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의 막내 아들이 세월호 침몰 참사와 관련해, "국민이 미개하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맹비난을 받고 있다. "싸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서울시장에 도전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은 화들짝 놀라 "제 막내아들의 철없는 행동에 아버지로서 죄송하기 그지없다"면서 '표 떨어지는 소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수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이 학생이 '정몽준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아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했다. 왜 이런 글을 쓰게 됐을까? 일각에서는 이 학생이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수준의 학교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경험을 한 학생이 아니다"는 시각을 더 확장하고 싶어졌다. 그러자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한 재수생 나이에 본인의 마음도 심란할텐테, 어찌나 효심이 깊은지 아버지를 생각해서 참지 못할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6.4 지방선거에서 '차기 대권의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시장의 강력한 후보이자, 장차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유력한 아버지를 생각해서 나온 것이 아니냐는 짐작이다.
정몽준 아들의 '효심 어린 시선'
요즘 대부분의 학생들은 겉똑똑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누구를 말로 공격하거나 방어하는 데는 똑똑한 애들이 많다. 북한에서는 30세도 안된 나이에 '3대 세습'을 하고 고모부도 하루 아침에 사형시키는 최고지도자가 있다. 요즘 얘들이 하는 말을 나이를 근거로 그냥 "철없다"고 치부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평가가 아닐까.
정 의원 아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문제의 글을 보자.
"경호실에서는 경호 불완전하다고 대통령한테 가지 말라고 했는데 대통령이 위험을 알면서 방문을 강행했다. 대통령이 최대한 노력하겠다는데 소리 지르고 욕하고 국무총리에 물세례하잖아. 국민이 모여서 국가가 되는 건데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 아니냐."
이 아들은 아버지가 박근혜 대통령과 불편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실종자 가족들의 시선이 아니라 대통령 일가라도 되듯 분개했을까. 대통령에게 국민이 함부로 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던 이 아들의 시선에는 '역지사지'의 효심이 어려있다. 왜냐하면 아버지도 유력한 대권후보이기 때문이다.
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어이없는 글을 썼다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여론조사 결과도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5주 연속 60%대를 기록하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21일 발표한 4월 셋째 주(14일~18일) 주간 정례조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전주보다 1.6% 포인트 상승한 64.7%로 나타났다. 국정수행을 잘 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3.3% 포인트 하락한 27.2%를 기록했다.
심지어 여객선 침몰로 인한 실종 가족들과 만난 다음날인 지난 18일에는 지지율이 71%를 기록하며 취임 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세월호 참사에도 대통령의 지지율 상승, 정말?
아마 박 대통령을 정부의 최고책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리얼미터'라는 여론조사기관 자체를 불신하거나, 잘못된 여론조사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부가 엉터리여서 박 대통령이 얼마나 속을 썩겠냐"고 하는 일단의 민심이 느껴진다.
나는 정 의원 아들의 글이나, 세월호 참사에도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현상에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은 선출직 공무원이 아니라 왕족 출신의 왕 정도로 생각하는 민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다.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 송 변호사가 법정에서 외친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대부분의 유권자가 굳게 믿고 있다면, 정 의원 아들의 글이 드러낸 '국민 미개 사상'과 박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 행진 현상은 나타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는 현실은 경제지표로도 확인된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기업의 소득 증가율이 가계의 3배를 웃돌았다. 기업(법인)의 가처분소득은 최근 5년간 80.4%, 매년 16.1%씩 기업의 소득이 늘어났다. 같은 기간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26.5%, 매년 평균 5.3%씩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국의 가처분 가계 소득은 OECD 사실상 꼴찌
국가 전체의 소득에서 가계에 돌아가는 몫은 점점 줄어든 것이다. 급기야 2012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비교할 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21개 국을 대상으로 한국은행이 분석해보니, 한국은 '사실상 꼴찌'로 나타났다.
이들 국가 중 한국은 16위로 하위 6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18~21위가 세금 등을 많이 걷어 정부가 재분배하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등의 '복지국가'라는 점을 고려했을때, 17위인 에스토니아를 제외하곤 사실 꼴찌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기업에서 가계로 부(富)가 옮겨지는 경로가 차단됐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해 2만6000달러, 올해는 3만 달러에 육박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경제 성장에 원화가치 상승 효과가 더해진 결과다.
그러나 국민소득에서 기업과 정부의 몫을 제외한 가계의 1인당 소득은 절반을 조금 넘는 1만5000달러 수준이다. 그래서 1인당 국민소득 통계를 접할 때마다 피부로 느끼는 것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동양의 왕권신수 사상이 각인된 백성들은 정부가 지리멸렬해도, 심지어 나라를 외침에 의해 빼앗길 위기에 처해도 나랏님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다. 왕의 땅에서 초근목피라도 먹고 살게 허락해준 백성들이 보은에 나설 기회라고 여긴다. 실제로 조선 통치 500년 동안 200년 이상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으나, 백성은 농사 짓다말고도 의병을 일으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이 바뀌어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됐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상을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까? 이들 뿐 아니라 제대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을까? 왕정 시대에도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 왕이 있듯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뒤에 사실은 관료와 기업들이 이 나라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국민은 얼마나 될까?
몇 년 뒤면 독자기술로 우주 로켓을 쏘아올린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을 주인으로 여겼다면, 생때같은 자식들이 침몰된 배에 갇힌 채 죽어간다면 외부에서 구조할 기술과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았을까? 정말 "바다 밑의 조류가 세고, 시야가 캄캄해서" 구조할 기술이나 장비가 없는 것일까? 아니, 대한민국에서 국민이 정말 주인이라면 애당초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가 난 뒤 20년이 넘어 데자뷔를 느끼게 할 세월호 침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슬퍼할 것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인이 정말 국민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이렇게 두 눈 멀쩡히 뜨고 자식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참사가 또 일어나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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