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봄소풍, 4월 유람(제7강)으로, 서동(薯童)이 꿈을 펼쳤던 또 하나의 백제왕궁터인 익산(益山)고을을 찾아갑니다. 2014년 4월 27일(일요일) 당일로 진행합니다. 익산고을에서도 특히 금마면과 왕궁면을 품고 있는 금마지역(金馬地域)은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7세기 초에 무왕(武王)이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쌓은, 백제사의 현장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강 답사지인 익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익산(益山)고을은 서쪽은 서해에 접해 있고 동쪽은 노령산군(蘆嶺山群)에서 갈라져 나온 천호산(天壺山)과 미륵산(彌勒山)이 작은 산세를 이루며 서북쪽은 함라산(咸羅山) 줄기가 낮은 구릉을 이루며 이어져 있습니다. 고을 전체에 크고 작은 하천이 빚어 놓은 비옥한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금강(錦江)을 건너 논산(論山)과 부여(夫餘)로 통하고 서쪽으로는 옥구(沃溝)평야에, 남쪽으로는 만경강(萬頃江) 너머 김제(金堤)평야에 맞닿아 있어, 익산은 일찍부터 교역과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익산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마한시대(馬韓時代)에는 마한 54개 소국 중 건마국(乾馬國)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온조왕이 마한을 병합하여 금마저(金馬渚)라 했으며, 신라시대에는 경덕왕 대에 옥야현이 되었고 고려시대 초기에는 전주에 속했으며 후기에 주(州)로 승격되어 익주(益州)였습니다. 조선시대에 8도의 하나인 전라도에 1부(府), 4목(牧), 7도호부(都護府), 12군(郡), 31현(縣)을 두었는데 12군 중 익산군이었으며 한때 이리(裡里)로 불리다가 다시 옛 이름인 익산시로 되었습니다.
특히 금마면과 왕궁면을 품고 있는 금마지역(金馬地域)은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7세기 초에 무왕(武王)이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였으며 왕궁평성(王宮坪城)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백제가 무왕 대에 부여에서 금마로 천도를 하려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사비성을 도읍으로 하고 웅진성과 함께 이궁(離宮)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라는 다른 주장도 나왔습니다. 최근까지 이곳에서 발굴되는 유물들을 분석해 본 결과 백제 중엽 이후 이 지역이 부여와 공주에 버금가는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대는 이곳에 고구려 유민 안승(安勝)의 보덕국(報德國)이 있었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고려의 왕건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였던 곳으로, 기록에 따르면 안승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寶藏王)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는데 아마도 연정토의 아들로서 보장왕의 외손자였던 것 같습니다.
안승은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史冶島)에 피신하여 있다가, 670년(문무왕 10)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여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劍牟岑)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어 한성(漢城, 재령)을 근거로 당나라에 항쟁하며 고구려의 재건을 꾀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고간(高侃)이 침입하자 검모잠과의 의견 차이로 그를 죽이고 신라에 망명을 요청하자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金馬渚, 익산)에 머물도록 하고 고구려왕으로 봉하였습니다.
이후 674년 안승은 신라에 의해 보덕왕(報德王)에 봉해지고, 680년 문무왕의 조카를 비로 맞이하였으며 683년 신문왕은 그를 경주(慶州)로 이주시켜 소판(蘇判)의 관등(官等)과 김(金)씨 성(姓)을 부여하고 집과 토지를 하사하여 신라의 귀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금마저에 남아 있던 장군 대문(大文)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고구려 부흥집단은 궤멸되었고 이때 살아남은 고구려 유민들은 남쪽으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익산의 산줄기는 금강을 따라 함라산군(咸羅山群)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대둔산군(大屯山群)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는 낮은 구릉으로 동북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에 높낮이를 달리하는 여러 봉우리를 일구어 놓았습니다.
