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는 봄의 절정인 5월, 제9강, 1박2일로 보라색 자운영 꽃길을 따라 남도의 강진과 영암으로 떠납니다. 첫날에는 지극한 정성을 모아 미륵왕생을 기원하며 향나무를 묻었던 기록을 새겨 놓은 암각문과 너른 들판 언저리에 흔적으로 남은 월남사지와 성풍사지를 둘러봅니다. 또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석탑(보물 제1433호)와 같은 수많은 성보문화재를 간직한 월출산 기슭의 도갑사와 같은 독특한 남도 불교문화의 향기에 흠뻑 젖을 것입니다.
둘째 날에는 월출산 깊은 곳에 은거하고 있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을 찾아 월출산을 오릅니다. 마애여래좌상이 계신 곳이 곧 용암사지입니다. 등산을 해야 하기는 하지만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는 길로 나라 안 폐사지들 중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곳입니다. 한 시간 남짓 절터에 머물다 산에서 내려오면 벽화가 빼어난 무위사에서 몸과 마음을 쉽니다.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2014년 5월 17(토)∼18(일)일 1박2일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7일(토요일)>
오전 7시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채지리 매향비→엄길리 암각매향명(보물 제1309호)→점심식사→도갑사→성풍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118호)→강진 사문안 석조상→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제298호)→진각국사 탑비(보물 제313호)→저녁식사 겸 뒤풀이→금릉 경포대 숙소(1박, 다인실)
<5월 18일(일요일)>
금릉 경포대→아침식사→바람재→구정봉(738m)→용암사지(간식시간, 점심식사가 늦으니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세요)→월출산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용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283호)→구정봉→바람재→경포대에서 늦은 점심식사→무위사(국보 제13호 극락전, 국보 제313호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벽화, 보물 제507호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 보물 제1314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서울 향발
용암사지에 다녀오는 길은 운동화 보다는 등산화가 좋습니다. 스틱이 있으시면 가져 오는 것도 좋겠습니다. 용암사지는 800m 정도의 고도입니다. 봄이긴 하지만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여벌의 옷과 산 위에 식수가 없어 마실 물을 넣어 갈 수 있는 배낭을 가져 오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오늘 가는 용암사터는 바로 앞에서 보고 말면 다리만 만지고 코끼리를 다 봤다는 격이 되고 마는 곳이다. 그러니 어찌 잰 걸음으로 다가가겠는가. 절터 또한 한달음에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아예 구정봉에서부터 험한 길을 만들어 놓곤 단박에 다가드는 것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턱 댄 고행만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절터로 가는 길 짬짬이 얼핏 설핏 자신을 드러내며 가쁜 숨을 고르는 순례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라 안 절집이나 절터이거나 간에 어디인들 아름답지 않을까 마는 용암사터는 유독 멀리서 봐야 그 본래면목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많은 절집들이 그 마당에서 내다보는 그윽한 앞 풍경을 내세우지만 용암사터는 반대이다. 오히려 먼 곳에서 그를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용암사터는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들이 발생시키는 난감한 그리움을 유감없이 뿜어낸다. 그 때문에 언뜻이라도 절터를 보고 말았다면 그곳으로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매혹적인 곳이기도 하다.
