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모(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
"초등학교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외가댁으로 갔다가 개학 전날에야 올라왔습니다. 단칸방 생활, 작은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던 어머니의 어쩔 수 없는 산택이었던 것을 압니다. (…) 야트막한 산 서너 개를 넘어서면 탁 트인 평지가 펼쳐졌고, 그 드넓은 논 가운데 한 채 있는 집이 바로 외가댁이었습니다. (…)
이 책은 지난 20년 동안 자연의 벗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묶은 것입니다. (…) 나는 자연의 마음을 이렇게 느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이 책으로 인해 자연의 마음은 진정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면 말입니다." (<나의 생명 수업>(김성호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4~9쪽)
지난 해 여름인가? 김성호 교수의 목소리를 지척에서 들은 적이 있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강하고 무게 있는 이야기였다. 그 후 김성호 교수의 책들을 구해 읽었다. 책도 그 목소리 그대로다. 반했다. 나는 좀 촐랑대는 타입이다. 김성호 교수를 따라해 봤다. 안 된다. 포기했다.
누가 그랬다. 김성호 교수와 나는 자랄 때부터 달랐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나도 방학만 되면 외할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있는 시골에 갔다가 개학 전날에야 올라왔다. 드넓은 바다를 보며 방학을 보냈다. 딱따구리는 못 봤지만 말미잘에 쏘이며 놀았다. 감사한 일이다.
둘째 딸에게 미안하다. 첫째 딸은 그래도 어린 시절에 독일에 살면서 들과 산에서 자연과 함께 많이 놀았는데, 돌이 채 못 되어 귀국한 둘째 딸에겐 콘크리트 숲밖에 못 보여준 것 같다. 우리 아이에게 시골 외갓집이 없다. 뒹굴고 놀 민들레 밭이 없다. 에휴, 커피나 마시자.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시니컬하지만 코믹하고 구체적 경험이 나와 있으면서 실용적인 귀향 생활 가이드쯤 되지 않을까, 그게 첫인상이었다. "내가 해 봐서 아는" 사람의 퉁명스런 금지의 반복, 그게 중간 인상이었다. "술을 끊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인생의 절반 이하를 도려내버리는 일"이라 할 땐 살짝 짜증이 나서 읽다 말 뻔 했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얘기다.
그리고 그치들이 할 만한 손쉬운 상상, 즉 여유롭고 낭만적이고 자신의 회사 인생을 보상받는 귀향 생활이라는 그림을 심술궂은 어린애처럼 산산조각 낸다. 마루야마의 그 파괴 행위를 통해 역으로 도시의 흔한 단카이 세대 남성의 나이브한 삶과 환상이 보인다고 할까. 게다가 국제 뉴스엔 절대 잡힐 리 없는 일본 시골의 보수적이고 단순한 선거 심리도 덤으로 가시화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딴 동네 불구경 하듯 팔짱 끼고 볼 만한 게 아니다 싶었다. 작가가 묘사하는 은퇴 세대 남성들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는 데 재능도 경력도 전~혀 없는, 그러나 '여기 아닌 어디'는 나을 거라는 환상엔 기가 막힌 재능을 지닌 도시인 모두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두면 남는 시간에 대단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지, 아니야, 취미를 가질 수 있는 건 일 하면서도 그 취미에 몰두했던 사람들뿐이야, 같은 대목에선 정말이지 찔린다. 이 책이 진짜 의도한 독자는 나 아닐까 싶다.
핵가족화가 되면서 공동체가 제공하던 롤 모델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체득하던 사회성 습득 기회가 없어진 것. 그리고 학교나 학원에서 단면적이고 찰나적으로 사람을 만나다보니 사람 전체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고 자신도 일면만 보여주는 데 익숙해지면서 사회성을 제대로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이 늘고 있다.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데 익숙한 세대가 부모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애에만 몰두하면서, 한편에서는 철저한 과잉교육과 통제가, 반대쪽에서는 아동학대와 방임이 동전의 양면처럼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같은 원인의 양면적 결과라는 분석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유효한 면이 많아 섬찟하기도 하다.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어제였나, 그제였나, 문득 이런 의문이 생겼다. 국제 뉴스와 과학 뉴스 중, 한국의 뉴스 소비자들에게 더욱 인기 없는 게 무엇을까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일종의 자조적 농담이다. 한국의 뉴스 소비자, 다시 말해 광범위한 식자층은, 국제 문제에도 과학 문제에도 관심이 없다. 인터넷 뉴스의 조회 수, 종이 신문의 열독률, 독자 반응, 해당 주제의 단행본 판매량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내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도 더욱 확실히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2000년대 중후반 당시 내가 편집장 노릇을 하던 잡지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때문이다. 그 잡지를 재미있게 봤다고 내게 말해준 독자는, 지금까지 딱 한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책 이야기는 안 하고 무슨 소리냐 하면, 이번 주 ‘취미는 독서’를 위해 <트리니티>(조너선 페터봄 지음, 이상국 옮김, 서해문집 펴냄)를 다시 읽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최후의 르네상스적 지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오펜하이머. 그는 과학자, 공학자, 과학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고, 결국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트리니티>는 그런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미국 과학자, 미국으로 온 수많은 망명 과학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싶어하는 군인들, 적국, 스파이, 기타 등등. 이것은 과학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국제 정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고뇌하던 한 천재의 비상과 몰락, 그로 인해 영원히 변해버린 우리들의 세계에 대한 책이다. 과학도 국제 정치도 관심 없는 독자들에게, 그 무엇보다 앞서 <트리니티>를 권하고 싶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이른바 ‘실용서’를 자주 읽는 편은 아닌데, 가끔 집어 드는 실용서의 공통점이라면 ‘매뉴얼’에 가깝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시절 두고두고 읽으며 흉내냈던 (이젠 제목도 정확히 기억 안 나는) 일본인 저자의 노트 정리법, 혹은 최근 버닝하고 있는 ‘좁은 집 인테리어 잘 하기’ 유의 책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조금씩 읽어왔던 <구글을 가장 잘 쓰는 직장인 되기>(우병현 지음, 휴먼큐브 펴냄).
…무엇보다 ‘문자’와 ‘직접 말로 전달’, ‘한글 프로그램 인쇄물’을 선호하는 직장 내 상사 여러분들께 널리 읽혀야만 할 책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이명현(천문학자) : 김종영 미술관은 집근처에 있어서 오다가다 생각이 나면 한 번씩 들르는 곳이다. <김종영>(오광수 지음, 시공아트 펴냄)도 화장실 앞 책꽂이에 두고 오다가다 생각나면 한쪽씩 두쪽씩 읽었다. 한참이 걸려서 오늘 오전에야 다 읽었다. 이 책에 일부 인용된, 김종영이 썼다는 <완당과 세잔>이라는 글이 읽고 싶어졌다.
한 작가를 '한국' 속에 묶어두지 말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면 더 빛나고 더 큰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이상을 단지 식민지 조선의 좌절하고 퇴폐한 지식인으로 바라보면 고만고만한 요절한 천재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서 강요된 쇼 윈도우 진열장 같은 가짜 근대 사회 속에 살면서도 동시대 세계 지식인의 파동을 공감하고 있었던 이상을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평가가 만만치 않게 된다. 그의 좌절과 절망은 한 천재의 개인사를 넘어서게 된다. 세계 속에서 이상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김종영을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보고 싶다. 일단 그가 쓴 <완당과 세잔>을 찾아서 들고 김종영 미술관에 다시 가봐야겠다. 경치 좋은 그곳에서 커피 한잔 하면서 세계인 김종영을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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