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궁금한 게 참 많았다. 어느 날, 학교에서 ‘국민의 4대 의무’라는 걸 배웠다. ‘국방, 교육, 근로, 납세’의 의무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예컨대 납세의 의무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세금도 더 많이 내야 한다. 그런데 국방의 의무는 다르다. 국가의 혜택을 더 많이 누린 사람이라고 해서, 병역 의무를 더 많이 지지는 않는다.
이상한 일 아닌가. 서울 강남의 부유층이라면, 현재 누리는 경제 수준과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상황 사이의 격차가 아주 크다. 반면, 서울역 노숙자라면 그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부유층 자제일수록 군 복무도 오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전쟁이 터지면 잃어버릴 게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병역 의무를 지는 게 옳지 않은가, 라는 게 당시 내 의문이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해 선생님은 “대학 가면 다 저절로 풀린다”라고 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대학 입학 첫 달 만에 깨달았다. 세상에 저절로 풀리는 의문은 없다.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 아니 그 이상의 교육기관에 간다고 해도, 궁금증을 푸는 건 자기 몫이다.
어른이 된 지금, 내 생각은 이렇다. 재벌가 자제나 가난한 집 자제나 병역 의무는 똑같이 지는 게 옳다. 전쟁으로 잃어버릴 게 더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더 많은 병역 의무를 질 필요는 없다. 국가로부터 얻은 혜택, 또는 국가가 망했을 때 개인이 짊어질 비용 등을 계량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래서 그 값이 개인마다 다르다 해도, 병역 의무는 똑같이 지는 게 옳다. 전쟁은 사회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재난이다. 이에 대한 대비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차별 없이 하는 게 옳다. 여기에 차별을 두면, 반작용이 생긴다.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 조건인 보편적 권리에 대해서도 차별을 두려는 압력이 생길 수 있다. 그럼, 공동체는 무너진다.
지난달 31일, 주요 기업 등기 임원의 연봉이 공개돼서 화제가 됐다. 최태원 SK회장은 지난해 연봉이 301억 원이었다. 반면, SK그룹 전문경영인 연봉은 많아야 10억 원대다. 회사 자금을 횡령한 죄로 지난해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최 회장이, 회사를 위해 평생을 바친 전문경영인보다 수십 배 많은 급여를 받는다는 이야기다. 회사에서 힘들고 위험한 일을 도맡는 비정규직과 비교하면, 아예 계산조차 막막해진다.
같은 날, 남과 북 사이에서 수백발의 포탄이 오갔다. 안보를 핑계로 사회를 통제하려는 것도 잘못이지만, 안보에 너무 무신경한 것 역시 잘못이다. 전쟁터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건 대개 힘없고 가난한 청년들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도 그랬다. 지금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감옥에서 301 억 원 연봉을 챙겼던 최태원 회장은 병역을 면제받았다. ‘체중 과다’ 때문이라고 한다. 재벌가 2~3세들 사이에선 흔한 일이다.
‘전쟁으로 잃어버릴 게 많은 재벌가 자제들이라면, 군 복무도 더 오래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던 순진한 의문은 오래 전에 머리에서 지웠다. 다만 그저 걱정스러울 뿐이다. 국가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누린 재벌가 자제들은 총 한번 잡아볼 일 없다. 그러나 서민 자제들은 최전방에서 보초를 선다. 이런 현실을 아예 모른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평범한 젊은이들이 사회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처음 깨닫는 장소는 대개 군대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이런 군대가 제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공군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지만, 제2롯데월드 공사는 착착 진행됐다. 이걸 막을 수 있는 다양한 규제조항이 있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공군 조종사 목숨보다 재벌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걸까. 대통령이 된 ‘군인의 딸’은 오히려 한술 더 뜬다. 재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규제를 싸잡아서 ‘암 덩어리’라고 했다. 이쯤 되면, 정말 궁금해진다.
누가 진짜 안보위협 세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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