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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노인과 30대 여성의 사랑, 이 남자의 손끝을 거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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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노인과 30대 여성의 사랑, 이 남자의 손끝을 거치면

[종이 위의 풍경을 사색하다] 서동욱-다니구치 지로 서면 대화

친구가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아는 사람들과 '독서 토론 모임'을 한다며 부탁을 해 왔다. 다음 책을 자기가 정하기로 했는데 만화책을 고르기로 했고, 이야기할 만한 만화로서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여러 의미로 반가웠다. 나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최근 나온 <선생님의 가방>(전 2권, 다니구치 지로 지음,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을 권했다.

▲ <선생님의 가방 2>(다니구치 지로 지음,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읽고 나서 그냥 덮어버리면 그만인 만화도 나름의 미덕을 지킨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음의 필터를 거친 여운과 입에 맴도는 말들이 남는 만화만의 미덕도 있다. <선생님의 가방>이 그랬고, 다니구치 지로의 많은 만화들이 그랬다. 이 작가는 1947년 돗토리 현 돗토리 시에서 태어나 1969년 상경해 만화가 이시카와 규타의 어시스턴트로 만화 경력을 시작했다. <목쉰 방(嗄れた部屋)>(1971)으로 데뷔했고, 이후 40여 년간 끈기 있게 작품 활동을 해 온 가운데 대표작 다수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신들의 봉우리>, <고독한 미식가>, <열네 살>, <개를 기르다>, <아버지>, <도련님의 시대>… 60세를 훌쩍 넘긴 지금도 배경 및 인물 묘사의 치밀함, 문학에서 받은 영감을 옮기는 명민한 감각이 바래지 않은 '현역 거장'이다.

그런 다니구치의 만화의 성실한 감상자였던 서동욱(시인·문학평론가, 서강대학교 교수)이 감상과 질문을 담아 긴 편지글을 썼고, 다니구치의 답변이 돌아왔다. 철학하는 사람과 만화를 그리는 사람, 한국어와 일본어, 감상자와 창작자 사이에 오간 대화를 옮겨 싣는다. 질문이 길고 입체적인 반면, 답변은 짧고 담백하다. 그 불균형함을 그대로 드러내기로 했다. 그것이 곧 질문자 서동욱, 답변자 다니구치 지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사의 말미엔 <선생님의 가방>, <겨울 동물원>(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등 최근 한국에 번역된 신작과 관련해 <프레시안>과 주고받은 9문 9답을 실었다. 두 작품과 짤막한 인터뷰가, 아직 '다니구치 월드'에 입문하지 않은 독자들에게 쓸모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 <선생님의 가방> 주인공 '선생님'. ⓒ Jiro Taniguchi, Hiromi Kawakami / Futabasha Publishers Ltd.


걸으면서 보는 사람, 보면서 그리는 사람

사람들은 만화를 읽는다. 밤새우고도 읽고 시험이 코앞인데도 읽는다. 만홧가게에 앉아 페이지들을 찢어간 녀석들을 욕하며 읽기도 하고, KTX 특등 칸에 앉아 태블릿 피시 위를 멋지게 슬라이딩하는 검지의 쾌적함을 즐기며 읽기도 한다. 이 읽기엔 즐거움만 있지 괴로움은 없다.

만화는 독서인데, 나는 만화를 보면서 '독서에 따라붙기 마련인 노동'을 힘들게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결코 해 본적이 없다. 만화에는 쾌락과 읽기가 완벽하게 화해하는 놀라운 축복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만화의 이 축복을 불경스럽게 배신하여 그것을 만화의 가벼움으로 왜곡하는 일은 문화의 재앙과도 같다. 만홧가게에 앉아 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나타나는 엄마나 선생님을 망연자실 올려다 본 적이 있는 자는, 이 재앙을 개인사 속에서 미리 체험해본 자이고 그 재앙이 문화 전체에 도래하는 양상을 스스로의 희생을 통해 고지(告知)하는 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즐거운 것이 저급한 것은 아니다. 만화는 다른 여타의 독서물이 읽기의 괴로움이라는 힘겨운 장치를 통과하고 나서야 건네주는 내용물을 즐거움 속에서 건네주는 놀라운 예술이다.