천호산(天壺山, 500m)은 '속이 텅 빈 산'이라는 뜻으로, 완주군 비봉면과 익산시 여산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북서쪽은 여산천(廬山川)의 금강수계(錦江水界)와 남쪽은 천호천(天壺川)의 만경강수계(萬頃江水界)를 나누는 분수령(分水嶺)으로, 그 이름은 서북쪽의 석회동굴인 천호동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익산의 주산 미륵산
미륵산(彌勒山, 430m)은 익산의 주산(主山)인데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쥐가 풍요로운 대지를 향해 만찬을 즐기는 모양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형국(形局)입니다. 원래는 동쪽으로 이어져 있는 높이 350m 정도의 낮은 산봉우리까지를 포함하여 용화산(龍華山)으로 불렀으나 산의 남쪽 아래 미륵사가 생긴 뒤로 미륵산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구분하여 미륵사지가 있는 북쪽은 미륵산, 나머지 지역은 용화산이라 부르고 있으며 산 위에 마한의 기준(箕準)이 쌓았다는 기준산성이 있습니다. 미륵산에서 발원하는 도천, 부상천, 궁평천 등은 만경강의 상류를 이루며, 서해안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오금산(五金山, 128m)은 해발 125m 정도의 봉우리 다섯 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왕(武王)이 어렸을 때 서동(薯童)이라는 이름으로 이 산 밑에서 어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이 산에서 금 다섯 덩이를 얻었다고 하여 오금산이라 불렀습니다. 무왕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자랐다는 용샘과 어머니를 위해 세웠다고 하는 오금사지(五金寺址) 등 산 곳곳에 백제 무왕(武王)과 관련된 흔적들이 많이 있으며 정상 부근에는 오금산성, 보덕성으로도 불리는 익산토성(益山土城)이 있습니다.
함라산(咸羅山, 240m)은 함라면과 웅포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줄기가 금강(錦江) 연안과 맞닿아 있고 정상에 서면 넓은 호남평야와 서해가 내려다보이며, 서쪽 봉우리인 소방봉(所方峰)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으며, 북쪽에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숭림사(崇林寺)가 있습니다.
황등산(黃登山)은 황등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온통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제일의 화강암 채석광으로, 이곳에서 채석된 화강암을 황등석(黃登石)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 아래 있었던 큰 저수지인 황등제(黃登堤)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고부의 눌제(訥堤))와 더불어 호남의 삼제(三堤) 또는 삼호(三湖)라 했으며 이러한 저수지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벼농사와 연원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배산(伓山)은 높이는 100m도 안 되지만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산으로, 옛날에는 바위를 ‘바회’라고 하였는데 ‘바회’는 줄여서 ‘배’로 불렀고 그래서 배산은 바위산을 뜻하게 되었으며 옥야현(沃野縣) 시대에는 배산 아래에 치소(治所)가 있었습니다.
풍수(風水)에서 ‘좋은 땅[吉地]’이란 ‘산줄기가 다한 곳[山盡處]’을 일컫는데 산줄기가 마감되기 위해서는 물줄기를 만나야 하므로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금강, 남쪽으로 만경강으로 둘러쳐진 익산은 그야말로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명당에는 의례 주산(主山)이 있기 마련인데 조선시대까지는 익산이 이리, 함열, 여산, 용안, 익산의 군현(郡縣)으로 각각 나누어져 있었으니 이리는 배산(伓山), 함열은 함라산(咸羅山), 여산은 천호산(天壺山), 용안은 모산(母山), 익산은 건자산(乾子山, 지금의 金馬山)이 주산이었습니다만 다섯 군현이 익산으로 통합되면서 넓어진 지역에 새로운 주산이 필요하여 비로소 미륵산(용화산)이 주산이 된 것입니다.
왕궁리토성의 규모
왕궁리 일대의 구릉 지대를 지역 주민들은 ‘모질메’라고 부르는데, 이곳은 예로부터 마한 혹은 백제의 궁궐자리로 알려진 곳으로 금마산에서 남으로 약 3km쯤 떨어져 있습니다. 구릉지를 일부 깎아내리고 주변은 흙으로 쌓아올려 세 단으로 나누어 평지를 조성하고 그 안에 건물을 배치한 ‘왕궁평성’ 또는 ‘왕궁리토성’이라고 불리는 이 성(城)은 남북 길이가 약 450m, 동서 폭이 약 230m의 반듯한 장방형을 이루고 있음이 발굴을 통하여 밝혀졌습니다.
