에 여념이 없다. 사태를 관망하는 듯한 말투를 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무언가를 기술할 때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 <상황적 사고>(윤여일 지음, 산지니 펴냄). ⓒ산지니
그간 윤여일의 책을 꾸준히 읽은 데에는 이런 '직업적인' 고민과 회의라는 배경이 있었던 것 같다.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자이자 다케우치 요시미와 쑨거를 '번역'하는 그의 글쓰기와 언론 사이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오히려 반대 극점에 서 있다. 그러나 "대상의 운동을 기술하는 작업"이라는 원리적 의미상의 공통점에서, 그가 말하는 지식의 문제는 '쓰는 사람' 모두의 윤리적 문제로 번역되어 내겐 '보도'라는 층위에서 겹쳐 읽히곤 했다.

물론 그가 얘기하는 '인식의 딜레마'는 앞서 말한 단면과 입체의 문제와는 공간감각 자체를 달리한다. '단면과 입체'는 이미 대상이 멈춰 있다고 상정하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대상을 두고 쓰는 사람 당신이 안과 밖, 경계, 그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묻는다. "대상과의 관계가 멈춰서 있지 않은데도 지식을 생산할 수 있는가. 주체가 다루려는 대상 속에 주체 자신이 포함되어 있을 때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주체는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대상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의 끄트머리에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인식주체 자신이 바뀔 수 있는지"라는 윤리적 화두가 대두된다.

지난해 여름 저자가 보내 준 <상황적 사고>(산지니 펴냄)를 9개월 만에 -뭔가를 붙잡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로- 읽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지면에 발표한 여러 주제의 글들을 엮은 책이다. 무력한 시대 패배의 반복 속에서 그 무력과 패배를 내적 동력으로 삼아 '공동의 무기'를 벼려내려는 사고(思考)의 과정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혹은 위와 같은 쓰기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권한다. 후자의 고민은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산지니 펴냄)에 더 깊이 드러나 있다. 추천을 한다면 이를 더 앞세우고 싶다.

▲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정승일(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소싯적에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읽으려고 몇 장 넘기다가, '이게 뭔 소리여'하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에 골치 아파하며 손을 놓은 적 있다. 그런데 엊그제 접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책세상 펴냄)이라는 책을 읽어보니, 왜 니체라는 인물이 저런 문장, 저런 표현들을 썼는지 새록새록 와 닿는다. 심각한 두통과 구역질, 정신분열 증세에 시달리던 니체가 도시를 떠나 숲과 호숫가를 하루 7시간, 10시간씩 걷고 또 걸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고 대자연 속에서의 자기 느낌을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뱉어냈다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니체는 이 길을 이러저러한 느낌으로 걸었다>는 제목으로 바꾸어 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니체가 청년이 된 이후 늘 구역질과 두통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혹시 서양인들 중에도 100명 중에 1명꼴로 있다는 밀가루·우유 알레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내가 독일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 하나도 어릴 적부터 그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다가 일본인 여자친구를 만나 매일 쌀밥을 먹으면서 그 증세가 싹 사라졌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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