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역대 최강 '브레인'들, 처참히 실패하고 배우지도 못했다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역대 최강 '브레인'들, 처참히 실패하고 배우지도 못했다니

[프레시안 books]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최고의 인재들>

이 책의 탄생과 핼버스탬의 1인 저널리즘

1994년 미국 출장길에 <최고의 인재들>(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글항아리 펴냄)의 원서인 "The Best and the Brightest"을 구입하게 됐다. 출간 20주년 기념판이었다.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탬(1934~2007년)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미국의 베트남전쟁의 기원을 다룬 책으로 1972년 첫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최고의 인재들>(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송정은·황지현 옮김, 글항아리 펴냄). ⓒ글항아리
이번에 번역 출판된 <최고의 인재들>의 서문은 1992년 발간된 20주년 기념판의 서문이다. 영어 원문으로 14쪽에 이르는 서문만 읽어보고도 대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69년부터 2년 반 동안 500회의 인터뷰(보통 3,4시간에서 길게는 10시간에 이르는), 그리고 1년여의 집필(그러니까 3년 반에 걸친 작업) 끝에 1972년 출간된 이 책은 하드커버 18만부, 페이퍼백은 150만부가 팔렸다고 한다. 당초 핼버스탬과 출판사 측은 5만부 정도 팔리면 상당한 성공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엄청난 성공을 거둔 셈이다.

물론 상업적 성공보다 중요한 것은 언론으로서의 비평적 성공이다. 이 책은 케네디를 비롯해 당대 미국 최고의 인재들이 어찌하여 남북전쟁 이후 미국 최대의 비극인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져들게 됐는가를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치밀하고 깊이 있게 풀어내고 있다. 이른바 뉴저널리즘이다.

이 책의 집필 당시 이미 핼버스탬은 미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 1962~63년 <뉴욕타임스> 사이공(현 호치민) 특파원으로서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보도한 공로로 196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핼버스탬은 1965년 초 특파원 당시의 보도들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의 실패를 예견한 <수렁 속으로(The Making of Quagmire)>를 펴냈다. 그의 첫 책이다. 당시 영국의 저명한 추리소설 작가인 그레이엄 그린은 이 책에 대해 "대단한 흥미와 존경심을 갖고 읽었다. 매우 중요한 책이다"라고 극찬했다.

하버드대학교 출신의 핼버스탬은 대학교 교지 <크림슨(Crimson)> 편집장으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대학 졸업 후 미시시피 주의 작은 신문 <데일리 타임스 리더>에서 1년, 테네시 주 내슈빌의 <테네시안>에서 4년간 기자로 활동하면서 주로 민권 운동에 관해 기사를 썼다. 당시 그의 기사를 눈여겨봤던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에게 발탁돼 <뉴욕타임스>에서 레오폴드빌(콩고), 사이공(베트남), 바르샤바(폴란드) 등에서 특파원으로 활약했다.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베트남의 실상을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었던 핼버스탬이 사이공을 떠나게 된 것은 그의 비판적 보도에 대한 케네디 행정부의 압력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핼버스탬은 1967년 <뉴욕타임스>에서 잡지 <하퍼스>로 옮겼다(<하퍼스>는 <어틀랜틱 먼슬리>, <뉴요커> 등과 함께 미국의 3대 잡지로 꼽히는 고급 매체로, 미국 잡지의 위상은 한국과는 다르다). 마틴 루서 킹 목사와 로버트 케네디가 잇따라 암살되는 등 격동의 해였던 1968년에는 민주당 대선과정을 취재했다.