사실 인간의 지성은 고대부터 만화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었던 듯하다. 플라톤은 시간의 흐름을 "영원한 것의 움직이는 모상(模像)"이라 일컬었다. 만화의 한 컷 한 컷 같은 고정된 영원한 것들이 있으며, 만화책의 책장을 넘기 듯이 고정된 것들을 바라볼 때 비로소 시간이 움직이고 이야기가 엮인다. 즉 그림은 고정되어 있고 영원하지만, 그것의 움직이는 모상이 우리 마음에 비추인다. 플라톤은 세상을 한 권의 만화책처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다면, 만화책이 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을 담아내는 만화책의 저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가에 속하는 다니구치 지로의 <선생님의 가방>과 <겨울 동물원>이 최근 출간되었다. 평소 몇 가지 만화에 대해 그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풀어놓을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아무런 서사가 없는 이야기'라는 좀 모순된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는 이 표현에 걸맞은 <고독한 미식가>(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박정임 옮김, 이숲 펴냄)와 <우연한 산보>(구스미 마사유키 원작, 미우 펴냄)의 작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이차대전 직후와 1960년대를 회상하는 한 인생이 관건이라면, 그는 <겨울 동물원>과 <아버지>(신준용 옮김, 애니북스 펴냄)와 <머나먼 고향>(한국어 번역본 <열네 살>(전 2권, 샘터사 펴냄))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도련님'의 시대>(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의 작가이다. <도련님>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위해 그린 이 작품은 소세키라는 한 인물을 만화 속에서 되살리고, 그 인물 안에 일본의 근대 풍경과 룸펜 지식인과 그의 유명한 고양이, 협객친구들, 우울한 정치, 이시카와 다쿠보쿠 같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인, 그 밖에 자질구레한 근대적 삶, 이 모든 것을 불어넣었다.

벌써 너무 많이 나 혼자 이야기한 듯하다. 그 보다 다니구치 지로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질문1) 당신의 만화에는 세 가지 중요한 축이 있는 것 같다. 두 가지는 만화라는 형식 자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두 가지 보다는 당신 자신의 작가적 입장에 보다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그 세 가지란, 공간, 시간, 그리고 작품(예술 작품 또는 여타의 인공물)이다.

먼저 공간과 관련하여 묻고 싶다. 만화는 서사물(즉 시간적인 것)이지만, 사실 현실화되어 있는 것, 또는 실존하는 것이라고는 그려진 공간 밖에 없다. 시간은 앞서 이야기했던 플라톤의 영원한 것(공간적 정체성을 갖는 그림)의 움직이는 모사물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효과로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만큼 만화에서 공간은 실질적 지위를 차지하는 듯하며,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공간의 공간성 그 자체가 만화가에게 도전해볼만한 화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한 산보>는 그야말로 공간 자체에 대한 만화가의 연구의 기록인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줄거리를 위해 공간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산책로, 분실한 자전거 보관소, 오래된 상점 거리 등등 공간 자체를 부각시키는 수단으로써 줄거리는 조역을 떠맡고 있다. 공간 자체가 가진 분위기나 질감을 드러내는 것이 이 작품에서 관건이 되고 있다.

이런 공간의 질감을 가장 놀랍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첫 장면이다. 이 첫 장면은 작품 전체의 뿌리가 되고 있는데 말미에서 다시 반복된다.(즉 반복이라는 음악적 형식이 이 작품에 견고한 구조를 제공하고 있다.) 아이가 놀고 있는 이발소 마룻바닥에 그림자를 그리며 햇살이 떨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햇살의 온기, 마룻바닥의 반사광, 공기 중의 먼지 등등 공간의 모든 질감을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이번에 나온 <선생님의 가방>은 두 남녀의 예외적인 사랑이야기인데, 순전히 공간만으로 여자의 심리, 두 남녀의 거리 등등을 표현하는 장면이 있어 인상적이었다(8장 '꽃놀이'). 인물 없이 공간(여기선 꽃놀이를 하는 강둑)이 사랑하고, 공간이 여자의 서운함을 전한다. 요컨대 공간이 질감과 사연을 가진다.

