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직업인지라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조선일보>를 열심히 읽는다. 정치 기사를 읽다 문득 제목에 쓰인 '불(不)공천'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순간 정치적 문제와 관련해 너무 많이 인용돼 이제는 상투적 표현인 된 듯한 조지 레이코프 UC 버클리대 교수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말이 떠올랐다.
역설적이게도, 이래서 <조선일보>는 '일등신문'이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간에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른 게 기초선거 정당 공천 폐지 문제다. 야권의 새 정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문제를 통합의 명분이자, 이번 선거에 있어 주요한 의제로 삼았다. 안철수 공동대표는 3월 30일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무공천 약속을 한 후보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시기를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요청한다"며 박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청와대와 여당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다.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기초선거 정당 공천 폐지 입장을 고집하면서, 이는 야당 내부 문제로 국한하면 현 지도부의 운명, 더 나아가서는 이를 명분으로 통합한 정당의 앞날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핵심 의제가 됐다.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은 정당 공천을 유지하고, 야당만 홀로 이를 폐지할 경우 선거는 여당에 매우 유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다시 용어의 문제로 돌아가자. 현재 야당을 포함한 대다수 언론은 이 문제와 관련해 '무공천'이란 표현을 쓰고, <조선일보>는 '불공천'이라고 쓴다(안철수 대표 등 특정인의 말을 인용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무공천'이라 쓴다. 통합 전 안철수 대표에게 비판적이었으며 공천 폐지를 반대하는 박지원 의원도 '불공천'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일까? 여기서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말이 뜻하는 정치 프레임의 문제를 들이댈 수 있다. (말로 먹고 사는 일인 만큼, 언론은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고심해서 선택한다. 정치인도 그런 면에선 똑같다.)
'무공천'이란 단어는 기왕에 있던 공천제도를 없애자는 얘기다. 앞서 안철수 대표도 지적했듯이 기초 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도를 없애겠다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에서 약속했던 일이다. 따라서 '무공천'이란 단어엔 자동적으로 '박근혜 대선 공약'이 따라 나온다.
반면 '불공천'이란 단어는 공천제도는 그대로 있는데 이를 하지 않는 행위를 뜻한다. 즉, 공천제도 자체는 거론 대상이 아니다. 여야가 합의했던 사항이 아니라 야당이 '새 정치' 차원에서 알아서 하는 일이다. ‘박근혜 대선 공약’을 지워버린 용어인 셈이다. 대체적으로 여권의 전략과 <조선일보>의 관점이 일치했던 전례를 따라볼 때 야권에겐 불길한 사인이다. 3월 어느 시점에선가 <조선일보>가 '불공천'이란 용어로 갈아탄 것을 보면 안철수 대표의 "약속을 지키자"는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그럴 맘이 크지 않다고 읽어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홀로 무공천=불공천'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왜? 여당이 안 하겠다는 일을 야당이 밀어붙이는 게 가능한 경우는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가 있을 때다. 그러나 '기초선거 정당 공천 폐지'는 그렇지 못하다. 당장 이해관계가 걸린 선거 출마자들의 빗발치는 당내 반발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이게 일반 유권자들에게 절실한 문제인가? 여야 합의로 정치개혁 차원에서 알아서 공천을 폐지하겠다면 모르겠지만, 국민들은 이보다 훨씬 더 절박한 문제로 힘들다. 기초연금제, 경제민주화 등도 박근혜 대통령이 뒤집은 대선 공약이다. '무공천' 문제만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뒤집은 다른 대선 공약에 비해 '무공천' 문제는 일차적으로 '니들(정치인들) 만의 리그'에 속하는 얘기다. 더 커지고, 더 강해지고, 그래서 '새 정치'를 하겠다는 야당이 이렇게 결기를 품어야할 문제라면, 진정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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