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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한국

[민교협의 정치시평]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병폐 극복을 위한 시도

오늘날 '민주주의' 하면 최상의 정치적 가치나 덕목, 또는 체제를 말한다. 이 합의가 하도 견고하다보니 '반민주'란 그 어떤 정치세력에게도 일종의 저주와도 같은 낙인이 된다. 하지만 막상 그 '민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돌아오는 답변은 그러한 합의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다양 다기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상호 모순적이다. 다수결의 원리가 민주주의의 준칙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소수자의 보호가 민주적인 정치문화의 금도(襟度)라고 맞받아친다. 자유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유일한 길이라고 눈을 부라리면, 소유권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날카롭게 항변한다. 우리나라에서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위해 1972년 10월에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기존의 헌정질서를 스스로 짓밟고 이를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10월 유신'이라고 명명한 바 있으며, 미국은 실제로는 자국의 국익 옹호임에도 여전히 인권과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침략과 개입을 호도한다. 

왜 이런 합의와 자기규정 사이에 메우기 어려운 괴리가 나타나는 것일까?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정치계급, 더 본질적으로 지배계급이 지닌 위선이요 표리부동이다. 흔히 민주주의의 '도래'가 유럽인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들이 근대세계를 빚으면서 고대 민주주의를 이에 걸맞게 변모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유럽에서조차 지배세력이 민주주의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은 19세기 말엽의 일이다. 이보다 한 세기 전에 구미세계는 일련의 혁명을 통해 부르주아지라는 새로운 사회세력이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지배층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봉건특권층 못지않게 민주주의를 싫어했지만, 새로운 권력의 정당화를 위하여 '인민'이나 '국민'을 들먹였으며, 이는 결국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격이었다. 인민(국민)주권의 구호는 참으로 민중(대중)의 정치무대에의 진입의 신호탄이었으니, 이는 이제 불가역적인 과정이 되었으며 유럽에 '인간해방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새로운 위광을 선사했다. 

하지만 당시에 유럽이 알았던 민주주의, 곧 '고대 민주주의'는 '못사는 다수의 계급지배'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보통선거권을 요구했고, 산업사회가 도래한 곳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정치계급과 참으로 치열한 충돌이 벌어졌다. 그 결과는 대중 민주주의의 등장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계급투쟁의 산물로서 위대한 성취지만, 유럽의 지배층은 이 민주주의를 길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나서야 참정권의 확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가 급변했다. 플라톤 이래로 민주주의는 불안정하고 내분을 부르는 중우(衆愚)정치에 불과하다는 전통적인 폄훼가 돌연 찬사로 바뀌었다. '인민의 자기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여전히 우리 모두를 사로잡고 있지만, 선거의회제에 접목된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인민의 권력'을 보증하기는커녕 근대세계의 새로운 주인들을 위한 호교론이 되었다. 그나마 제2차 대전 후에 서유럽은 나치즘의 처절한 경험과 대안사회에 대한 전망 속에서 사회복지국가라는 형태로 민주주의의 실체화를 일정 수준에서 받아들였지만, 기타 지역에서 그것은 온갖 종류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헤게모니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모두가 민주주의를 읊조리지만 그 '이상'은 허공 속으로 증발해버리고, '민주주의가 밥 먹어 주냐?'는 자조가 횡행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분명히 '밥'이며, 우리는 그것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지난 2세기의 짧은 시간대로부터 인류사 전체로 우리의 눈높이를 높여보면, 민주주의의 도래는 차라리 역사적 요청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실로 그것은 인류가 '자기운명의 주체'로서 걸어온 500만년에 걸치는 궤적의 총결산이다.

문명사의 차원에서 인류의 역사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인류의 탄생, 신석기혁명, 도시혁명, 산업혁명. 인류사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석기시대에 인류는 기껏 20명 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떠돌며 생활했고, 이 시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자기결정권의 주체였다. '무리 사회'에 지배-예속의 관계가 뿌리내릴 리 없었으니, 만약 그랬다면 인류는 결코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가 다른 포유류 동물들과는 달리 문명을 이룩하게 된 것은 줄잡아 수천 억 명에 달하는 우리 조상들이 협동을 통해 집단지성을 보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 1만여 년 전부터 인종에 관계없이 신·구대륙에서 적어도 아홉 곳에서 독자적으로 정착농업사회로의 이행이 나타났다. 신석기혁명은 당장에 인류의 생존조건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켰지만, 기후의 변화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잉여를 둘러싼 다툼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모두 굶어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굶어죽지 않는다'는 이전 시기의 가치관이 지속됐다. 씨족제라는 권위체제가 들어섰지만, 예속노동은 여전히 낯설었다. 촌락은 비록 연장자들에 국한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인류의 자기결정권의 거소(居所)였다.

