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정치인들이 유난히 게으르거나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저마다 실력이 출중하고 똑똑할뿐더러, 비교적 약속도 잘 지키려 노력한다. 그런데도 야당이 선거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야당이라서다. 지금의 야당은 비주류다. 일시적 비주류가 아니라 구조적 비주류다. 130석이라고 하지만 야당의 힘이 덩치에 비례하지 않는 까닭이다.
새누리당은 과거 야당 시절에도 과반 여당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등에 업은 야당에 대통령도 쩔쩔맸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대연정 제안으로 난리가 났던 일이 대표적이다. 권력의 절반을 내줘서라도 주류와의 타협을 꾀해보려던 비주류 대통령의 딱한 처지는 그 정도였다. 비주류 권력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반면, 뒤를 이은 이명박 정부는 그토록 죽을 쒔어도 정권을 재창출했다. 주류는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고, 그 권력을 유지·관리할 수단이 대단히 많으며, 설령 실패하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여당을 상대하는 야당은 웬만큼 집요하지 않고선 어림없다.
지방권력을 다투는 선거철이다. 이번에도 야당이 지면 총선, 대선 패배에 이은 3연패다. 승패를 떠나 지방행정의 각도에서 봐도 정권 독주의 방지턱이 사라진 상황은 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암 덩어리', '쳐부술 원수'라고 한 규제 문제. 현재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대립하고 있는 재벌의 경복궁 옆 호텔 건립 문제는 여권이 서울시를 접수하면 끝난다. '규제완화 끝장토론'에서 화제가 된 당산초등학교 옆 관광호텔 건립 문제도 그동안 영등포구청이 버티고 있었다.
정치와 행정의 대동맥부터 모세혈관까지 여야는 갈등하고 대립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정부의 막무가내식 규제 완화가 걱정이라면, 야당이 할 일은 선거에 관한 집요함을 보이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정책의 거대한 유턴을 막고자한다면, 당면한 선거를 통해 더 많은 지방 일꾼들을 당선시키는 일이다. 그게 책임 있는 야당이 할 일이다.
그런데도 새정치민주연합 일각에선 '지방선거 보이콧' 주장까지 나왔다. 논리는 이렇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기초선거 무공천 요구를 끝내 거부하면 6.4 지방선거 전면 거부 운동을 전개한다. 투표율을 20% 미만으로 떨어뜨리면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성립된다. 9월 정기국회에서 기초선거 무공천 특별법을 제정한 후 지방선거를 다시 치른다.'
'선거 보이콧' 캠페인이 효과를 발휘했던 가까운 경험이 있다. 지난 2011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직을 걸고 던진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 때다. 야당의 보이콧 캠페인으로 투표율이 25.7%에 그쳐 투표함은 개봉도 못했다. 오 시장은 자진사퇴했고, 두 달 뒤 열린 재보궐 선거에서 박원순 시장이 당선됐다. 이래도 저래도 지방선거에서 패할 가능성이 높은 야권으로서는 오세훈의 무리수가 박원순의 당선으로 이어진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의 선거가 남긴 실제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정치의 정상 경로를 이탈시키면 심판받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 전 시장의 행태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기 중반에 대선 욕심으로 가벼이 처신한 오 전 시장이 그래서 심판을 받았다. 당초 오 전 시장의 자신감과 달리 중도층이 꿈쩍 않고 투표장에 가지 않은 결과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선거'에 25.7%나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헛발질을 해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골수 지지층이 최소한 4명 중 1명 꼴이라는 의미다. 굉장한 숫자다.
이를 6.4 지방선거에 대입하면 야당이 낭패를 볼 가능성이 크다. 기초선거 공천 문제 때문에 선거를 보이콧 하겠다는 야당은 3년 전 무상급식 때문에 시장 직을 건 오 전 시장만큼이나 무모해 보인다. 유권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정치 경로를 이탈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여기에 60%에 육박하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 45% 안팎의 새누리당 지지율을 감안하면 야권의 투표율 끌어내리기 전략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김한길 대표는 일단 이런 극단적인 방안에 선을 긋고 있다. 그는 "당 일부에서 그런 목소리가 있지만 당 공식 기구에서의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도 안철수 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기초선거 무공천에 관한 회답을 요구한 7일 이후엔 어떤 쪽으로건 결정을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무공천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재로선, 보다 강력한 정치 투쟁이 유력하다고 한다. 전멸 수준의 패배를 감수하더라도 무공천에 올인하는 방안이다.
야권의 선거 보이콧 주장이나 기초선거 무공천 약속 지키기에는 지방선거에 어떤 명분을 세워 패하면 다음 선거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깔려있다. 안철수 대표는 최근 "우리의 목표는 2016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고 2017년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라며 "다수당이 되고 정권교체를 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김효석 의원은 무공천으로 인한 지방선거 패배 가능성을 예상하면서도 "우리가 폐허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잿더미 속에서 결국 새싹은 돋아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를 폄하할 건 아니다. 그러나 당면한 선거를 포기한 듯한 야당의 행보는 대선에서 야당을 지지한 48%의 유권자, 총선에서 130석을 만들어준 유권자들에 대한 직무유기다. 이기고 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정당이 지지층의 이익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느냐의 문제다. '구조적 비주류'인 야당이 선거에서 패해도 박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다. 코앞에 닥친 선거를 송두리째 포기한 채 '수권정당'을 꿈꾸는 야당이 지금 무슨 말로 치장해도 허풍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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