1969년 봄 그는 3개월의 취재 끝에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맥조지 번디에 관한 평전(<맥조지 번디의 값비싼 교육>)을 <하퍼스>에 발표했다. 번디는 보스턴의 명문가 출신으로 서른셋의 나이에 박사 학위도 없이 하버드대 문리대 학장에 오른 전설적 인물이다(그가 백악관으로 간 뒤 그의 국제정치학 강좌를 물려받은 이가 헨리 키신저이다). 미국 최고의 인재들만 모였다는 케네디 행정부 내에서도 가장 출중한 인재였다. 또한 그의 형 윌리엄 번디 역시 국무부 고위관리이자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냉전정책을 설계한 딘 애치슨 전 국무장관의 사위로 막강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핼버스탬이 맥조지 번디에 주목한 이유는 케네디를 비롯해 번디, 로버트 맥나마라, 월트 로스토우, 맥스웰 테일러 등 미국 최고의 인재들로 구성된 케네디 행정부가 왜 베트남에 대한 군사 개입이라는, 실패가 뻔한 모험을 감행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핼버스탬 자신은 사이공 특파원 시절인 1963년 가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이 실패할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그 해 11월 2일 미국이 내세운 베트남 지도자 응오 딘 지엠이 미국의 사주에 의한 베트남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살해됐으며, 이후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가속화된다. 케네디 대통령은 3주일 후인 11월 22일 암살된다).

▲ 백악관 안보보좌관 맥조지 번디, 1967년 경. ⓒWikimedia Commons

그런데 1969년 당시는 케네디 행정부에 대한 신화가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다. 케네디가 실수를 했을 리가 없다는 태도였다. 케네디의 비극적 암살이라는 영향도 있었지만 언론을 비롯한 미국의 주류 사회(Establishment)는 케네디 행정부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삼가고 있었다. 핼버스탬의 번디에 관한 <하퍼스> 기사는 케네디 행정부에 대한 최초의 비판적 보도였던 셈이다. 이 때문에 당시 주류 사회는 핼버스탬의 기사에 관해 불만을 쏟아냈고, 핼버스탬은 <하퍼스> 잡지의 사주와 열띤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 결과 핼버스탬은 케네디 행정부가 베트남전쟁을 확대하게 된 전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맥조지 번디, 로버트 맥나마라, 월트 로스토우, 맥스웰 테일러, 딘 러스크, 그리고 린든 B. 존슨 등 베트남 확전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의 전기와 워싱턴에서의 정책 결정 과정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베트남전쟁의 전개과정을 치밀하게 재현한 것이 바로 이 책 <최고의 인재들>이다. 1962~63년 사이공 특파원 시절의 보도가 베트남 현지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의 실상이었다면, 이 책은 워싱턴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의 실상인 셈이다. 그래서 핼버스탬은 이 책을 일컬어 베트남에 관한 책이 아니라 미국에 관한 책이라고 말한다.

핼버스탬이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 관한 미 국방부의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가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1971년 6월 직후였다. 그런데 핼버스탬은 펜타곤 페이퍼 폭로의 주인공인 다니엘 엘스버그와 이미 오랜 인터뷰를 한 터였다(엘스버그는 핼버스탬과 대학 동창이다). 엘스버그는 미 군사전략의 싱크탱크인 랜드(RAND)연구소의 연구원으로 펜타곤 페이퍼에 수록된 베트남전쟁의 실상과 미국의 지도자들이 국민들에게 설명한 내용이 너무도 다르다는, 베트남전쟁은 부도덕한 전쟁이라는 확신을 품고 이 문서를 <뉴욕타임스>에 전달한 것이다.

펜타곤 페이퍼 폭로는 핼버스탬에게 이중의 행운이었다. 우선 펜타곤 페이퍼의 핵심 내용을 누구보다도 먼저 꿰뚫게 됐고, 펜타곤 페이퍼 폭로로 미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들끓던 시점에 이 책이 출판됨으로써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됐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먼저 베트남전쟁의 기원에 주목하고 장기간의 취재를 한 끝에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됐을 당시의 <뉴욕 타임즈>. ⓒwww.nytimes.com

<최고의 인재들> 서문에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핼버스탬의 고백이다.

"기자란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는 일의 반영이다. 즉 당신이 일간지 기자로 800단어짜리 기사를 써야 한다면 딱 그만큼의 취재와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텔레비전 방송기자라면 1분 15초짜리 기사를 위한 취재와 고민을 하면 끝이다. 그러나 만일 책을 써야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취재와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2년 반 동안 진행했던 인터뷰 작업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다음 날 인터뷰를 빨리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했고, 매번의 인터뷰가 엄청난 교육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당 기간의 언론 보도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정부 관계자의 말을 받아 적기에 얼마나 바빴던가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언론인인 그는 3년 반의 취재와 집필 끝에 깊이 있는 역사서를 펴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언론(Journalism)이라고 하면 그 날 그 날의 사건을 보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핼버스탬의 이 책은 오랜 시간의 취재 끝에 일간 신문의 보도로는 캐낼 수 없는 심층의 진실을 파헤쳐냈다. 과연 우리 언론은 이런 책을 써낼 수 있을까.