이런 예들을 볼 때 공간은 당신에게 사건이 진행되기 위한 무대 장치 또는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가 특별한 예술적 도전의 대상인 것 같다. 공간의 질감을 드러내는 일이 당신의 만화에선 어떤 일이며 어느 만큼의 중요성을 지니는가?

다니구치 지로 : 공간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면서 그리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이야기에서 시간의 흐름이나 대화 등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깊이 고려한다. 방법상의 유사성을 말하자면, 오히려 영화를 연출할 때와 비슷한 방법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만화"의 표현 가운데서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화를 할 때 신경을 쓰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배경의 표현법이다. 기존의 만화처럼 기호로서의 배경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것,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그리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 왔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간을 의식하고 만화 표현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의 이야기 연출법은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어떻게 하면 리얼하고 현실적인 표현이 가능할까 모색하면서 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조형이나 표정도 감정표현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화하는 시간, 배경, 회화 등 세세한 묘사에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연출하려고 한다.

▲ <선생님의 가방> 중. ⓒ Jiro Taniguchi, Hiromi Kawakami / Futabasha Publishers Ltd.

질문2) 이번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다. 당신 작품에 인상 깊게 두드러지는 시간은, '회상된 과거'이다. 전후 일본의 가정을 회상하는 <아버지>, 만화지망생의 이야기를 회상하기 위해 60년대로 돌아간 <겨울 동물원>, 그리고 60년대의 청소년기로 돌아가 본 <머나먼 고향> 등이 직접적으로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선생님의 가방>에서도 회상된 시간(가령 선생님의 과거 가족사)은 매우 중요하다.

이 회상 속에서 가족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대체로 '파괴된 가정'이다.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어느 날 집을 나가 실종된 가족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마치 낫지 않는 상처에 약을 바르려고 돌아가는 이처럼, 거의 애처로울 만큼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불변하는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예술 작품 속에 고착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종결시킨다. 당신의 과거는 아무리 되돌아가서 다시 매만져 보아도 복원할 수 없는 깨진 그릇 같다. 그것을 잘 알려주는 작품이 <머나먼 고향(열 네 살)>이다.

▲ <겨울 동물원>(다니구치 지로 지음, 오주원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이 작품의 주인공은 모종의 계기로 중학생 시절의 과거로 돌아간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처럼 사건의 전말을 담은 시간 모두를 인지한 채 과거로 돌아가지만,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이 시간의 흐름을 돌려 비극의 진원지를 제거하는 것과 달리, 당신의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미래로부터 온 자 답게 아버지가 가출할 것을 알고 있지만, 그 가출을 결코 막지 못하고 과거는 그저 실패한 채로만 남을 뿐이다.(모든 주인공에게 사정은 대동소이하다. 마음 한 구석엔 복원시킬 수 없는 깨어진 그릇 같은 과거의 가족, 실패한 인간관계가 머무르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당신이 <도련님의 시대>에서 일본 근대에 접근하기 위한 소재로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먼저 선택한 것조차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소세키야 말로 철저하게 파괴된 과거, 복구할 수 없이 깨어진 가족 관계 위에 자신의 삶을 축조하고 있는 인물이니까 말이다.

당신의 작품에 빈번히 출현하는 이 과거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가족이 깨어지는 이 실패는 당신 작품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갖는가? 그리고 그 실패는 한 개인(또는 당신 자신)에 국한된 문제인가? 아니면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보편적인 렌즈로 삼아도 좋은가? 그리고 당신은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들이 무엇을 얻기를 바라는가?

다니구치 지로 : 그 어느 행복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반드시 어떤 괴로움이나 장애물 따위가 태어나게 되어 있다. 또한 가족의 붕괴나 실패가 어떤 이유로 인해 그런 일로 나타나버리는지를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오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거기서 다시 일어나고, 결국 그것을 뛰어 넘는 것이야말로 삶이며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몇 번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며, 그 때에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다라 삶의 방식 또한 바뀌어나가게 될 것이다. 내겐 만화를 그리는 일이 현재 내 삶의 방식을 스스로 묻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지금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달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창작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산다는 것의 깊은 의미나 철학적인 요소는 될 수 있는 한 깊숙이 집어넣지 않도록 해 왔다.

