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참사를 낳은 세월호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됐다. 검찰 수사는 2000억 원대를 훌쩍 넘길 것으로 추정되는 유 전 회장 일가의 재산 형성 의혹,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정관계 로비 의혹 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여객·해운업 등을 토대로 자산을 불려 온 유 전 회장의 개인사는 권력과 유착으로 점철돼 있다.
1991년 오대양 사건 연루 의혹으로 청구된 유 전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 그리고 1986년 사정 당국의 내사 기록 등에는 그의 행적이 기록돼 있다. 194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유 전 회장은 다섯 살 때인 1946년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한다. 1962년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대구의 한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유 전 회장은 권신찬 목사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인 권 목사와 유 전 회장은 '기독교복음침례회(세칭 구원파)'의 전신인 평신도복음선교회를 이끌고 전도 활동에 힘을 쏟았다. 서울 성동구의 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유 전 회장은 <극동방송> 부국장을 잠시 지내기도 했다. 유 전 회장은 1976년 신자들의 헌금 등으로 조성한 자금을 동원, 부도 직전에 있던 삼우상사를 인수, 1978년 세모(청해진해운 전신)의 전신 격인 삼우트레이딩을 설립,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유 전 회장은 "삼우트레이딩 등 사업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며 교회", "돈을 내서 회사를 살려야 천국에 간다"는 식의 교리를 신도들에게 내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신자를 대상으로 조직적인 '사채놀이'에 나섰다. 그는 미양코리아, 영진상공사를 인수, 1982년 이 업체 명의로 계좌를 열어 신자들에게 5억8600만 원의 어음을 발행한 후, 1984년 부도를 내는 방식으로 10억 원가량을 사취한 의혹도 받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유 전 회장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들은 청와대 등에 진정서를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 전 회장은 권력 실세와의 관계를 이용해 이를 무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전 회장과 전두환 정권 간의 관계는 상당히 밀접했다는 후문이다.
1981년부터 유 전 회장은 '한국기독교멸공회'라는 반공단체와 함께 정부 지지집회를 열고 친정부 발언을 해왔다. '무인(武人)의 정'으로 전경환 씨와 친분이 있던 유 씨는 전 씨가 새마을중앙회장을 지낼 당시 그에게 경호원을 붙여주는 등 꾸준히 편의를 제공했다. 1983년 미국 레이건 대통령 방한 때는 자신의 경호 요원을 파견시키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유 전 회장은 내무장관으로부터 공로감사장을 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4년 3월 23일, 인천시 초도순시를 마치고 부천에 들러 유 전 회장이 운영하는 삼우트레이딩 공장을 방문했다. 당시 유 전 회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식사를 했다고 한다. 1984년 삼우트레이딩은 부도 위기를 맞은 가운데 한일은행으로부터 25억 원을 대출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형구 전 재무부차관보, 김명호 전 은행감독원 부원장보 등이 한일은행에 대출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1991년 오대양 사건 및 5공 비리 수사 과정에서 제기됐었다.
검찰은 당시 "대출 압력을 가한 사실이 없고 담보를 제공한 뒤 정상적 방법으로 대출받았으며 대출금 모두 변제"했다고 발표했다.
유병언 같은 인사가 30년 가까이 여객선을 운영하는 나라
유 전 회장이 1982년 10월 급조된 회사인 세모를 전면에 앞세우고 여객업에 뛰어든 것은, 1985년 9월 주식회사 원광과 함께 서울시로부터 한강유람선 사업 승인을 얻어낸 것이 계기였다. '세모'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거꾸로 해 만든 것이라는 설이 있었으나, 유 전 회장은 "(모세를 뒤집은 것이 아니고) 안정감을 주는 모든 도형의 기초인 삼각형"을 의미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세모가 선박 사업에 주력하는 이유로 유 전 회장이 구원파 신도들에게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하나님의 사업을 한다"고 설명하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나돌았다.
당시 수사기관의 내사 기록 등에 따르면 세모가 한강유람선 운영권을 따낸 데에는 전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원광의 회장 유복수 씨 역시 민자당 당원으로 전경환 씨, 전 전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 씨 등과 가까운 사이였다. 당초 한 개의 업체만 선정하려던 것을 뒤집고 서울시가 원광과 세모 두 개 업체를 선정한 것은 유 전 회장과 원광 측의 치열한 로비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대양 사건 수사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세모 고위관계자는 "전경환 씨가 평소 유병언 사장과 가까워 전 씨를 상대로 집중적인 로비를 했다"고 말했다.
세모는 여객선 운영업을 할 준비가 안 된 회사였다. 유람선 건조에 일반적으로 7개월이 걸리는 데 반해 세모의 유람선은 4개월 만에 건조됐다. 당시 수사 기관은 세모와 관련해 "건조 기간을 무리하게 단축하고 승선 인원이 210명으로 과다하게 책정돼 안전사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 내사 보고서에는 "조선 기술 경험이 없는 데다, 승선요금도 8개 신청업체 중 가장 비싸게(다른 업체에 비해 2~3배) 책정됐는데 서울시가 사업 허가를 내준 데 대한 비난이 자자"하다는 여론 동향도 포함돼 있다.
수사 당국은 당시 유 전 회장 구속 수사 의견을 상부에 올렸으나 묵살됐고, 결국 유 전 회장에 대해 엄중 경고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고 한다.
1986년 10월 25일 원광과 세모의 한강 유람선이 정식 운항을 개시했다. 그러나 세모 소속 유람선의 사정은 최악이었다. 심지어 운행 첫날 저수로에 돌출된 모래 언덕에 스크루가 걸려 부러지는 사고가 났다. 세모는 정식 운항 다음날인 26일에야 영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강유람선은 각종 사고를 내, 신문 사회면을 단골로 장식해 왔다.
대표적인 사건은 1990년 9월 집중호우로 인해 발생한 사고였다. 원광 소속 한강유람선이 급류에 떠내려가 세모의 바지선을 들이받았고, 두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등 15명이 숨진 사건이었다. 또 1995년에는 세모 소속 133톤급 원앙새호에서 화재가 발생, 선박 내부가 전소하는 일도 났다.
1995년 서울시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세모는 여객선의 의자를 임의로 개조하거나 여객용 보조의자를 규정보다 많이 설치해 적발된 것으로 나와 있다. 의자를 선체에 고정해 선박검사를 통과한 후, 그 의자를 뜯어내 이동식 의자로 사용한 일도 발각됐다. 인명 구조 장비를 법정기준보다 부족하게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부실 운영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모는 계속 유람선과 여객선을 운영했다. 1997년 부도가 난 이후에도 유 전 회장의 여객선 사업은 계속됐다. 각종 사고를 내놓고도 단 한 번도 면허를 빼앗기지 않고 여객선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비정상적인 한국 사회의 권력 지형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쳐 이뤄진 부실 운행 행태가 결국 세월호 침몰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에 참사를 맞은 세월호는 2009년 이명박 정부의 규제 완화 정책의 덕을 톡톡히 본 배였다. 선령 18년짜리 배를 들여와 증축, 개조해 바다로 띄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선령 제한을 기존 20년에서 30년으로 늘린 ‘규제 완화’ 정책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2008년 8월 국토해양부는 94건의 행정 규제 개선 과제를 발표하며 20년으로 획일화된 여객선의 선령 제한을 완화안을 포함시켰다. 2009년 1월, 이명박 정부는 곧바로 시행령을 개정했다.
이런 '규제 완화' 정책으로 인해 유 전 회장은 2012년 18년 된 노후 선박을 국내에 들여왔다. 이후 벌어진 사건은 우리가 모두 아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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