구정봉을 에돌아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기 짝이 없지만 걸음이 더딘 또 하나의 까닭은 길이 험해서만은 아니다. 안계(眼界)가 트이는 곳마다 펼쳐진 기암괴석과 골짜기들이 순순히 눈길을 놓아주지 않고 잡아채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빼어난 정경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순례자는 기꺼이 목례를 보내고 싶어진다. 비록 절터로 향하는 길이 멀고 험할지라도 나무와 바위가 앞 다투어 장엄(莊嚴)한 그 길은 갖가지 향화(香花)가 그윽한 아름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장면들이 묵묵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이 받는 위안은 또 얼마나 크겠는가. 그렇기에 기어코 부처님에게 다다르지 못할지라도 이미 그를 찾아 길을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서 진흙길이나 돌너덜을 마다않고 걷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이미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투박한 모습의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가 100미터쯤 남았을까. 그 바위의 뒤통수가 보이는 곳에서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그리곤 위태롭게 걸려 있는 너럭바위에 주저앉았다. 휘둘러 기암괴석을 바라보던 눈길이 한 곳에 머물러 얼어붙은 듯 부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에게 닥친 시간은 억겁과도 같았으며, 또 찰나이기도 하다. 허상과 실상이 겹치는 오묘한 늪과도 같았으며, 나는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윽고 그 모호한 순간들이 나를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미 눈은 감았으며, 잘 여문 석류가 터지듯이 벌어진 입에서는 경탄의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 누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저곳에 절집을 지었는가. 바람 한 점 불어왔으면 먼지 핑계라도 대며 눈물을 찍어내고 싶을 정도이다. 웬만하여 입을 다물고 말았겠는가.
몇 해 전 겨울, 강원도 양양의 선림원터에 무량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고 선 나무 한 그루에게서 느꼈던 가혹한 아름다움 앞에서 말을 잃고, 강릉 굴산사터 당간지주가 보이지 않을 만큼 퍼붓던 눈 속을 거닐며 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었듯이 눈앞에 펼쳐진 정경은 또 다시 나의 말을 앗아가 버렸다.
저곳이 절집이었던가. 먼 곳의 탑은 어슷어슷 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그 모습을 내 놓고 있다. 한 폭의 담채화인 양, 곁에는 진달래가 피었는가, 옅은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보랏빛 농담(濃淡)이 출렁이며 에워싸고, 그 곁에는 새움이 터진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난 것인지 노랗게 물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아! 이처럼 경건한 헌화공양을 어디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애써 모른 척, 딴 곳을 보고 있어도 삽시간에 달려든 그 아련한 정경이 너무도 그리워 고개를 다시 그곳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헌화공양을 받고 있는 것은 절터의 동쪽에 놓인 동탑이며, 탑은 큰 산 골짜기에서 마치 귀양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막한 산중에 홀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만 가시나무가 아닌 갖가지 봄꽃으로 둘러싸였으니 그런 귀양살이라면 나인들 마다할 까닭이 없을 것 같다. 여간해서 이런 생각이 들까. 나에게는 버거울 만큼 아름다운 정경이어서 내 속의 둔탁한 미감이나 성긴 감성으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이다.
더구나 봄 햇살마저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아무리 정신을 곧추 세우려 해도 허물어 질 뿐 다잡기가 만만치 않다. 한 번 다문 입은 다시 벌어지지 않았으며, 온 몸의 기운조차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다. 힘겹게 동탑에서 고개 돌리면 산 벚꽃 만발한 산을 등지고 선 서탑이 또 눈길을 붙들었으니 마음은 더욱 벅차오르기만 할 뿐 숨 고를 겨를조차 없다. 탑은 다듬지 않은 긴 호박과도 같은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은 채 한껏 아침 햇살을 머금은 채 빛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눈여겨보지 않으면 서탑은 월출산을 수놓은 그 많은 바위 중의 하나로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수더분했다. 주위에 화려한 단청을 입힌 전각 한 칸 없었지만 그는 초라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거져 드러나지 않으니 그 두루뭉술한 자태가 풍기는 맵시 또한 빼어났다. 탑 뒤, 먼 산에는 새잎이 찬란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하얀 산 벚꽃들까지 무리지어 피어났으며, 갓 움을 틔운 새잎들이 빚어내는 여린 색들이 찬란하여 겨우 일으킨 마음은 또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그때부터 한동안 일어서지 않으려는 마음과 드잡이를 했다. 