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프레시안>은 정체성이 중요한 매체로, '진보냐, 보수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많은 대답을 요구받는 것이 이곳에 실리는 글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다. 둘은 '진보적 가치를 지향한다면서 소수의 좌파 엘리트들에게만 소구한다'는 식의 비판으로 겹쳐지기도 한다. 책을 다루는 '프레시안 books'는 그 중에서도 장벽이 높다는 평가를 들으며, 나 역시 이런 지적에 동의한다. 하기야 책 자체가 삶과 대비되는 짝패로 지어진 운명을 타고났으니 말이다.
어려운 것은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문제다. 예를 들어 애초부터 넓은 독자들을 겨냥하지 않은 학술 서적들이 있고, 그것과 그것이 다루고 있는 대상의 맥락은 전공자가 구사하는 학술의 언어가 아니면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전공자에게 청탁하며 "독자들을 생각해 쉽게 좀 써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참 공허한 말이다. 그의 '쉬움'을 판단할 나의 이해도가 곧 독자의 이해도는 아니다. 또 구체적 예를 동원한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제대로 도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 역시 세속의 사람인 '전공자' 입장에서는, 익명의 덩어리인 독자보다는 자신이 속한 각각의 학계의 실명으로 존재하는 누군가를 상정하는 편이 더 수월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렵다는 느낌, 책상물림이라는 지적은 이렇듯 수신인이 내가 아니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학자들의 강연이 끝난 뒤 질의응답에서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내가 요즘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코멘트해 달라 같은, '나'를 주어로 한 질문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체계화된 이론을 '나'에 대한 이야기로 바꿔 듣기를 바라고 있다고. 그들에게 시급한 것은 권위 있는 이론에 대한 저 사람의 해설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민'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개념을 써도 어렵게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강연 열풍의 뒷면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자신들의 존재증명이기도 한 사유의 쓸모와 전달법에 대해 고민과 유혹에 빠질 법하다. 누구나 속해 있는 '사회'를 학문 대상으로 삼는 사회학자들은 더욱 복잡한 난관에 처해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이 해결하기 원하는 고통과 상처를 놓고 말하자면,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조가 문제라고 설명하는 어법을 지녀 왔다. 그 듣는 자리에 구체적 개인은 별로 크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학자 노명우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연에서 자신보다 세상 경험이 풍부해 보이는 노인 청중들을 바라보며 당혹한다. '사회학'이 저들의 삶의 고민과 연관되어 있을까? 그는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세상으로서의 사회'"와 "학자들의 폐쇄적인 아카데미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로서의 사회'"로 분열되어 있다고 말한다. 학자들이 산 속에 처박혀 선비처럼 지내며 동사무소에서 인감증명서 하나 못 떼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 역시 세속의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학문적 결과들의 순환 과정을 그가 속한 폐쇄 환경 속에만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람들은 엄밀한 과정을 거쳐 얻어진 통계보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 '페친'이 남긴 감상을 더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실제로 겪은 것이 훨씬 더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그것이 '경험이라는 경험'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본격적인 분석에 인용되어 재생산되지는 않을지라도, 다시 이야기되는 것과 다시 쓰이는 것의 밑바탕에 더 깊게 깔린다. 그 사이 사회학적 분석은 체스판 위의 말들처럼 전락했다. 사회학자들은 세속에서 웅웅대는 '모스키토 음'을 외면하면서 "직업상의 업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기능적 속성"에만 열심히 복무하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세속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이분법이 있다. 오래된 테마인 개인과 사회다. 그가 세속을 탐험하고 일상 언어를 듣겠다고 했을 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사정과 신세, 즉 '내 얘기'를 어루만지겠다는 의도일 것 같지만 그는 결코 멘토들 같은 2인칭 화법을 쓰지 않는다. 개개인의 애절한 사정과 신세 한탄을 들어주고 긍정해 주는 것이 사회학은 아니다. 경험에서 나오는 분노나 애틋함은 소위 진정성을 획득할지라도 휘청거리는 술주정에 불과할 뿐이다.
그 구도는 다시 치유의 방법론으로 전환된다. 그의 책은 '힐링'이되 한국 사회에서 유행과 함께 먼지 묻은 '힐링', 즉 개인의 구원은 아니며, '좋은 사회 없이 좋은 삶도 없다'고 말할 때의 그것이다. 위로의 환등상을 끄고 고통스럽겠지만 리얼리티와 마주하라는 주문, '타락한 처세술'과 '좋은 삶을 위한 처세술'이라는 구도 등도 추가할 수 있겠다.
노명우는 이런 이분 구도 속에서 스스로를 중재자 혹은 매개자로 자리매김한다. 또 하나의 짝패인 '책'(<세상물정의 사회학>은 한 꼭지마다 책 1~3권이 함께 기재되는 '서평'이기도 하다.)과 세속의 자극을 통해서 말이다. 한국에서 모텔과 교회는 죄와 속죄를 치르는 '토탈 패키지'라는 술자리 농담에 무릎을 치고는 막스 베버, 필 주커먼, 발터 벤야민의 책을 읽는다. ('자본주의가 종교를 만날 때') 재미있고 그럴듯한 비아냥거림이나 치열해서 감정이입하기 쉬운 세상 한탄이 놓치고 있는 섬세한 결을 포착하고, 거기에 체계를 부여하고자 한다. 한편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사회학의 운명이라는 말을 통해, 개인이냐 사회 구조냐 하는 진부한 물음에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사실 이 중재자의 작업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자처한다고 말하기보다 '되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명한 사회학 이론들은 진공 상태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세상으로서의 사회'와 '세계로서의 사회' 사이에는 중력의 법칙이 작용했고, 이론과 현실은 시소처럼 오가며 서로를 살찌웠다. 그러나 학문이 전문화되고, 이론이 맥락을 잃고 수입되고, 한국 사회학자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데 게을렀던 동안, 무엇보다 그들이 세속에 찌들어 학문적 용기를 잃은 동안 두 세계 사이에 다리 놓는 작업은 중단됐다.
이러한 비판은 자주 들려왔던 것이며 '저잣거리에서의 사유' 같은 것도 이제는 진부해진 콘셉트다. 그러나 <세상물정의 사회학>이 개중 신선하게 읽히는 것은 잘 쓰인 문장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작가 정체성의 이분 구도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세속인이기도 하고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텍스트 내부에서 1인칭으로 나타나거나 억지로 자기 고백을 쥐어짜내지 않지만, 아마 그의 비판이나 연민의 시선이 가닿는 곳곳에 '세속인 노명우'의 생태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눈, 서술하는 눈은 끝까지 사회학자의 그것을 지킨다.
많은 학자들이 이런 유의 텍스트에서 부러 자신의 학자적 정체성을 깎아내리며 '보통 사람'을 치켜세우고 그들에게서 배운다는 식의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곤 하는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에 품위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을 때, 역설적으로 저자의 자아는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내겐 <세상물정의 사회학>이 제목에서 표방한 '사회학'의 야심보다, 난관에 봉착한 사회학자(=세속인)인 노명우를 다룬 묘한 자전이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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