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화는 지난 대선을 관통한 화두였습니다. 이 화두를 잘 풀어가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주요 과제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제 민주화에 관한 논의는 무성하지만 이뤄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갈 길은 멀지만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인 경제 민주화를 위해 다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할 때입니다.
이에 <프레시안>은 '경제 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자문위원회와 공동으로 경제 민주화의 오늘을 짚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기획 '경제 민주화 워치'를 진행합니다. '경제 민주화 워치' 칼럼은 매주 게재됩니다. <편집자>
박근혜 대통령은 (프레임) 정치를 참 잘한다. 그래서 지지율도 여전히 높은 것 같다. 먼저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조하여 국민적 공감을 불러일으킨 후, 정상화 차원에서 공공부문을 개혁하고 규제를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규제는 원수와 암 덩어리고,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는 일에서 정상화의 개혁은 출발한다고 역설한다. 이쯤 되면 공공부문 개혁에 반대하기가 어려워 질 듯하다. 사람들은 공공부문과 규제를 생각할 때면 으레 비정상과 암 덩어리를 생각하게 된다. 프레임에 걸린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화를 위해 공기업 부채 축소방안을 몰아붙이고, 이윤 추구에 방해가 되는 규칙과 제도들을 차례로 제거해 가면 된다. 잠시 접어 두었던 ‘줄푸세’(세금과 정부규모는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가 전면으로 등장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은 대선공약과 함께 사라진다. 정부여당이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데 1년이 걸린 셈이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서 제시된 공공부문 개혁의 두 축은 사업조정, 민간자본 활용, 자산 매각, 인건비 절감 등을 통해 부채를 감축하고, 공공기관 간 경쟁체제와 공공서비스의 민간 개방으로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부문 개혁의 핵심은 공공기관의 민영화이다. 물론 공공기관의 과다한 부채는 국민 부담으로 귀착되기 때문에 부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해법은 공공기관의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영효율성을 개선하는 것이어야 한다. 적절한 규제 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민간자본의 투자를 허용하고 경쟁원리를 도입할 경우 공공요금은 오르고 서비스의 질은 나빠질 수 있다. 재벌 특혜와 국부 유출은 또 다른 차원의 부정적 단면이다.
그럼 민영화의 폐단을 피하면서 공공기관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들이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낙하산 인사와 재정사업의 공기업 떠넘기기를 방지하고,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공공기관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경영정보의 투명한 공개와 경영 평가의 공정성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2008년 이후 공기업 부채의 증가는 주로 4대강 살리기, 경인아라뱃길, 보금자리주택 등 재정사업의 공기업 떠넘기기, 무리한 해외자원개발과 같은 정책실패, 공공요금의 산업 특혜 등으로부터 초래되었다. 정치개혁과 공공부문 지배구조의 개선 없이 공기업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개혁이라고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고 읽자”고 제안했다. 물론 생산과 소비 활동을 불필요하게 제약하는 규제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기술 발전과 경제 환경의 변화, 정책 목적의 달성 등으로 더 이상 존립 근거가 상실된 규제는 과감하게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자리 창출만이 규제개혁의 기준일 수는 없다. 경제적 규제와 사회적 규제가 충돌할 경우 공익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과 환경을 담보로 하는 일자리 늘리기나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규제 철폐를 원하지 않는다. 환경 파괴는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보장할 수 없고, 경제적 불평등은 내수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건의료와 교육 등 공공성이 큰 서비스의 경우 영리법인화가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이다.
고용창출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투기자본과 재벌집단의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행위를 차단하는 보다 적극적인 규제가 필요하다.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 완화는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주범이었고, 부실한 금융감독시스템은 2011년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초래했다. 맥쿼리와 같이 규제받지 않는 사모펀드에게 공공인프라는 단지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최후의 고용자로서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고용 없는 성장시대에 보다 적합한 조치이다.
‘철의 여인’이라 불리는 마거릿 대처의 별명은 TINA이다. 총리 시절 그녀가 반대에 부딪힐 때마다 “다른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고 강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녀의 재임기간에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수많은 규제를 폐지한 결과 공공요금은 크게 오르고 서비스의 질은 떨어졌으며, 공익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대규모로 해고되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캘리포니아의 전력산업에 대한 규제 폐지로 전기요금은 급등하고 곳곳에서 정전이 발생했지만, 정작 전력회사들은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1977년 브라질 연방정부가 전력회사인 리우 라이트를 외국회사에 매각한 이후 해고와 요금 인상의 대가로 주주의 배당금과 주가는 큰 폭으로 뛰어올랐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공공기관의 민영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공공부문 개혁의 실체가 밝혀지더라도 일부는 여전히 정상화의 프레임에 갇혀 진실을 외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1999년 4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노동기구(ILO) 회의는 공적 책임성,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 사적 독점으로 전환된 공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 필요성 등을 민영화와 구조조정의 주요 교훈으로 채택하였다. 최근 대한의사협회와 정부의 의정협의에서 보듯이 정작 공공부문 개혁의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인 시민들은 논의 과정에서 배제되어 있다. 비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사회적 논의를 정상화하는 조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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