절터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쳐버리는가 싶을 만큼 말이다. 겨우 몸을 가누어 서탑과 마주보고 있는 마애불 아래를 지나 절터로 내려섰다. 마애불보다 동탑을 품고 있는 절터를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다. 등산로가 아니니 출입을 하지 말라는 팻말이 앞을 가로 막았지만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넘어섰다. 그 길은 등산로가 아니라 부처님을 만나러 가는 순례자의 길이었으니까 말이다. 무성한 산죽 사이로 나 있는 돌계단의 고졸함은 푸근하기만 하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만큼 폭은 넓지 않고, 내딛는 발은 그저 평지를 걷듯 자연스러운 높이를 감당하면 될 만큼 알맞았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의 폐사지 답사기 전라남도 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중에서 용암사지 부분 발췌]
향의 종류는 워낙 다양하지만 아주 긴 세월을 거쳐야만 향이 되는 것이 있으니 침향이 그것이다. 침향은 향나무를 바다와 가까운 개펄에 묻어서 세월이 흘러 나무의 살집이 모두 빠져나간 다음에 꺼내는 것이다. 이처럼 향나무를 개펄에 묻는 행위를 매향(埋香)이라고 하며,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도 매향은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매향은 동해와 남해 그리고 서해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이루어졌지만 가장 많은 매향이 이루어진 곳은 서해다. 동해에는 지금은 갈 수 없는 삼일포 지역과 평안북도 정주 지역 그리고 울진의 맹방리에 각각 한 곳, 남해에는 경남 사천지역에 두 곳이 있으며, 서해에는 해남과 장흥에 한 곳씩 또 영암에는 모두 4곳이 있다. 또 충남 예산에 한 곳, 당진에는 두 차례에 걸쳐 매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매향 암각문(巖刻文)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대개 매향을 하고 나면 언제, 왜, 누가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 바위에 새겨둔다. 그것을 매향 암각문이라고 하며 입석과 같은 자연스러운 형태의 긴 돌이나 마을과 가까운 산속의 큰 바위 한쪽에 은밀하게 새기는 형태다. 보물 제614호로 지정된 경남 사천시 곤양면 흥사리에 있는 매향비는 고려 우왕 13년인 1387년 8월 28일에 향목을 묻은 일을 기록해 놓았다. 그 비에 새겨진 내용에 매향이 이루어진 까닭이 “자씨(慈氏) 의 하생과 용화삼회를 기다린다. 이 향을 지니고 있다가 미륵여래에게 봉헌(奉獻) 공양하니, 청정법(淸淨法)을 깨닫고 윤회를 끊어 불퇴지(不退地)를 이루기를 원한다”고 되어 있다. 더불어 주상전하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태평 그리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동시에 빌었다.
이는 매향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교와 떼려와 뗄 수 없는 의식임을 말하는 것이며, 나라 안의 모든 매향이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집중되어 있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시기가 그토록 한정되었다면 그 시대에 분명 무엇인가 관련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일은 바로 왜구의 침입이다. 왜구들은 호시탐탐 서해안 일대를 노렸으며, 피해는 고스란히 어민들의 몫이었다. 그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하여 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원을 올린 것이지 싶다. 그러고 그 기원을 올리는데 들어가는 가장 귀한 공양물로 침향을 선택한 것이고 말이다.
이처럼 향은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지만 변하지 않는 하나는 부처님에게 올리는 존귀한 공양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진 것 없는 범부의 입장에서 때때로 생각한다. 부처님에게 올릴 수 있는 가장 귀한 향기가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그때마다 얻는 생각은 부처님을 향하여 흘리는 땀의 향기이다. 백팔배나 삼천배를 하며 흘리는 땀만큼 향기로운 것이 있을까. 그것은 땀 냄새가 아니다. 오히려 경전에는 보이지 않지만 한향(汗香)이라고 해야 옳다. 범부들이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에게 공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니까 말이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이 조계종 템플스테이 사업단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인 2014년 봄호에 <향을 팔던 이 여래가 되고, 향나무를 깎으니 부처님이 되었네>라는 제목으로 쓴 향이야기 중 매향 부분 발췌]
■보다 자세한 자료집은 참가하시는 분께 출발 당일 나눠드립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긴팔 긴바지),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9강 참가비는 2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관람료, 강의비, 5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