그의 언론활동은 1인에 의한 심층 저널리즘이라 할 수 있다. 이 책 이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전향한 그는 대략 4~6년의 작업 끝에 문제작들을 연달아 펴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류 언론의 내막을 파헤친 <파워즈 댓 비(The Powers That Be)>, 일본 경제 기적의 실상을 추적한 <청산(The Reckoning)>, 195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50년대(The Fifties)> 등이 그것이다. 그는 2007년 봄 6.25전쟁의 전개과정을 그린 <콜디스트 윈터>(정윤미 옮김, 살림 펴냄)을 탈고한 뒤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케네디 행정부와 베트남전쟁:
미국의 힘에 대한 과신과 상대에 대한 무지, 그리고 매카시즘

역대 최고의 정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던 케네디 행정부는 어쩌다가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을 만들어냈을까? <최고의 인재들>은 1961년 초 케네디 대통령 취임부터 1968년 테트(구정 대공세)의 여파로 존슨 대통령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1968년까지 미 행정부의 베트남 관련 정책 결정 과정을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구체적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적해야 할 것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케네디 때가 아니라 이미 트루먼 행정부 때 시작됐다는 점이다. 미국은 1950년 봄부터 프랑스에 탱크, 수송기 등 전쟁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공산화된(1949년 10월) 직후였다. 당초 미국은 1946년 프랑스와 베트민(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선) 간의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보았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 한국이 일본에서 해방됐듯이 베트남 역시 식민종주국 프랑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승전국의 일원이었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화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쟁을 민족해방투쟁이 아닌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로 파악했다. 즉 북베트남의 승리는 곧 중국 세력의 팽창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의 대 베트남전쟁을 도운 것이다.

1950년 봄부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해 베트남에서 물러날 때까지 미국은 프랑스 전쟁 비용의 78%인 14억 달러를 부담했다. 1950년 4월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은 프랑스와 베트민(북베트남)과의 협상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으며 1952년 양측이 협상에 의한 해결을 모색하자 이를 좌절시켰다. 또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북베트남군에 대한 핵공격을 제안했으나 프랑스의 거부로 무산됐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지상군 파병을 고려했으나 영국 등 우방국들의 동조가 없어 포기했다.

미국은 1954년 7월에 열린 제네바 국제협상에서 유일하게 협상에 의한 해결에 반대했으며, 협상이 끝난 직후인 1954년 8월부터 (필리핀의 민족해방투쟁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랜스데일이 이끄는 중앙정보국(CIA)이 북베트남에 대해 비밀군사작전을 수행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추악한 미국인>과 <조용한 미국인>은 바로 이 비밀작전을 소재로 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고문관 파견과 경제군사 원조 등을 지속했을 뿐, 지상군 파견 등 보다 적극적인 군사행동은 자제했다.

▲ 1961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부통령. ⓒWikimedia Commons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선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리고 케네디 행정부는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점차 확대했으며, 존슨 행정부에서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에(1965년 1월) 이어 미 지상군 파병으로 직접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전임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군사전략은 전면적인 핵전쟁 아니면 CIA에 의한 비밀 군사작전, 둘 중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 케네디 행정부는 제3세계로 번져가는 공산혁명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위의 양 극단이 아닌 재래식 전력에 의한 반란진압작전(counter-insurgency)이 필요하다며 보다 공세적인 대외전략을 주창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 주창한 유연대응(Flexible Response) 전략이 그것이다.

