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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계, 사도마조히즘이야말로 '안전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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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계, 사도마조히즘이야말로 '안전한' 사랑?!

[취미는 독서] 열다섯 번째 날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올해 봄은 유달리 가혹하다. 꽃이 너무 일찍 피어오를 때부터 이상했고, 그 뒤를 덮는 짙은 미세먼지에 눈을 뜨기 어려웠는데, 기어이 끔찍한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이 세 가지 사건들 사이에서 인과관계는 고사하고 상관관계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올 봄은 잔인한 침묵으로 뒤덮여 있다.

▲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 펴냄). ⓒ에코리브르
미세먼지에 대해 대중적으로 설명하는 책은 우석훈의 <아픈 아이들의 세대>(뿌리와이파리 펴냄)가 지금까지 사실상 유일하며 그마저도 절판된 상황이기에, 나는 이 봄이 다 지나가기 전에 환경 이야기를 할 요량으로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 펴냄)을 급하게 주문했다. 하루 만에 보내준다던 인터넷 서점은 날을 넘겨 이틀째 저녁에서야 내 손에 책을 안겨주었다. 레이첼 카슨의 시적 문장들을 하나씩 다시 읽고, 내용을 정리하여 방송 원고를 만들고 잠들었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현재진행형의 재앙으로 인해, <침묵의 봄>을 대중들에게 다시 한 번 소개하는 일은 다음번의 언젠가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 책에는 우리가 아는 '생태주의'의 많은 요소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화학 합성물에 대한 (어쩌면 지나치다는 비판이 가능할) 공포, 지구를 생태계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 등은, 오늘날의 환경주의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은 읽어봐야 한다. 책 한 권을 써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 혹은 그러한 변화를 낳은 창발적 아웃사이더인 레이첼 카슨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문학에 조예가 깊은 여성 과학자였기에 과학계의 인사이더가 될 수 없었지만, 똑같은 이유로 인해 현대 환경 운동의 시조가 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이렇게 <침묵의 봄>을 읽었고, 이러쿵저러쿵 떠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를 압도해온 비극 앞에서, 당신과 나는 그저 옷깃을 여미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가 하나쯤은 나와 주기를 숨죽여 기도할 뿐이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수석합격자는 으레 물리학과에서 나왔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죄다 의대로만 쏠리는 요즘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실속만 놓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물리학보다 의학이나 공학이 낫다. 대체 그때는 물리학이 왜 그렇게 인기였을까.

이런저런 중요한 이유가 있을 텐데, 나는 사소한 이유 하나를 생각해봤다. ‘이름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게다. 물리학은 영어로 '피직스(Physics)'인데, 영어로 이야기하는 순간 고상한 느낌이 사라진다. ‘피지컬(Physial, 육체의)’ 등의 단어가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실제로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형이하학이 '피지컬 사이언스(Physical science)'다.

반면, ‘물리학’이라고 하면 물질의 이치를 탐구한다는 뜻이 돼서 느낌이 상당히 고급스럽다. 실제로 1980~90년대에는 현대물리학과 철학을 적당히 버무린, 일종의 유사과학 또는 유사철학 서적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물리학’이라는 번역어가 주는 느낌도 한몫했을 게다.

번역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지금도 한다. 최근 부는 인문학 열풍이 좀 생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스티브 잡스 덕분이란다. 그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게 계기라는 것.

더 이상했다. 스티브 잡스에 대해선 나도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언행에서 남다른 인문학 소양을 발견했던 기억은 없다. 대체 잡스와 인문학이 무슨 관계람. 검색을 해보니, 그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리버럴 아츠’는 한국에서 종종 인문학으로 번역된다. 사실, 잘못된 번역이다.

차라리 ‘교양’으로 옮기는 게 ‘리버럴 아츠’의 뜻에 그나마 가깝다. 여기엔 인문학뿐 아니라 자연과학, 예술 등이 두루 포함된다. 미국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 역시 인문학만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다. 잡스는 ‘리버럴 아츠’와 ‘기술’을 대비해서 이야기했다. ‘기술’은 제품 개발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다. ‘리버럴 아츠’는 당장은 별 쓸모가 없는 지식이다. 그럼, 이해가 된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게 잡스가 한 말이었다. “쓸모없어 보이는 인문학이 사실은 쓸모가 있다”라는 게 아니라 “쓸모없는 지식도 나름대로 중요하다”라는 게 그가 한 말의 요점이다. 한국에서 ‘리버럴 아츠’가 제대로 번역됐더라면, 최근 부는 인문학 열풍은 양상이 달랐으리라.

▲ <에네르기 팡>(박동곤 지음, 생각의힘 펴냄). ⓒ생각의힘
지금 절실한 건, 인문학만이 아니다. 교양이다. 당장은 쓸모가 없는 지식, 실속 없는 지식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필요하다. 마치 이론물리학처럼.