또한 나는 일본 사회의 이야기, 일본의 이야기를 그린다기보다는 나 자신도 포함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방식을 그리고자 한다는 점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선생님의 가방> 중. ⓒ Jiro Taniguchi, Hiromi Kawakami / Futabasha Publishers Ltd.

질문3) 앞선 질문에서 말했듯, 회상적 구도 속에서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들은 인간적 관계의 와해를 다시 회복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러한 점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주요한 주제가 아닌 <고독한 미식가> 같은 작품 속에서조차 잘 드러난다. 주인공이 잠시 잠깐 과거를 회상할 때 그 과거란 '연인 사유키와의 관계 파기'가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게도 주인공들은 과거로 돌아가 실패를 반복하고 결국 쓰디쓴 경험을 다시 체험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들은 제작된 인공물들 속에서 비로소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제작된 인공물이란, '요리' 또는 '예술 작품'을 말한다.

<'도련님'의 시대>, <겨울 동물원>, <고독한 미식가>, 이렇게 세 작품을 보자. <'도련님' 시대>의 주인공 소세키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실패자이다. 유년의 가족 관계의 실패자이고, 유학 가서는 신경증을 얻었으며, 대학 선생으로서도 실패했다.(그의 딸이 증언하는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가장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실패자였다.) 심지어 <'도련님'의 시대>에서 그는 자신의 습관적인 술주정 때문에 곤란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소세키는 <도련님>의 집필에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소설가가 되고 자기 안의 문제들을 정리하고 해결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모든 실패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소중한 티켓 하나를 얻는다. <겨울 동물원>의 주인공인 만화가 지망생은 당신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처녀작의 발표에 성공함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뒤로 하고 있는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과거의 사랑이고, 그가 현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은 나날의 무미건조한 업무들이다. 이로부터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음식'(하나의 최선을 다해 제작된 인공물)이다.

음식이 되었건 예술 작품이 되었건, 당신의 주인공들은 인공적 노력의 소산(음식, 예술작품)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삶과 화해하게 되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겨울 동물원>의 결말은, 주인공의 노력 속에 탄생한 한 편의 만화를 통해 가느다란 선 같은 애처로운 사랑이 어떻게 보호받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술 작품의 창작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인물들(소세키, 하마구치)이 종종 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당신 주인공들의 인생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 같으며, 과거의 실패한 가족을 보상해 주는 자리가 되는 것도 같다. 당신 작품에서 예술에 그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다니구치 지로 : 내게 예술이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표현할 재주는 없다. 어디까지가 대중적인 것이며 어디까지가 예술적인 것인지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이런 예를 들고 싶다. 고대의 공예품은, 당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위해 만든 도구나 장식품 그리고 여러 의례에 사용되었던 미술품 등이다. 그런데 그것이 현대에 와서 예술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표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과연 만화가 예술일지, 문학이 예술일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그것들은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고 그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무엇이라고 생각은 한다.


▲ <선생님의 가방> 중. ⓒ Jiro Taniguchi, Hiromi Kawakami / Futabasha Publishers Ltd.

질문4) 당신 작품의 기본 구도를 공간, 시간, 예술이라는 세 가지 축 위에서 이해해 보고자한 질문들이었다. 이제 부수적인 질문 몇 가지만 하려고 한다.

요리 만화는 일본 만화에서 주요한 장르 가운데 하나인 것 같고, 한국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요리 만화는 사람을 좀 질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첫째, 요리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허황된 묘사 때문에 질리고, 둘째, 칼 대신 요리를 손에 들었다 뿐인 사무라이 식 대결 구도 때문에 질리고(이 대결 구도의 긴장은 맛의 축복 속에서 인생의 모든 긴장을 풀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우 위해하다), 셋째, 음식을 보존되어야 할 문화의 한 국면으로 보고, 지루하게 음식의 규범을 정립하려는, 음식 교과서 발간자의 태도 때문에 질린다.(물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도 많다고 생각한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요리 만화는 <고독한 미식가>의 제15화이다. 주인공이 편의점에서 야식을 사먹는 얘기다. 제목을 보면 '미식가' 이야기인데, 소개하는 것은 ‘편의점 음식’이라니! 얼마나 놀라우면서도 자신만만한 발상인가! 미식의 의미를, 미식에 대한 모든 천상의 기준으로부터 되찾는 느낌이었다.