새로운 행동주의를 내세운 케네디 행정부의 젊은 지도자들은(이들은 미국 지도자들 중 최초로 20세기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그 시험무대로 베트남을 택했다. 아마도 이들은 6․25전쟁을 통해 남한을 반공의 보루로 지켜낸 것, 그리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무력행사 위협과 협상을 통해 소련을 굴복시킨 경험에서 베트남에서의 성공을 확신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핼버스탬은 유럽에서의 냉전논리를 아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반식민주의라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유럽의 냉전은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의 논리로 읽어낼 수 있는 반면, 아시아에서 중국의 공산혁명과 베트남의 민족해방투쟁 등은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민족주의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중국 혁명과 베트남전쟁 등을 싸잡아 소련을 수괴로 하는 국제공산주의의 음모로 파악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실제로 1960년대 중반 이후 중국과 소련의 이념 및 영토분쟁, 1970년대 말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은 국제공산주의라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냈다.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해 남베트남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미국적 가치와 이상에 맞는 나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역사는 미국의 편이 아니었다'고 핼버스탬은 지적한다. 호치민을 필두로 한 베트민(공산주의 독립운동단체)이 자주 국가를 열망하는 베트남 국민의 열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북베트남과의 어떤 전투에서든 승리할 수 있었지만, 베트남 국민의 마음을 갖기 위한 정치적 경쟁에서는 미국이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즉 기본적으로 정치적 싸움이었던 베트남전쟁을 군사력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 케네디 행정부의 오판이라는 것이다. 케네디 행정부는 질 수밖에 없는 전쟁을 시작한 셈이다.

한 마디로 미국의 힘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과 상대방에 대한 무지가 베트남전쟁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는 게 핼버스탬의 진단이다. 특히 케네디 행정부에는 베트남을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케네디 행정부 당시 부통령이었던 존슨의 표현을 빌면 4류 국가에 불과한 베트남에 대해서는 연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트루먼 행정부가 소련에 대해 봉쇄정책을 세울 때는 오랫동안 러시아를 연구해온 조지 캐넌이나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애버럴 해리만 등이 있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케네디 행정부 초기 존슨 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멘토인 샘 레이번 상원의원에게 이들의 대단한 학력과 지식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자, 레이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보안관 경험이라도 있었으면…." 케네디 행정부 인사들이 대단한 학력과 뛰어난 지성을 가졌을지는 모르나 실제 세상 경험은 부족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의 힘에 대한 과신과 상대에 대한 무지 이외에 케네디 행정부를 전쟁 확대로 몰아간 현실정치적 요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매카시즘(반공주의)이다.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인 1950년 2월 시작된 매카시즘은 공식적으로는 1954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의회 제재를 받으면서 끝이 났다. 그러나 공화당이 제기한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논쟁이 힘을 얻으면서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공산주의에 유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민주당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딘 애치슨마저 매카시의 비판을 받았을 정도였다.

중국 국민당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에도(지상군 투입을 제외한 막대한 경제 군사 원조) 불구하고 공산당에 패했다. 중국이 공산화된 것은 국제공산주의의 음모가 아니라 중국 국민들이 선택한 혁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화당은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주당이 '중국을 잃었다'고 몰아붙였다. 핼버스탬은 중국 혁명 당시 공화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하더라도 공산화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이 중국을 잃었다'는 공화당의 비판은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최상의 무기였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에 조금이라도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곧 정치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케네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 혁명의 실상과 추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예견했던 국무부의 유능한 외교관들이 매카시즘의 여파로 빨갱이로 몰려 거의 모두 공직에서 추방됐다. 존 페이톤 데이비스를 비롯한 이들 외교관들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조지 캐넌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모두 공직에서 추방되면서 미국의 대 중국, 대 베트남 정책은 맹목적인 반공주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핼버스탬은 1992년판 서문에서 1950년대에 끝난 줄 알았던 매카시즘의 영향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고 회고하면서 존 페이톤 데이비스 등 미국의 중국통 외교관들이 매카시즘으로 겪은 고통에 관해 한 개 장을 추가했다고 밝혔다.

▲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모습. ⓒWikimedia Commons

핼버스탬은 만일 케네디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1964년 재선 이후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수순을 밟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드러나듯 호전적 군부를 믿지 않았던 케네디는 남베트남이라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를 위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정치적 이상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1960년 대선에서 닉슨에게 겨우 10만 표 차이로 이겼다는 점, 앞에 말한 매카시즘의 망령에 의한 국내정치적 제약 때문에 적어도 첫 임기에는 이를 실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핼버스탬은 케네디의 정치적 지향으로 보아 베트남 확전을 원치 않았겠지만, 적어도 그의 공식적인 수사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공세적 언사를 멈추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결국 존슨이 대통령직을 물려받으면서 미국은 전쟁 확대의 길로 나아간다. 맥조지 번디와 로버트 맥나마라, 맥스웰 테일러 등 케네디 행정부의 주요 보좌관들을 모두 승계한 존슨 대통령은 이들 보좌관들에게 등 떠밀려, 1965년 1월 북폭 개시, 1965년 4월 미 지상군 파병 등의 운명적 결정을 하게 된다.