드디어 인류는 약 5천여 년 전부터 역시 인종에 관계없이 여러 곳에서 '도시혁명'을 통해 '문명'을 이룩했다. 이제껏 우리의 경탄을 자아내는 온갖 거대한 건조물들은 모두 이 '위대한 농업문명'의 성취의 결과이다. 청동기, 쟁기, 성별 분업, 가부장제, 관개시설, 분업체계, 도시, 넓은 의미의 계급, 문자, 달력, 국가 등이 거의 동시에 생겨났다. 인류는 마침내 사회의 잉여를 흡수하고 그 재생산의 수단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었고, 창고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그러나 문명은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한 성취였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정(正)이 아니라 반(反)이었다. 문명을 이룩한 어느 곳에서나 극소수의 지배층과 절대다수의 피지배층이 나타났다. 어느 문명이나 농업생산력에 한계가 있었기에 지배층이 누릴 수 있는 잉여는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지배층은 어김없이 전 인구의 1%를 넘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도 농업생산의 절반을 가져갔다. 더욱이 지배층은 농업생산의 특성상 생산과정의 '외부'에 위치했고, 따라서 농업생산의 담당자들은 예외 없이 '경제외적 강제'의 대상, 곧 예속적 신분으로 떨어졌다. 극소수의 잉여는 절대다수의 종속과 수취에 입각했고, 어느 문명이나 잉여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의 유지 사이에서 평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에 직면했다. 초기문명은 대부분 이 평형점을 찾는데 실패했다. 일정한 시기가 지난 뒤 '암흑기'가 찾아왔다. 이는 지배자들에 의한 무자비한 착취의 결과이며, 지배층 내부의 충돌과 이들과 피지배층 사이의 계급투쟁 속에서 적대계급들의 공멸을 빚어냈다. 국가구조에 짓눌린 문명의 중심지가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인류는 철기문명의 단계에 돌입하면서 예속노동에 입각한 공존의 방법을 찾아냈다. 한 철학자가 '축(軸)의 시대'라고 부른 기원전 900-200년의 일이며, '위대한 고등종교'가 바로 평형점의 토대였다. 이제 고등종교는 모두에게 저승에서의 약속을 통해 이승에서의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전통국가가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구휼, 교육, 결혼 등의 사회적 재생산을 보듬었다. 아울러 지배자들은 '치자(治者)의 학(學)'을 통해 '위민(爲民)정치'를 내세웠다. 단순한 구호에 그치기 십상이었으나, 군주제가 전통시대에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았음은 그만큼 현실적인 근거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잊어서 안 될 것은 온갖 수준의 예속농민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생산자였음에도 위대한 농업문명의 주변부에는 언제나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잔존했었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미치지 않는 태백산맥 오지의 화전민이 그러했으며, 유럽에서는 알프스 산지나 저 아이슬란드의 주민들이 그러했다. 공통의 권력이 부재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원적 존재성을 언제나 그렇게 드러내게 마련이었다. 간접지배방식에 입각한 전통적인 '농업제국'의 변두리에서 '야만인들'은 온갖 차원의 자기결정권을 행사했을 것이지만, 문명 너머에서 섬광처럼 흔적 없이 명멸했다.  

그런데 이 보편적 예속의 어둠 속에서 예외적으로 민주주의의 족적을 역사에 기록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 그 가운데 특히 아테네인들이었다. 이들 역시 오리엔트 문명의 주변부에 위치했으며, 문명 중심인 페르시아의 침입을 물리치지 못했더라면 민주주의의 실험은 중단됐을 것이다. 