이 편의점 장을 절정으로 해서 이 만화는, 미식으로 대표되는 가치를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 귀속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다. 줄거리 역시 일상성의 관점에서 그 의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줄거리다운 줄거리 없는 만화, 모든 서사의 알려진 형식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만화다. 그런데도 읽히는 힘이 있다.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볼 때 만화 안에는 소설이나 게임과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서사의 가능성이 내재한 것 같다. <고독한 미식가>나 <우연한 산보>에 입각해 보자면, 그렇게 볼 수 있는가?

다니구치 지로 : 확실히 '이야기성'이 없는 만화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표현해 봤다. 야단스러운 이야기성으로만 읽히는 만화가 아니라, 조용하고 아주 소소한 사건에도 이야기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나의 <걷는 사람(歩く人)>이라는 작품은 산보하는 일상을 그린 실화적인 방법이었지만, 이렇게 사소한 사건이나 배경 묘사만으로도 만화가 성립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아가 만화 표현의 새로운 폭을 발견할 수 있어서 기쁨이 컸다.

만화가 가진 표현력의 가능성은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며,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다. 그건 소설에는 없는 '문자와 그림'이라는 강한 표현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겨울 동물원> 중. ⓒJiro Taniguchi / Reproduction authorized through BCF-Tokyo.

질문5) 만화가 가진 예술로서의 독자성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여러 가지 특별한 소재를 다루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같은 산악인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K2같은 두려운 봉우리의 '장엄함'을 잘 그려내고 있다. 장엄함은 흥미로운 화두이다. 오늘날 영화 산업은, 자본의 투입 규모와 영화적 표현이 성취하는 장엄함의 정도 사이에 비례 관계가 있다는 착각을 우리에게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들이 보여주듯 장엄함은 텅 빈 무대와 인물 두 명으로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엄함은 정신의 크기에 자리하지, 가시적인 물질의 규모에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다.(이 점은, 최근 할리우드가 되살리고 있는 그리스 고전들이 얼마나 초라한 화면과 빈약한 감정과 유치한 서사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만화가 자유자재로 장엄함과 같은 정신적 가치를 구현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을 준다면, 만화는 영화 같은 엄청난 진보를 하고 있는 예술 형식으로부터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지 않는가? 소설과 관련해서는, 그런 영화의 위협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늘 날 만화는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위협하는 예술 형식을 가지고 있는가?(예를 들면 영화나 게임) 아니면 예술에서의 독자적인 길을 이미 안정되게 하고 있어서, 다른 위협으로부터 보호받는가?

다니구치 지로 : 상업적인 부분을 이야기한다면, 확실히 만화는 게임이나 컴퓨터 같은 미래형의 표현법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고 실제로 만화 잡지의 매상도 떨어지고 있다. 그래도 영화나 소설 등 전통적인 표현법들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계속 탄생하고 만들어지고 있지 않나. 어떤 시대든 재미있는 것,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반드시 계속 읽히게 되어 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알아가고, 접하면서, 사람은 감수성 풍부한 존재로 성장해 가는 거라고 믿는다. 최근 주변을 보면 만화 쪽에서도 새로운 감각을 가진 만화가들이 탄생 중이고, 만화 표현도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렇게 만화 역시 미래형의 표현법을 발견해 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반드시 계속 읽히게 되어 있다." ……참 좋은 말이다. 이 말이 만화가로서 당신의 지나온 나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말은, 무엇이 되었건 사람들이 읽는 것을 만들어 내는 자에겐 진실이자 위안이자 규범이리라.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 <선생님의 가방> 일러스트. ⓒJiro Taniguchi, Hiromi Kawakami / Futabasha Publishers Ltd.

지난 2월 번역 출간된 다니구치 지로의 <선생님의 가방>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소설가 가와카미 히로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여성 소설가의, 30대 여성의 눈으로 진행되는 감정 선이 매우 미묘한 작품을 '60대 남성'의 눈으로 그려내는 것은 어떤 작업이었을까.

