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간첩죄 누명 40년 만에 벗었다…기쁘냐고?"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간첩죄 누명 40년 만에 벗었다…기쁘냐고?"

[인터뷰] 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 제작한 임진택·김수진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은 대학생과 교사들을 잡아갔다. / 하지만 나는 침묵했다. / 나는 대학생도 교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에게 왔다. / 하지만 주변에 나서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부릅뜬 눈, 무언가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 이내 배우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지하 1층 연습실을 울렸다. 독일 나치 정권에 대항한 목사 마르틴 니묄러의 시 '그들이 왔다(First they came)'를 각색한 장면이다.

▲연극 연습 중인 '상처꽃-울릉도 1974' 출연 배우들. ⓒ프레시안(최형락)

"이 장면은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

지난 3월 25일 오후, 팔짱을 끼고 연습 장면을 지켜보던 예술감독 임진택 씨는 눈을 감았다. 그는 과거 유신 시절 '민청학련-2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후일 이 사건이 조작으로 판명 나자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과 교과서에 이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 사건, 국가 폭력 사건으로 소개됐다. 피해의 상처가 모두 씻기진 않았지만, 알아주는 이들이 있기에 아주 섧지 않았다. 올해는 민청학련 사건이 정확히 40년 되는 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국가 조작 사건이 40년을 맞는다.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3주 전인 1974년 3월 15일, 중앙정보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을 발표했다. 울릉도와 경상북도 주민들 그리고 전북대 교수 등 무려 47명이 연루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다. 그중 세 명은 사형당했다.

명백한 사법 살인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동시대에 비슷한 사건으로 고통받았던 임 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 씨의 가슴이 무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40년이나 지난 이 사건을 지난해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개소식에서 처음 전해 들었다. 이후 최창남 목사가 쓴 책 <울릉도 1974>를 찾아 읽고,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무대 위로 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민청학련 사태에 가려진 셈이지요. 사람들의 무관심에 간첩이라는 편견으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많이 늦었지만, 그분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임진택 예술감독. ⓒ프레시안(최형락)

연극의 컨셉은 서사를 통한 '치유'다. 피해자들의 상처를 씻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국가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단지 과거의 일일까. 간첩 조작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뒤이어 터진 간첩 사건 또한 조작으로 의심받고 있다. 이토록 여전히 사회는 엄혹하다. 치유보다 더 적극적인 고발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넌지시 물었다.

"피해자분들이 올해 1~2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40년 만에 그렇게 바라던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도 피해자들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습니다. 무죄는 받았지만, 인생을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마음을 다스리고 정신을 치유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치유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회 정의가 실현돼야만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된다는 점을 연극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유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고발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피해자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에게 남은 상처도 깊다. 피해자 가족 중에는 지금도 치유 프로그램을 받는 이들이 있다. 이번 연극 대본을 쓴 극단 길라잡이 양정순 대표는 "당사자보다 가족들의 상처가 더 깊다"고 했다.

"자식 입장에서 어린 시절, 제일 부모 손이 필요할 때 아버지가 없었거든요. 한참 후 성인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왔는데 서로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서로 말 한마디 못하고 다가갈 방법을 모르는 거죠. 이게 바로 인간파괴 아닌가요. 그 피해는 상상도 못 합니다."

"울릉도 사건,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과 마찬가지"

임 씨는 이번 연극의 연출 파트너로, 재일교포 연출가 김수진 씨 손을 잡아끌었다. 김 씨는 재일교포와 일본인 합동 극단인 신주쿠양산박의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재일교포로서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이다. 전후 돈벌이에 전념하느라 재일교포 문화를 남기지 않은 1세대와 달리, 그는 재일교포 2세대로서 일본 내에서도 존경받을만한 마이너리티(소수자)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학에서 우연히 본 연극이 김지하 시인이 쓴 농촌계몽연극이자, 임 씨가 연출한 국내 최초의 마당극 '진오귀'였다. 당시 김지하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자재일교포들이 구명 활동 차원에서 이 연극을 일본 대학 무대에 올렸다.

▲김수진 연출가. ⓒ프레시안(최형락)

"운동만 하던 제가 이 연극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연극을 찾아보기 시작했죠. 이후 황석영 선생님이 대본을 쓴 '통일굿'을 임진택 선생님의 <마당극 연출론> 번역본을 보고 공부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는 재일교포 간첩 사건에도 관심이 많았다. 재일교포 사회에서 간첩 조작극은 흔한 일이었다. 북한과 남한 왕래가 자유로운 탓에 재일교포 유학생들은 간첩 조작 대상 1순위로 꼽혔다. (☞ 관련 기사 : "30년 걸려 벗은 간첩 누명, 유우성은 운 좋다") 울릉도 간첩 조작 사건의 수괴로 지목된 이도 이좌영이라는 재일교포였다. 그래서 그는 임 씨의 연출 제의를 받았을 때, '이건 재일교포인 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좌영은 이 사건으로 잡힌 게 아니었고, 그래서 일본에서는 조작이라고 언론에 발표까지 났습니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은 '수괴 없는 간첩 사건'인 거죠. 그리고 이 사건에 울릉도 사람들, 전북지역 사람들이 끼어 있는데, 울릉도 분들은 전라북도에 가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당시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이 심해지니까 두 사건을 합쳐서 터뜨려 버린 거죠. 민청학련에 인혁당 사건을 갖다 붙인 것처럼요. 너무나 억울한 일이죠."

김 씨는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40년간 감추고 있던 마음을 열어서 혼자가 아니란 걸 확인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씨는 이 연극을 통해 피해자와 가족들뿐 아니라 관객들도 마음이 정화되리라 자신했다. 그는 '상처꽃-울릉도 1974' 연출을 하면서 스스로도 치유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 대사가 김지하 시인의 '회귀'라는 시에요. 이걸 듣고 있으면 재일교포로서 혼란을 느끼며 살았던 저도 치유가 되는 느낌이에요. 60년 만에야 겨우 우리 조국에 돌아온 것 같아요.

피해자들, 그리고 저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 모두 많은 상처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양 국가 모두 자살 률이 굉장히 높죠. 관객 개개인이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지 모르지만, 연극을 보면서 살아가는 힘을 갖게 되면 좋겠어요."

ⓒ프레시안(최형락)

공연에는 사건 피해자들과 제작단을 격려하기 위한 응원군이 대거 출연한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 피해자들의 치유 프로그램을 맡은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의 이사장 함세웅 신부를 비롯, 사건 담당 변론을 맡은 이명춘 변호사, 진실화해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은 송기인 신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새정치민주연합 인재근 의원,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문성근 전 최고위원 등 60여 명이다.

이들은 오는 3일부터 두 달 간 공연한 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마당에서 다시 공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피해자들의 아픈 추억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임을 보여주는 것이 마당극의 정신일 테니까요."

서사치유연극 '상처꽃-울릉도 1974'
기간 : 2014. 4. 3 ~ 2014. 5. 31
장소 : 눈빛극장(대학로)
가격 : R석 3만 원, S석 2만 원, A석(현장판매) 1만 원
관람 등급 : 만 13세 이상
문의 : 극단 길라잡이(070-8158-3754)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