(*케네디의 절친한 친구이자 인도 대사를 역임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아들 제임스 K. 갤브레이스 텍사스대 교수는 2003년 9월 <보스턴 리뷰>라는 웹진(10/11월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케네디가 1963년 10월 11일 베트남 주둔 미 군사고문단의 1965년 내 전원 철수를 명령한 국가안보실행문서(NSAM) 263 문서에 서명했으나, 암살 나흘 후인 11월 26일에는 그 반대 취지의 문서(NSAM 273)가 존슨 대통령에 의해 승인됐다고 지적한다.

한편 케네디 암살 이틀 전인 11월 20일 미 군부 고위 지도자들은 하와이 미 태평양사령부에 모여 북베트남으로의 확전을 위한 작전계획(OPLAN 34A)을 작성했으며 이 작전계획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초래한 원인이 된다. 케네디는 이 작전계획을 보고받지 못했다.

미 군부에 의한 케네디 암살 개입 가능성을 제기한 것으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JFK』에도 이를 시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노엄 촘스키는 갤브레이스의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는 기고문을 2003년 12월 <보스턴 리뷰>에 기고했다.)

▲ 올리버 스톤 감독의 1991년작 『JFK』. ⓒWarner Bros.

존슨 역시 베트남 확전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을 잃은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또한 자신의 최대 과제인 '위대한 사회' 건설을 위해 공화당의 협조를 받으려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야금야금 확전의 길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트남전쟁의 실상을 국민 앞에 소상하게 밝히고 공개적인 토론을 하기보다는 밀실에서의 은밀한 결정이라는 부정직한 방식으로 전쟁의 규모를 키워갔다. 약간의 공습으로 북베트남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다는 헛된 희망으로 북폭을 시작했다가 미 지상군 50만 명을 파병하는 선으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킨 것이다.

핼버스탬은 케네디 행정부 인사들이 베트남 개입을 논의하면서 선택지(option)가 대단히 많다는 듯이 행동했지만, 실제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일단 군사행동을 시작하면 그 후에는 발을 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에게 선택의 폭이 가장 넓었을 때는 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발발한 1946년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이 프랑스의 전쟁을 지원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며, 나아가 북폭에 나설 즈음에는 이미 외통수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인 베트남이 제 갈 길을 간다고 해서 미국에게 과연 어떤 해악을 끼칠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했어야 한다고 개탄한다.

베트남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1969년 대통령에 취임한 닉슨은 무려 4년이 지난 후에야 베트남에서 발을 뺀다. 1973년 1월 북베트남과의 평화협상을 체결한 것이다. 이른바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이다. 이제 베트남인들이 알아서 전쟁을 하라는 것이다. 그 4년 동안 닉슨은 '명예로운 철수'를 하겠다며 북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에 대해서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습을 감행한다. 지상군 개입을 줄이는 대신 미국의 특기인 공습에 의존한 것이다. 그리고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패망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은 30년에 걸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편 닉슨 행정부는 1970년대 이후 베트남전쟁의 패배에 따른 국제적 위상의 타격을 막기 위해 소련과의 데탕트, 중국과의 화해 등에 나선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교훈을 얻었는가?