이와 함께 출간된 <겨울 동물원>은 1960년대 후반, 고민 많은 한 청춘이 도쿄에 올라와 엉겁결에 만화가 어시스턴트를 하게 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의 첫 작품을 완성하게 되는 이야기다. 시대 배경과 여러 설정, 주인공의 성과 이름('하마구치(浜口)'는 다니구치(谷口)를 연상시킨다.)까지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디까지 자전적인 내용일까? 이 외에도 작품을 보며 떠올랐던 질문과 다니구치 지로 개인에 대한 궁금증을 엮어 물어보았다. (인터뷰 및 번역 = 안은별 기자)


프레시안 : <겨울 동물원>의 하마구치의 이름, 상경한 시점, 경력의 시작 등은 외부에 알려진 작가의 프로필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디까지 자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지요? 가령, 좋아하는 소녀가 첫 작품의 창작 동기가 되었다는 줄거리는 어떻습니까?

다니구치 : 이 작품의 경우 시대나 배경 묘사, 일하는 모습의 디테일 따위는 제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스토리 자체는 전부 창작된 것입니다. 자전적인 표현법으로 그리기는 했지만, 사실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해 만화를 그린다는 설정은 어디까지나 픽션이지요.

프레시안 : 데뷔 당시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겨울 동물원>을 보면, 과거 화실의 모습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어시스턴트로서의 '업무'가 과중하여 느긋하게 자기 작품 구상을 못 하는 작가 지망생들의 모습, 또 지망생들끼리의 질투를 하는 모습은 지금도 어느 예술 분야에서나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당시 당신을 창작으로 끌어올린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또한 지금 그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많은 '준비생'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려요.

다니구치 :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그런 식으로 그리게 되었지만, 저는 어시스턴트 시절 상당히 느긋했고 질투 같은 것도 별로 안 했습니다. 줄곧 어시스턴트인 상태로 괜찮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오랫동안 만화 일에 몸담고 있다 보면,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게 되지요. 소설이나 영화, 매일의 체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조금씩 '내가 그려야겠다'는 기분이 강해지는 겁니다. 하지만 만화를 그려서 생활이 가능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경제적인 문제겠지요.

어시스턴트 일의 의뢰가 언제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 있든, 팔리든 팔리지 않든 만화를 계속 그리고 싶어 하는 마음만 있다면, 어디에선가 돌파구가 눈에 띄게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결국엔 어떤 장애물도 뛰어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겨울 동물원> 한국어판 중. ⓒJiro Taniguchi / Reproduction authorized through BCF-Tokyo.

프레시안 : '1947년'에 '일본'에서 태어나 만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요. 즉 당신이 놓인 '세대'와 일본 사회가 작품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일본 사회는 어떤 식으로 당신에게 소재나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제공했다고 생각하는지요.

다니구치 : 제 젊은 시절은 일본 경제가 성장하는 기간이었지요. 또 지금과 같은 정보 과잉의 시대가 아니라, 시간도 좀 더 느리게 움직였던 시대였다고 기억됩니다. 마침 만화도 성장기에 들어간 시기였어요. 새로운 감각의 만화가 많이 탄생한 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과의 날 것의 접촉이 가능했던 시대였고요. 그렇지만 일본 사회는 성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많은 오래된 것들을 파괴했고 새로운 것들을 길어 올리는 방향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거기에서 만화 창작의 원동력을 발견한 게 아닐는지요. 저는 이대로 계속 달리기만 하는 게 과연 좋은 것인가 의문을 느끼고 <걷는 사람>을 그렸습니다. 달리기는 이제 그만 해도 좋지 않을까, 이젠 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어가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거죠.

프레시안 : <겨울 동물원>에 그려진 60년대 말 70년대 초 신주쿠의 풍경은, 21세기를 체험하는 젊은이로서 부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 시절이 문화적으로 더 풍부했다고 생각하나요? 또한 그 당시 어떤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만화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니구치 : 확실히 제가 속한 세대는 호시절을 누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기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자극을 받아 만화를 그릴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양서점에서 발견한 B.D.(유럽 만화)를 만난 것이 매우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 외에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가능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어쨌든 내 자신이 납득 가는 만화를 그려나가자고 결심했습니다.