사실 역사학은 어떻게 하여 고대 그리스의 많은 폴리스에서 경제외적 강제로부터 해방된 자영농들로 이루어진 자유로운 시민단의 창출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해명하려고 하지만, 이런 존재가 문명의 주변부에서 꽤 강력한 생명력을 유지했음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런 주변부의 하나가 어떻게 하여 인류의 문명사의 한 중심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특히 고대 아테네는 사료가 남겨진 문명 최초의 민주주의 사회였다.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 그리스 세계의 지리적 분산, 페니키아로부터의 알파벳 도입, 귀족층의 분열, 강력한 농민 자가 무장의 전통, 자기결정권과 권력 분담의 문화, 번영의 원천인 노예노동에 입각한 은광, 시민단을 결속시킨 외세의 위협, 다른 폴리스들과의 문화교류를 통한 개방성, 그리고 물론 이집트를 비롯한 오리엔트 문명의 영향 등의 어찌 보면 우연적이랄 수 있는 마주침 속에서 참으로 예외적인 정치적 실험이 전개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기에 몇 가지 요점만 지적하자. 먼저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본보기로 제시했다. 비록 일급의 이론가 가운데 스피노자와 루소 이전에 어느 누구도 민주주의를 좋은 체제로 보지 않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록과 기억은 후대에 재 속 불씨처럼 살아남았다. 흔히 노예제가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라고 운위되지만, 노예들의 집단노동에 입각한 은광으로 인해 농민들이 아무런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맞지만 시민들이 노예들에게 모든 생산 활동을 맡겼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정치적 조치를 통해 '채무노예'를 복권시키고 대규모 노예농장이 부재했음은 경제적 양극화가 폴리스의 기반을 무너뜨린다고 여겼음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고대 민주주의와 오늘날의 민주주의와의 중요한 차이는 민주주의의 직접성 여부와 함께, 아니 그것보다도 정치적 결정을 통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완화 내지 해소, 곧 민주주의의 실체성에 있는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과정(전 6세기)에서나 그 이후(전 5-4세기)에 그렇게도 시끄럽고 왕성한 계급투쟁의 면모를 보였던 이유이다. 신분적 질서가 사실상 사라진 자유로운 시민단에서 계급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따라서 요즈음의 말로 정치, 국가, 민주주의는 모두 'politeia'로서 동의어였다. 폴리스 구성원 모두의 공통의 것, 이것이 바로 고대 민주주의 시대의 정치이자 국가였던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문명은 예속노동이 생산한 제한된 잉여로 고등종교가 고양시킨 인간의 자기정체성을 신성한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지만, 그 한계의 포락선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예컨대 상업이나 상인층을 권력의 일부로 끌어들인 중국의 송(宋)이나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는 그 포락선의 극한에 이르렀지만 결국 그것을 넘지 못했다. 경제적 잉여의 가장 큰 몫을 이루는 농업에서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 한계는 결코 돌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 초의 유럽이 이 한계를 돌파하여 '근대성'을 빚어내고 '근대세계'를 이룩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19세기 마지막 3분기에 지구적 차원에서 패권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미 1840년대에 영국이 자신보다 수십 배나 덩치가 큰 중국이라는 거인을, 그것도 상대방의 대문 앞에서 한 방에 날렸으니, 참으로 인류사의 대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유럽이 그 어떤 전통문명도 상상할 수 없는 높은 물질적 생산력을 이룩했던 결과인데, 무엇이 비결이었을까? 그 비결은 '자유로운 임금노동의 창출'이며, 이를 수반한 사회적 소유관계의 전환이었다. 이에 대한 여전히 가장 탁월한 설명방식은 마르크스가 <자본론> 제1권에서 논증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다. 16세기 영국(잉글랜드)의 농촌에서 지주층이 유럽 특유의 경제외적 장치인 봉건제로부터 특별한 실익을 끌어 낼 수 없었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창출이야말로 '서구의 대두'의 요체였다.