한국에선 교양이라는 말의 쓰임새가 영 이상하다. 어떤 때는 인문학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어떤 때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절을 가리키는 것 같다. 교양이라는 말이 자리를 못 잡으니, 교양이 쌓일 일도 없다. 이런 분위기에선 ‘자연과학 교양’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기가 참 민망해진다.

그래도 이런 글을 쓰는 건, 마침 좋은 책을 봤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아주 우연히 <에네르기 팡>(박동곤 지음, 생각의힘 펴냄)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박동곤 숙명여대 화학과 교수가 쓴 책인데, 한달음에 읽었다. 정말 쉽고 재미있다. “화학자의 눈으로 에너지 세상을 읽어낸다”라는 책의 취지가 잘 살아난다. 별 쓸모도 없는 교양을 우리가 굳이 익혀야 하는 이유가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자연과학 교양’ 서적으로 손색이 없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요 며칠 새 자주 울었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도 그렇고, 지금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비탄과 분노와 죽음의 공기 때문에도 그렇다. 나이 들수록 고통의 면역체계가 강건해지고, 어릴 때처럼 지나치게 격렬한 감정에 휩쓸려서 뒤도 안 돌아보고 무모한 짓거리를 벌였던 시절과는 이별할 수 있다고, 그것이 나이 들어가고 성숙해지는 것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의 정신 상태가 너무나 취약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 <보이는 어둠>(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거의 완독해가던 다른 책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출근하면서, 예전에 읽다가 중간에 덮었던 <보이는 어둠>(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임옥희 옮김, 문학동네 펴냄)을 다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이 책의 부제는 ‘우울증에 대한 회고’이다. 대표작 <소피의 선택>(한정아 옮김, 민음사 펴냄)으로 잘 알려진 스타이런은 60대 초반에 경험한 극심한 우울증에 대해 놀랄 만큼 솔직하고 냉정하게, <보이는 어둠>에서 기술했다.

“익숙한 고통이 시작되려는 고통의 문지방이 아니라 고통의 평형현상이다. 말하자면 정신이 예측 가능한 시간의 한계를 넘어, 고통을 흡수할 수도 없는 상태인 셈이다. 고통에는 사람들이 그걸 경험하면서도 경감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사람들은 날마다 다양한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비롭게도 그런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 그러나 우울증에는 이와 같은 구원에 대한 신념, 혹은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신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 이 절망감이 고통보다 더욱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킨다.”(74~75쪽)

“우울증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 우울증의 의미는 이 세계의 모든 악의 모사품처럼 느껴진다. 일상생활에서의 불협화음, 혼란, 불합리, 전쟁, 범죄, 고문, 폭력, 죽음을 지향하는 충동과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등 견딜 수 없는 역사의 모습과 닮아 있다.”(102쪽)

이 느닷없는 재난에 영문 모르고 희생된 분들 모두의 명복을 빈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 <경제의 책>(마커스 윅스·존 판던 외 지음, 이경희·권지은·이시은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 ⓒ지식갤러리
정승일(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 지난해 여름에 <정치의 책>(The Politics Book)(폴 켈리 지음, 박유진·이시은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을 후딱 독파한데 이어 이번에는 <경제의 책>(마커스 윅스·존 판던 외 지음, 이경희·권지은·이시은 옮김, 지식갤러리 펴냄)을 다 읽었다. 재미있어서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두 책은 한 역사적 인물에 관해서 핵심 키워드와 핵심 주장, 그리고 해당 인물과 사상의 역사적 맥락, 그 이전의 관련 역사와 그 이후의 관련 역사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기원전 3백년 경 아리스토텔레스를 찾아보면 그의 사상이 기원후 1700년이 지난 다음 14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고, 다시 17세기에는 토마스 홉스로, 그리고 19세기 정치 사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인다. 나름 서양과 동양의 정치경제 역사에서 등장한 주요 인물들의 면면과 사고, 그리고 그 역사적 흐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두 책을 보다 보니, 내 머리 속에 빈 뚫려 있는 빈 구멍들이 숭숭 보인다. 옆에 두고 늘 참고해야할 좋은 백과사전(Lexikon)으로 손색이 없다.

이명현(천문학자) :

사랑: [명사] 2014년 대한민국에서 기독교인들의 협박에 굴복하고 야합한 정신 나간 놈들에 의해서 국어사전에서 남자와 여자 간의 그 짓으로만 전락한, 박제가 되어버린 불쌍한 한국어 단어.

▲ <파란색은 따뜻하다>(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미메시스 펴냄). ⓒ미메시스
하지만 <파란색은 따뜻하다>(쥘리 마로 지음, 정혜용 옮김, 미메시스 펴냄)에서는 제대로 된 한국어 단어 '사랑'을 만날 수 있다.