좋게 말하자면, 팔리지 않아도 좋으니까 향상심만은 잃지 말자고 생각한 거지요. 그 덕분에 이런 저런 것들을 보고 또 배우면서 만화의 표현법을 넓혀 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Jiro Taniguchi / Reproduction authorized through BCF-Tokyo.

프레시안 : <신들의 봉우리>도 그렇고, <선생님의 가방>도 그렇고, 대부분의 작품을 원작을 바탕으로 했거나 시나리오 작가와 협업을 했습니다. 이 과정은 어떤 점에서 당신을 제약하거나 혹은 자유롭게 하는지 알고 싶어요. 문학 작품을 만화로 '번역'하는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다니구치 : 소설이나 원작 시나리오가 있는 경우, 원작자로부터 '자유롭게 그려도 좋다'는 전제로 시작합니다. 제 경우, 이야기는 거의 소설 그대로 표현해 나갑니다. 소설을 읽었을 때 떠오른 이미지를 그대로 그림으로 그리는 거지요. 그로 인해 이야기 만들기에 사용되게 마련인 에너지를 연출기법에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확실히 그림으로 하는 경우, 아무래도 구체적 표현들이 필요해지게 되는데요. 그 때문에 원작의 이미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표현하는 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프레시안 : <선생님의 가방>의 '덴구' 에피소드는 정말로 쓸쓸했습니다. 이 작품은 죽음과 늙는다는 것, 시간이 지난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다니구치 : 당연하게도, 살아있는 것은 모두 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 경우, 젊을 때엔 거의 생각하지 않았던 죽음에의 준비를 지금, 60년을 살고 나서 겨우 하게 되었다는 느낌입니다.

늙는다는 사실에 슬픔도 느낍니다. 노후의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고요. 하지만, 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가는 사실에 공포를 느낍니다.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니까요. 지금은, 매일 매일을 소중하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여성 독자로서, <선생님의 가방>의 여성 시점이 너무도 놀라웠어요. 아슬아슬할 수도 있는 소재이지만, '노년 남성의 판타지'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이는 물론 원작자 가와카미 히로미의 묘사가 바탕이 되어서였겠지만, 작가로서 그것에 이입하고 그것을 다시 그려내기 위해 어떤 갈등이나 고민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다니구치 : 여성 주인공을 그려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성의 표정이나 몸짓을 그리느라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움직일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등등에 상당히 괴로워했지요. 하지만 결국 자신의 기분이 우선되고 말더군요. 지금도 쓰키코 씨를 잘 묘사했는지 어땠는지 불안하네요.

프레시안 : 당신의 만화는 한국에서 '멋진(혹은 멋있어지고 싶어하는) 중년 남성들'이라는 고정 팬층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일본에선 어떤지요?


일본의 경우 만화가 연재되는 잡지의 종수가 많고, 그 잡지들은 종류에 따라 고정 독자가 갈리지 않나요? 그래서 가령 'OOO는 20대 OL들이 좋아하는 만화' 같은 세대별, 직종별(?) 구분이 가능한 것도 같아요. 이러한 특성 위에서, 당신은 작품의 고정 독자들의 감수성이나 취향을 의식하는 편인지 궁금합니다.

다니구치 : 고정 독자들이 조금 존재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런 독자를 위해서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독자'를 위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그려나가면 좋을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역시 자기 자신이 재미있게 그리지 않는다면 독자들에게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게 아닐까요. 때문에 전 지금까지 제가 그리고 싶은 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그려 왔습니다.

프레시안 : 좋아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이 궁금합니다.

다니구치 지로 : 장르는 따지지 않아요. SF부터 대중소설, 순수문학에 이르기까지 제 관심을 끄는 소재를 다뤘다면 어떤 것이든 읽거나 봅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한 자료용으로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기분이나 컨디션을 완화시키기 위해 일에서 손을 놓을 때에는 주로 오락 작품을 봅니다.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은 너무나 많아서 하나를 들기는 어렵군요. 영화는 1년에 한 번 정도 보는데, 코폴라의 <대부>라든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붉은 수염> 같은 영화를 좋아합니다. 만화 연출하는 데 공부가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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