중요한 점은 유럽이 자본주의를 빚어냄과 함께, 고대 민주주의를 밑천 삼아 근대 민주주의를 새로운 문명의 의제로 제안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볼 때, 유럽은 지중해 문명의 막둥이이며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주변부였다. 14세기에까지도 이슬람 지식인들은 아예 야만인으로 취급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이들이 1750년경에 이르면 스스로 '문명'으로 자처하여 오스만 튀르크나 중국조차도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유럽은 '예속노동'을 해외로 수출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기독교 세계 안에서 '자유노동'을 보편화시켜 인간해방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문명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섰다. 물론 인류에게 약(藥)만 준 것은 아니었다. 토지소유관계의 전환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킴으로써 16세기에는 일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인신적으로 자유로운 농업노동자를, 결국 18세기 후반에는 노동력 밖에는 팔 것이 없는 자유로운 산업노동자들을 대거 창출해내는 병(病)도 주었던 것이다. '자기결정권을 회복한 노동'이야말로 높은 생산력의 요체였으며, 그러기에 당장에는 유럽 안에서 지배층이 스스로 농노해방에 나섰으며, 급기야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유럽 패권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흥미롭게도 영국이 사회경제적인 영역에서 이룩한 것을 프랑스는 혁명이라는 정치적인 과정을 통해 달성했다. 헤겔은 이미 1790년대 말에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동질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양국 공히 신분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만인이 자유롭고 법 앞에 평등한 근대 사회를 동시에 이룩했는데, 프랑스혁명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을 통하여 그 원리를 축성하였다. '권리선언'은 모두 4종(1789, 1793년의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선언, 1795년의 선언)이 있다. 그 가운데 1789년의 선언이 가장 유명하지만,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가 주권자로서 정치공동체의 일원이면서도 남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팔 수 밖에 없는 모순적, 역설적 존재라는 점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네 선언 가운데 가장 민주적이라고 평가받는 1793년의 산악파의 선언이다. 

선언의 제18조: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용역, 자신의 시간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팔 수 없고, 자기 자신이 팔릴 수도 없다. 그의 인신은 양도할 수 없는 소유물이 아니다. 법은 하인의 신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노동하는 사람과 그를 고용하는 사람 사이에는 배려와 감사의 계약만이 존재할 수 있다." 신분제의 폐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만, 참으로 묻건대 남에게 자신의 노동을 팔면서 그의 머슴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기에 선언은 "정부는 사람에게 그의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를 누릴 힘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된다"(제1조)고 천명하며, "이 같은 권리는 평등, 자유, 안전, 소유권이다"라고 못 박는다. 자유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확보하는 것, 바로 이것이 프랑스혁명이 여전히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이지만, 그렇다면 소유권은 여기에서 어떤 작용력을 갖는 것일까? 무산자에게 자유는 허구에 불과하며, 법적 평등에 그치는 평등이란 무슨 소용인가? 그런데 아무리 혁명의회의 선언이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문건인데, 제35조는 다음과 같이 주창한다. "정부가 인민의 권리를 침해할 때, 반란은 인민과 인민의 각 부분에게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가장 불가결한 의무이다." 

프랑스혁명의 '선언'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자유와 소유권을 통해 자본주의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평등과 안전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 축적의 동학(動學)이 야기할 불평등을 교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권은 인민에게 있기"(제25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서를 부르주아혁명의 모순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차라리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상보적 관계로 해석한다. 소유권의 유지라는 터전 위에서 자유의 내용을 채우고 평등의 외연을 설정하여 주권자 인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 이것을 근대의 정치에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안전은 사회가 그 구성원들 각각에게 그의 인신, 권리, 소유권의 보존을 위해 제공하는 보호 속에 있다."(제8조)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들을 정치공동체의 관점에서 극복하는 모든 시도, 바로 이것이 프랑스혁명이 제시하는 민주주의인 것이다. 

자, 이제 오늘의 현실로 돌아오자.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역사는 2세기를 겨우 넘기고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고작 1세기에 그친다면, 우리의 경우는 그보다도 훨씬 짧다. 그러나 문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이나 이제 첫 걸음마를 뗀 데 불과하다. 우리는 위대한 농업문명의 보편적인 종속노동과 고등종교의 관계 속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무수하게 많은 민주주의에 관한 정의(定義) 가운데 필자가 초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한 종류임이 자명하며,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도 명확하게 보인다. 자본 축적의 역학과 인민주권의 공리 사이에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평형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공동체의 몫이다.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 축적의 동학은 민주적인 통제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자칫 새로운 암흑기를 야기할 수도 있다. 1929년의 대공황은 단지 경제적 계기만을 갖는 것이 아니며, 막 탄생한 민주주의의 제도적 좌초 속에서 터져 나온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통해 그 '제도'를 점검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총자본(總資本)'의 이해관계에도 봉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상'을 '제도'로 이끄는 힘이 바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문명사는 인류가, 그것을 이루는 모든 사람이 자기결정권의 주체였음을, 그 오랜 진화과정의 현실태가 바로 민주주의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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