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추가로 제출한 증거들은 무용지물이 됐다. 애초에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평을 받았던 증거들이다. 결국 유우성 씨 사건 항소심에서는 국정원의 조작 증거가 검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셈이다. 대한민국 검찰의 참담한 수준이다.
특히 유 씨의 동생 가려 씨가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받았다고 판단한 부분은 이번 판결의 핵심이다. 1심 재판부가 "(가려 씨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받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을 2심 재판부가 뒤집은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흥준)는 가려 씨가 "영장 없는 부당한 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고 판단했다.
국정원의 가혹 행위가 없었다는 부분 역시 뒤집혔다. 재판부는 국정원이 "불필요한 모욕"과 "망신 주기로 조사 권한을 남용"했다고 판단했고, 국정원이 "오빠와 살게 해주겠다"고 한 부분 역시 "회유"라고 명확히 했다. 증거 조작뿐만 아니라, 첫 수사 단계에서부터 국정원은 불법 수사를 자행해 왔던 것이다.
국정원의 불법 수사 전모는 추후 특검 등을 통해 밝혀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검사석에 앉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검사 이현철) 검사들은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는 과정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하늘을 봤고, 일부 검사는 중간에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1심보다 진일보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폭행 협박 부분은 법원이 판단하지 않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했다.
유가려 구금 당한 상태에서 회유에 의한 진술, 증거 능력 없다
재판부는 이날 유우성 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리면서 동생 가려 씨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정원이 가려 씨에 대해 피의자 조사를 하면서 영장 없이 부당하게 구금했고, 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박탈 당한 상태에서 진술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유가려는 2012년 10월 중앙합동신문센터 조사에서 이례적으로 독방에 수용됐다"며 "유가려 신분이 화교로 밝혀진 이상 조사가 진행되더라도 북한 이탈 주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이후 (국정원의) 조사는 북한이탈주민보호법 상 행정 조사라기보다는 피의자 유가려에 대한 국보법 위반 수사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유 씨가 피의자 신분이 아니었다는 검찰 측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국정원이 작성한 가려 씨 진술조서에 대해 재판부는 "(유우성, 유가려) 둘 다 사실상 피의자 입장이고 특수잠입탈출에 대해서는 공동 관계에 있는데, 진술 조서에서 피의자는 동의하지 않았고,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취지여서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가려 씨가 합신센터에서 조사를 받을 당시 신체의 자유를 부당하게 구속당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북한이탈주민보호법 적용이 개시된 이상 국정원의 임시 조치는 적법하다. 그러나 (국정원의) 강제 수사였다는 점에서 조사 인정 범위 내에서만 임시 조치가 돼야 한다"며 "유가려는 이미 화교임을 고백했고, 북한이탈주민보호법 대상이 명백하게 아니어서, 임시 보호 조치를 마치고 비보호 결정을 해야 했다. 그러나 170일이 지난 2013년 4월에야 수용 해제를 했다. 국정원의 조치는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의 임시 조치 재량권을 일탈함으로써 신체 자유를 부당하게 제한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가려는 합신센터 수용 기간 중 자신 또는 피고인의 국보법 위반에 대해 수십 차례 진술하고, 검사의참고인 조사에 응했다"며 "수사 기관으로서는 영장을 청구해 얼마든지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데도 이같이 안 하고 합신센터에 수용됐다는 이유로 사실상 영장 없이 신병을 확보하고 유가려 및 피고인을 수사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가려는 11월 5일 이후 독방에 수용됐고, 보위부 인입 진술 이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외부 잠금장치가 설치돼 있었고, 달력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외부 연락 또한 수용되지 않았다"며 "이는 사실상 구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가려 씨가 변호인을 만나지 않겠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장기간 독방 조사, 그리고 (오빠가 간첩이라고) 진술하면 함께 살 수 있다는 취지의 얘기 등, 유가려가 심리적 중압감 속에서 친오빠를 위해 변호인과의 접견을 거부하고 (국정원의) 조사에 응했다고 보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유가려는 초반에 화교임을 부인했는데, 그때 국정원 수사관이 (화교 유가려라고 쓰인) 명찰을 몸에 붙였다. 이같은 행위는 불필요한 모욕이고 망신 주기로 조사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며 "(가려 씨는) 초기부터 심리적 위축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부당하게 사실상 구금상태였음에도 조력받을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심리적 위축 속에서 (국정원) 수사관의 회유에 넘어가 진술을 했다. 진술을 신빙할 상태라고보기 어려워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2심 판결의 핵심이다. 1심 판결문은 "유가려가 조사받을 당시 수사관들로부터 폭행, 협박 및 가혹행위를 당하였거나 세뇌, 또는 회유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진술을 하였던 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고 돼 있으며 "불법 구금이 아니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불법 구금 사실을 명백히 인정했고, 일부 가혹행위(모욕주주기 등)와 "회유"가 명백히 있었다는 점 역시 인정했다. 이는 국정원이 불법 수사를 자행했다는 말이 된다.
검찰, 어디까지 망신당하나…증거보전절차도 증거 능력 없어
검찰이 신청했던 수원지법 안산지원의 가려 씨에 대한 증거보전 역시 증거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증거능력이 있다. 그런데 공개 금지 사유가 없음에도 비공개로 진행돼 비공개사유를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증명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검사는 형소법에 따라 증인 신문 비공개를 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사유라고 주장하지만, 비공개로 된 것은 증인신문 뿐 아니라 증거 보전 절차 전체가 비공개였기 때문에 (검찰이 주장한) 그 사유가 전부라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유 씨가 북한에 들어갈 무렵,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중요한 증거는 증인의 진술인데 이를 보더라도 개인적으로 (유 씨와) 아는 사이가 아니고, 30리나 떨어진 학교에 다녔으며, 1998년 경 길에서 본 이래 피고인을 본 적이 없었고, 별반 관련 없는 사람을 짧은 시간에 본 것을, 6년이 지난 후에 봤다고 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따라서 신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유 씨가 탈북자 정보를 북한 보위부에 넘겼다는 검찰의 공소 사실에 대해서도, 검사가 입증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유가려의 큐큐메신저(중국산 메신저) 화상 통화 사진 등이 탈북자 신원 정보를 건넨 증거로 제출됐는데, 이같은 증거만으로는 자료를 전달했다고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유가려 씨는 중국 내 피시방에서 한글 파일을 열었다고 했지만 공소사실에 나타난 피시방에는 한글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지 않아 파일이 열리지 않는다. 검사는 언제든지 (한글 프로그램을) 다운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한글뷰' 파일로 봤다는 것은 검사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 검사는 이 부분에서 하늘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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