발굴 결과 성은 일반적인 담장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큰, 폭이 약 3.2m 정도의 궁궐 성벽이 일부 노출되어 백제의 궁성지로서의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고 성의 축조기법이 백제양식이며, 백제시대의 기와 및 와당을 비롯하여 토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무왕의 천도 혹은 이궁(離宮)으로 운영된 궁성으로서, 통일신라시대 안승의 보덕국 궁성, 후백제 때 잠시 견훤 궁성으로도 이용되었을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의 왕궁으로 건립되어 경영되었다가 후대에 왕궁의 주요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왕궁의 외곽 담장지, 왕이 정사를 돌보던 정전건물지 등 14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백제 최고의 정원 유적지, 공방지(금, 유리, 동 등을 가공하던),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위생시설인 대형 화장실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유적지 안에는 오층석탑이 하나 외롭게 서 있는데,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왕궁의 경영이 끝나고 사찰로 변화되는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됩니다. 석탑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말기, 통일신라 초기 또는 말기, 고려 초 등 설이 분분합니다만 탑의 하부(下部)에서 다져쌓기로 조성된 건물지 흔적이 발견되어 석탑의 조성 연대는 백제시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왕궁리오층석탑은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단(土壇)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基壇)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놓았습니다. 탑의 제1층 지붕돌의 중앙과 심초석(心礎石)에서 각각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고 지붕돌에 사리 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주춧돌로 사용한 석재였으며, 좌우 두 곳에 4각형의 홈[凹]을 만들고, 뚜껑이 있는 금동제 함을 각각 장치하였습니다,
사리장치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를 갖추고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의 사리병과, 금으로 된 뚜껑 있는 네모꼴의 함 안에서 금강경판(金剛經板)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하여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금마면을 남류하는 옥룡천(玉龍川)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약 200m 정도 떨어져서 마주 보고 서있는 두 기의 석인상을 ‘인석(人石)’이라 부르는데 이 두 기의 석인상은 하나의 석주(石柱)에 머리부터 석좌(石座)까지 조각하였습니다. 석상의 머리 위에는 높은 관을 얹었으며,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이 인상적인데, 어깨는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좁게 처리하고 있으며 양팔은 복부 앞에서 손가락을 끼고 있으나 옷으로 가려졌고, 옷의 문양은 목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 위에서 좌우로 벌어져 있습니다.
옥룡천 사이에 두고 마주한 두 기의 석인상
이 석상은 넘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철종 9년(1858)에 익산군수로 부임한 황종석(黃鍾奭)이 다시 세우고 <군남 석불중건기(郡南 石佛重建記)>의 비문을 남겼는데 그 비문에 “이 석불은 불상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에 불상으로 알려지게 되어 비로소 고도리석불입상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석불중건기(石佛重建記)>에는 “금마는 익산구읍의 자리인데 동, 서, 북의 3면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으나 유독 남쪽만이 터져 있어 물이 다 흘러나가 허허(虛虛)하게 생겼기에 읍의 수문(水門)의 허(虛)함을 막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금마면의 주산(主山)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은데, 말에게는 마부가 있어야하므로 마부의 역할로 이 석상을 세웠다고 전해지며, 그래서 금마산을 마이산(馬耳山)이라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서쪽의 석상은 남자이고, 동쪽의 석상은 여자라고 하는데 이 두 석상 사이로 옥룡천(玉龍川)이 흐르기 때문에 남녀는 평상시에는 떨어져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서로 건너와서 끌어안고 그동안 맺혔던 회포를 풀다가 새벽에 닭이 울면 헤어져서 다시 제자리에 가 선다고 합니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여기에 큰 절을 짓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자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고 한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미륵사의 창건설화입니다.
창건설화와 상관없이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으며 자신의 고향인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우고 이 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하여 백제 중흥의 원대한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 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로 발휘되었을 것이고 또한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
미륵사는 동양 최대의 사찰로 무왕에 의해 창건되었고,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륵사지가 발굴되기 이전에는 백제 창건 당시에 세워진 미륵사지 서탑(국보 11호) 1기, 그리고 석탑의 북쪽과 동북쪽 건물들의 주춧돌과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당간지주 1쌍(보물 236호)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연구는 일본인들이 1910년 고적조사를 시작으로 남아 있는 석탑과 관련, 부분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品’자형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고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1974년과 1975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동쪽에 남아 있는 탑 자리가 목조탑(木造塔)인지 석조탑(石造塔)인지 밝히기 위하여 동탑지 부근을 발굴 조사하여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탑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일본인들이 주장한 ‘品’자형의 가람배치는 맞지 않고 동탑과 서탑이 있고, 그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북편에 금당(金堂, 법당)의 성격을 띤 건물이 하나씩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이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回廊)이 있어 동쪽은 동원(東院), 서쪽은 서원(西院), 중앙은 중원(中院)이라는 개념의 삼원(三院)이 병립된 ‘3탑 3금당’의 가람 형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륵사지의 발굴은 1980년에서부터 1995년까지 15년간 실시되어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막새 기와류와 기와의 등에 문자를 새긴 명문와(銘文瓦), 토기류(土器類) 그리고 자기류(磁器類)가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며 건물의 서까래 끝에 붙이는 녹유 연꽃무늬서까래 기와가 상당수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밖에 그 수는 많지 않지만 금속제품, 목제품, 벽화편, 토제편, 유리 및 옥제품, 석제품 등도 수습되어 종류 면에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륵사는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한 호국사찰로 세워졌던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미륵사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왕실사찰로 혹은 호국사찰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사찰이었을 것입니다.