무려 700쪽 가까운(한글 번역판으로는 1000쪽이 넘는) 핼버스탬의 이 책은 베트남전쟁의 기원에 대한 치밀한 탐구이다. 동시에 미국이 어찌하여 명분 없고 소모적인 전쟁에 빠져들게 됐는가에 대한 진지한 자기성찰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교훈을 얻었을까? 그 교훈이란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 하더라도 민족 해방이라는 역사의 대세에 맞서 자신의 가치의 체제를 타국에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일 터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이후에도 자신의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타국에 개입하는 미국의 군사주의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70년대 미소 데탕트와 미중 화해 등 일시적인 유화기를 거쳐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 이후 군사주의가 부활한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1970년대까지 미국의 군사주의가 아시아에 집중된 반면(공산 중국의 팽창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1979년 이후에는 중동지역으로 미 군사행동의 초점이 옮겨갔다는 정도다. 1979년 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잇따라 발생하자 미국은 1980년 1월 카터 독트린(군사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미국의 핵심 국익이 걸린 중동지역에 대한 외부 개입을 차단하겠다는)을 선언하면서 중동지역에 대한 군사 개입을 대폭 증강한다.

▲ 1990~1991년까지의 걸프전. ⓒWikimedia Commons

카터의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자랑스럽게 '소련의 베트남전쟁'이라고 명명한 아프가니스탄전쟁(1979~1992년)에서는 전 세계의 무슬림 전사들을 아프간으로 불러 모아 스팅어 미사일 등 첨단무기로 무장시켜 대리전쟁을 시키는가 하면, 이란 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이라크를 부추겨 이란-이라크전쟁(1980~1988년)을 유발시켰고(미국은 양측 모두에 무기와 군사정보 등을 흘려주면서 전쟁의 장기화를 유도했다. 중동지역에 지도적 패권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990년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로 1차 걸프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걸프전 이후 이교도인 미군 병사의 사우디아라비아 주둔이 오사마 빈 라덴 등 이슬람 과격파의(이들은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역량을 익혔다) 9·11 테러를 불러왔고, 이것이 부시 정부의 아프간(2001년) 및 이라크(2003년) 침공으로 이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시 행정부의 전쟁 정책을 밀어붙였던 체니, 럼스펠드 등 네오콘은 이라크전쟁이 수렁에 빠지면서 2006년 물러났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 들어 미군은 2011년 이라크에서 철수했고, 아프간에서는 올해 말 철수할 예정이다.

▲ 2001년 9·11 테러. ⓒWikimedia Commons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75년까지 아시아에서 30년 전쟁을 치렀고, 1979년 이후 지금까지 중동지역에서 30년 이상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1980년대 아프간에서 군사 역량을 익힌 수많은 무슬림 전사들이 파키스탄, 소말리아, 예멘 등으로 퍼져 무장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리비아 지도자 가다피를 살해한 무장 세력이나 현재 시리아에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는 무장 세력의 대부분이 바로 미국이 주도한 대리전쟁을 통해 형성된 집단이다. 현재 리비아에는 1700개, 시리아에는 1000개에 이르는 무장단체가 있다고 한다.

미 국무부의 외교관으로 일하다 베트남전쟁의 실상에 분노한 나머지 1967년 국무부를 뛰쳐나와 수도 워싱턴 최초의 대안 언론 <워싱턴 프리 프레스>(☞바로 가기)를 창립해 미 대외정책의 실상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윌리엄 블럼이란 인물이 있다. 그의 집계에 따르면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50개국 이상의 외국 정부에 대해 전복 활동을 벌였고, 최소한 30개 국가에서 선거 과정에 불법 개입했으며, 쿠바 카스트로와 리비아 가다피 등 50개 이상의 국가 지도자에 대해 암살 시도를 했다. 또한 30개 이상의 나라에 대해 공습을 가했으며 20개 국가의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려 했다. 모두 71개 국가에 대해 직접적 군사개입 또는 CIA에 의한 비밀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핼버스탬은 <최고의 인재들> 후기에서 1962년 9월 사이공 특파원으로 부임한 직후 "미국의 시스템이 보다 우월하며, 약간의 운과 함께 능력을 발휘한다면 미국적 가치를 베트남에 수출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한다. 적어도 미국의 의도는 자유와 민주, 시장경제라는 미국적 가치와 체제를 남베트남에 이식하겠다는 선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세계를 '자유세계'라고 부르며 자유와 민주, 인권을 위해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다고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냉전이 끝난 이후 세계는 미국이 주장해 왔던 대로 자유와 민주가 넘쳐나는 좋은 세상이 됐을까? 그렇지 않다면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는 군사 개입의 실제 목적은 무엇인지, 이제는 철저히 따져 물을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