"클럼, 끔찍한 건 말이야, 석유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인종청소를 해대는 거지, 어떤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끔찍한 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건 나쁜 일이라고 사람들이 네게 가르친다는 거지. 그녀가 너와 같은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오래전 죽어서 해체되어 지구 상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거나 어느 것의 일부가 되어 있던, 한 때는 예수님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원자들을 어렵게 다시 모아서 예수님을 잠깐 다시 만들어봤다. 그리고는 '사랑'에 대해서 물어봤다. <파란색은 따뜻하다> 95쪽의 두 여자의 섹스 장면도 보여줬다. 그는 그녀들의 정사 장면을 보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들의 아름다웠지만 안타까웠던 사랑에 감동한 것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도 써넣고 국어사전도 고치라고 말씀하셨다. 역시 사랑의 예수님이었다. 아멘. 오늘밤에는 이런 꿈을 꾸고 싶다.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들춰보았지만 끝까지는 못 읽은 수많은 책 중에 마미 포르노라 불리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E. L. 제임스 지음, 박은서 옮김, 시공사 펴냄)도 들어간다. 그런데 "너 그거 읽지 않았어?"라는 질문에 나도 모르게 궁서체로 "안 읽었는데요!"라고 답해 버렸다. 나의 이 반응은 뭘 의미할까. 지하철에서 하루키 책을 읽을 때 표지를 가리게 되는 습관과 비슷한 것 같다. '이걸 읽는 사람은 OOO' '이 베스트셀러 열풍엔 OOO한 심리' 같은 잡지 표제적 시선에 익숙한 탓인지 그 시선이 향하는 분석 대상에 들어간다고 생각되면 "나 그런 독자 아니야!"라며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참 머저리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이 '그레이 시리즈'의 이야기 구조와 그 현상을 획기적으로 분석한 에바 일루즈의 신작 <사랑은 왜 불안한가>(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를 읽으면서도 나는 지하철에서 몹시도 표지를 가려댔다. 사랑은 왜 불안한가, 묶인 남녀의 손이 그려진 표지, 분홍색과 야릇한 그림이 함께 하는 내지 등등, 연애 심리 상담서를 읽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까봐서! 난 이 고백이 정말 웃긴 걸 안다. 하지만 한 가지 순기능을 주장하자면, 연애 심리 상담서를 읽는 젊은 여성이 종종 어떤 비하의 시선에 놓이는지를 드러내준다고 하겠다.

▲ <사랑은 왜 불안한가>(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영어 제목은 "하드코어 로맨스 :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베스트셀러 그리고 사회"다. 독일어 원제는 "Die neue Liebesordung"라고 쓰여 있는데 구글 등을 뒤져본 결과 '사랑의 새로운 규범'쯤 되는 것 같다. 풀어놓고 보니 편집부(사장님?)의 선택도 이해가 된다. 저자의 전작 <사랑은 왜 아픈가>가 국내 독자들에게 반응도 꽤 얻었으니 연상되는 제목을 택한 듯하다. 그런데 안 팔릴 제목인 건 알지만 내 마음대로 달아보자면 "self-help-porno"쯤 되었을 것이다.

저자는 질서정연한 도덕적 우주가 와해된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불특정성이란 특성을 연애와 감정의 변화를 통해 추적해 왔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자율, 평등' 같은 개념을 영문 모르고 끌어안은 채 불안함을 키우는 우리 현대인들이 조금이나마 확실(이라는 착각)을 쥐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리물이 존재하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랑은 왜 불안한가>에서 주목한 것은 '그레이'의 골자인 BDSM(구속과 순종,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 관계다!

"'정상적 섹스관계'가 언제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얼룩지는 반면 BDSM은 고도로 형식화했으며, 그런 한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

"불확실한 것은 현대의 애정관계이며, 확실한 것은 사도마조히즘 섹스에서 파트너의 역할과 위상이다."

나아가 이 책은 '그레이' 읽기와 현대 주체성의 핵심인 자기계발의 원리 사이에 기가 막힌 접점과 동행 지점을 찾아낸다.

"현대의 도덕주체는 그 확실성을 스스로 빚어내야만 한다. (…) 역할과 아픔 그리고 아픔의 통제와 합의의 경계를 약속해주는 확실성이 사도마조히즘이다. 이것이 바로 왜 스스로 자신을 돕는 자구책인 자기계발이 개성을 가꿔가는 가장 중요한 문화양상으로 발전했는지 보여주는 근거다."

'그레이'가 자기계발서로 읽힌다는 분석을 읽던 이쯤에서, 내가 이 책이 모종의 자기계발서로 오인될까봐 전전긍긍했던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다 읽은 뒤 어떤 결단을 촉구하는 책이어야 베스트셀러가 된다는데, <사랑은 왜 불안한가>는 그런 현상들을 모조리 분석하면서 표지는 '결단을 촉구하는 책'처럼 보이기를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중의 효과를 노린 편집부(사장님?)의 전략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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