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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행하고, 남미는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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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행하고, 남미는 행복한가?

[기고] 라틴아메리카의 위대한 두 별이 지다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최근 타계했다.

마르케스는 2014년 4월 17일 87세로 멕시코시티에서, 라클라우는 4월 13일 78세로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평가받고 있다. 라클라우는 그람시를 이어받아 헤게모니 이론을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구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더욱 정교하게 다듬었고, 주류 포퓰리즘 이론에 맞서 진정으로 '대중'이 주인공이 되는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포퓰리즘을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연 학자이다. 한국 사회 보수 진영이 포퓰리즘 담론으로 엉뚱한 주장을 통해 진실을 왜곡하는 맥락을 라클라우가 안다면 기가 막혀 할 것이다.

마르케스도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좌빨' 지식인이다. 그는 작가이기 전에 뛰어난 '기자'였다. 마르케스의 대표작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백 년의 고독>(1967년)이다. 이 두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중'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아니 이 두 사람뿐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뛰어난 정치가, 지식인, 예술가,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이 부분을 알고 싶은 독자들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저서를 읽기를 권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년). ⓒwikipedia.org
나는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이룩한 미학적, 이론적 업적을 되새길 생각은 없다. 그럴만한 지식을 축적한 사람도 못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오늘의 '처참함'을 보면서 강한 갈증을 느끼고, 또 예수의 수난과 부활절을 보내면서 라틴아메리카 인들이 약 500년 동안의 고통을 뚫고 오늘의 '행복한'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 잠을 자기 힘들어 펜을 들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왜곡되기 시작한 것은 특히 1987년과 1988년부터다. 그 책임의 대부분은 지식인에게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1960년대는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고 문화적으로 황금기였다. 그리고 투쟁의 시기였다. 극좌파의 게릴라 투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원주민들이 각성하고 뭉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1970년대 초부터는 원주민의 오랜 '노예'적 처지가 깨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시화와 함께 '대중문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춰 정확하게 지식인도 대응했다. 세계의 지배 그룹인 유럽인들과 비교하며 자신들 즉, 라틴아메리카 인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고통과 질곡과 집단적 기억과 유토피아를 아주 '깊이,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해방 신학과 종속 이론과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특히 마르케스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현대 소설은 68 혁명 이후 자신들의 갈 길을 두고 방황하고 있던 1970년대 유럽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을 매혹하기 시작했다. 즉, <백 년의 고독>을 필두로 한 '붐' 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두고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니 뭐니 하는 것은 부질없는 호명인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인들은 여기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 인이지만 오랫동안 멕시코에서 살았다. 그의 장례식에 콜롬비아 대통령이 조문을 하고 콜롬비아는 3일간 국상을 선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중은 마르케스를 콜롬비아 인이라기보다 라틴아메리카 인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우리처럼 한 나라의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를 앞세워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멕시코의 대중은 "가보(마르케스의 애칭) 만세!"를 외치면서 1분간 박수로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죽음이 슬픔만 가득한 단절이 아니라 '신화와 전설'의 방으로 옮겨간 것이고 이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대중은 입에서 입으로 세대를 거쳐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면서 껴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에르네스토 라클라우(1935~2014년). ⓒrs21.org.uk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와 예술을 이해하는 핵심어는 '구어 문화'이다. 구어 문화는 원주민 문화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 특징은 진정성이 있고, 기억을 통해 집단적 유대 또는 연대가 강하고, 삶의 고통 속에 행복이 숨어 있음을 알고,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유한한 것을 알고, 그러므로 더욱 여유 있고 즐길 줄 알고, 가난하더라도 작은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나아갈 줄 알고, 집단적으로 유토피아를 가질 줄 아는 것이다.

그리하여 1990년대부터 그리고 2001년의 세계사회포럼이 상징하듯이 그 유토피아를 가시화시키며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백 년의 고독'을 끝내고 있는 것이다. 마르케스 자신도 <백 년의 고독>의 우르술라가 115세에 잠자듯이 죽은 것처럼 병원에서 퇴원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족들에 둘러 싸여 평화롭게 세상을 하직하였다고 한다.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오늘날의 삶은 대중이나 엘리트나 유럽인의 삶의 궤적과 성과에 주눅(?) 들지 않고 세계 체제의 '폭력적 위계 서열'(근대성 자체와 자본주의)의 구조를 바꿀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스페인어의 '알다'라는 동사는 영어와 달리 두 개다. 하나는 '지식으로 알다'의 뜻을 가진 'Saber'이고 다른 하나는 '몸으로 체험하여 친숙하게 알다'라는 의미의 'Conocer'이다. 우리는 슬프게도 앞의 동사에만 머물면서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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