연동리석불좌상과 태봉사삼존석불은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친근감이 가는 불상입니다. 연동리석불좌상은 거대한 광배가 특징으로, 배 모양의 거신광배(擧身光背)는 중앙에 원형의 두광(頭光)을 따로 마련하고 그 안에 16엽의 연꽃무늬를, 그 둘레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두광(頭光)을 새겼고 장식적인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일곱 구의 화불(化佛)을 모셔 놓았습니다. 삼국시대의 금동삼존불의 광배와 비슷한 점으로 미루어 제작 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되며 태안마애불과 서산마애불에 이어 나타난 백제의 단독 석불로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태봉사가 자리 잡은 뒷산은 마한의 왕 기준이 세 아들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고 전해져 태봉산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곳에 왼쪽 지장보살(地藏菩薩), 오른쪽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두 협시보살을 거느린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모셔져 있습니다.
쌍릉(雙陵)은 백제 말기(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약 150m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중 크고 북쪽에 있는 무덤은 ‘말통 대왕릉’ 또는 ‘대왕릉’으로, 남쪽에 있는 규모가 약간 작은 능은 ‘소왕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통’은 서동(薯童)과 같은 뜻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동(麻童)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무덤의 형식은 크기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백제 왕릉이 자리하고 있는 부여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과 같은 형식의 판석제 굴식 돌방무덤으로 7세기 전반기에 나타나는 백제무덤양식이며 백제 무왕의 미륵사지 창건이나 왕궁평성 조성과 관련지어 본다면 백제 무왕과 그 부인인 선화비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서 깊은 익산향교
익산향교는 금마에서 여산쪽으로 가다가 교동마을 입구에 있는 하마비(下馬碑)와 홍살문을 따라 약 200m쯤 떨어진 금마산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약 800평의 대지 위에 대성전(大成殿), 명륜당(明倫堂), 교직사(校直舍), 동재(東齋), 서재(西齋), 동무(東蕪), 서무(西蕪), 제기고(祭器庫) 등의 건물이 예전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향교의 뜰에는 약 400∼500년쯤 되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향교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며 향교의 정문 앞에는 익산의 동헌(東軒)자리에 있었던 관리들의 공덕비와 선정비 등을 옮겨다 세운 10여 기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익산향교는 조선 태조 7년 창건 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으나 그 중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다만 익산향교가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있게 되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현재의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익산향교는 중설위(中設位)로서 대성전(大成殿)에는 중국의 오성(五聖)과 십철(十哲), 육현(六賢)을 배향하고 동·서무에는 우리나라의 십팔현(十八賢)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용안향교는 고려시대 공양왕 3년(1391년)에 현재 위치에서 약 600m쯤 떨어진 용안면 중신리에 처음 세워졌던 것을 조선 태종 16년(1416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하며 이때 명륜당과 전사재, 동재, 서재, 양사재, 사마재 등의 건물은 현재의 대성전 아래 용안초등학교 교사가 있는 곳에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1927년경 불이 나 대성전만 남고 나머지의 모든 건물들이 타버리게 되므로 그 자리에 용안초등학교가 들어섰고 그 후 1961년 이곳 용안향교를 출입하는 유림들과 지방민들의 성금으로 현재의 명륜당을 다시 현 위치에 복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용안향교는 소설위(小說位)로 대성전에는 중국의 다섯 성인과 4현인, 그리고 우리나라의 18현인을 배향하고 있습니다(시간상 용안향교 대신 함열향교 들립니다^^).
여산동헌은 조선시대 여산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廳舍)단의 계단식 건물터 중 맨 위에 들어서 있는데, 조선시대 말기에 건축한 것으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식 목조건물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산동헌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한 조선시대 지방관청 건물의 하나입니다.
여산동헌에 있는 느티나무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여산동헌 주변에 7주의 대형 느티나무가 집중 분포되어 있어 동헌의 설치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태종대에서 세종대에 동헌이 설치될 때 식재되었을 것으로 보여 수령은 600여 년 정도로 추정됩니다.
고을학교 제7강은 4월 27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왕궁리유적지(유물전시관/백제왕궁터/왕궁리오층석탑, 10:00-11:30)-고도리석불입상(12:00)-쌍릉-익산토성-익산향교(13:00)-점심식사 겸 뒤풀이(순두부요리, 14:00)-익산미륵사지(유물전시관/서탑/당간지주, 15:00)-석불사연동리석불좌상-태봉사삼존석불(15:30)-함열향교-함라한옥마을-곰개나루(웅포, 16:30)-서울(19:30 예정)의 순입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7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고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 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 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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