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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상처가 있는 여인, 그녀를 스토킹하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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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덜미에 상처가 있는 여인, 그녀를 스토킹하는 작가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에도가와 란포의 <음울한 짐승>

1.
일본은 유독 미스터리 장르에 강하다. 과거도 그러했고 현재 또한 그렇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가장 이채로운 변화를 일궈낸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모든 분야에 잔뿌리를 내리는 미스터리 장르의 특성상 그 이유를 무 뽑듯 단번에 뽑아들어 살피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들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서구 소설의 유입 시기가 상당히 빨랐다. 에도 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란가쿠(蘭学)는 번역 문화로 가지를 뻗게 되는데, 이 전통은 메이지 시대 후기 신문 소설의 인기로까지 이어졌다.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번안 작가였던 구로이와 루이코(黒岩涙香, 1862~1920)는 평생 동안 100여 편이 넘는 다양한 해외 소설을 소개했고, 그중에는 쥘 베른이나 에밀 가보리오, 안나 캐서린 그린과 같은 장르의 선조 격인 작품도 포함돼 있었다. 원서를 쭉 읽고 원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멋대로 각색한 번안 소설이라지만, 덕분에 일본 독자들은 다양한 장르의 해외 최신작들을 큰 시차 없이 접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꼽자면 일본 미스터리 장르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이름마저 에드거 앨런 포와 비슷한 에도가와 란포는 창작과 비평은 물론 대중화까지, 그야말로 일본 미스터리 장르 전반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본명은 아니다. 히라이 다로(平井太郎)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에 매료돼, 존경의 의미를 담아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2.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읽는 건 곧 작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는 작가론적인 접근 방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독특한 기질을 가진 작가였고, 그 특유의 성향은 미스터리라는 장르와 만나 기묘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 에도가와 란포(1894~1965). ⓒ출처 Wikimedia Commons
회고록 등에서 털어놓은 고백에 따르면, 란포는 어린 시절부터 홀로 사색과 망상에 빠져 있는 일이 많았다. 자신만의 단단한 세계는 곧 모든 사회적 관계의 부정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그는 위선적인 세상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에도가와 란포가 번안 소설에 탐닉하고 소설 쓰기에 매료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기'는 그에게 진실한 밤의 꿈을 꾸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며 또 그 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으리라.

와세다 대학 졸업 이후 무역회사나 조선소, 헌책방 등을 전전하던 에도가와 란포는 1923년 암호 풀이를 다룬 '2전동화'를 잡지 <신청년>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초기 에도가와 란포의 작풍은 어디까지나 단편 위주의 충실한 미스터리였다. 관음적인 시선, 가학적인 태도, 기괴한 미의식 등 특유의 탐미적인 성향이 비집고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서구 미스터리 영향 아래 있었고 스스로도 간절히 추구한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기대하던 것과 달랐다. 그들은 에도가와 란포가 공들인 '본격' 미스터리보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변격'의 세계에 매료됐다. 대지진(1923년)과 금융 공황(1927년)을 차례로 겪은 암울한 사회 분위기도 이런 퇴폐적인 성향을 부추겼다. 에도가와 란포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작품을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늪에 빠졌고 결국 심한 자조감에 시달렸다. 1926년 발표한 <난쟁이>는 일종의 도화선이 됐다. 작품은 크게 성공해 영화까지 만들어졌지만, 에도가와 란포는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유랑을 떠난다.

3.
일 년 반 정도의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에도가와 란포는 당시 요코미조 세이시가 편집장으로 있던 잡지 <신청년>에 중편 <음울한 짐승>(1928년,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김은희 옮김, 도서출판두드림 펴냄)에 수록)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며, 일본 초기 미스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로 여겨진다.

▲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도서출판두드림 펴냄). ⓒ도서출판두드림
이야기는 '나'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건전하고 상식적인 탐정소설 작가인 나는 어느 날 목덜미에 기묘한 상처가 있는 매력적인 여인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실업가인 오야마다 로쿠로의 부인 오야마다 시즈코였는데, 특히 나의 탐정소설을 좋아했다. 나는 곧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절친한 사이가 된다.

몇 달 후, 시즈코는 나에게 근심을 털어놓는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이상하게 집착했던 히라타 이치로가 오에 슌데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시즈코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복수심이 끈적이는 불쾌한 편지에는 마치 천장에서 바라본 것처럼 시즈코의 은밀한 일상이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오에 슌데이는 '나'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탐정소설 작가로 1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했다.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어둡고 병적이었지만 기이한 매력을 풍기고 있어 남다른 인기가 있었다.

상대에 대한 묘한 경쟁심과 시즈코를 향한 연민을 느낀 나는 오에 슌데이를 찾아 나서지만, 여전히 그 흔적은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시즈코의 남편을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가 다시 도착하고, 이틀 만에 오야마다 로쿠로는 가발을 쓴 채 벌거벗은 기이한 모습으로 강에서 발견된다. 불쾌하게 퍼져만 가는 오에 슌데이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사건을 추리하면서도 마성과도 같은 시즈코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본명마저 히라이 다로와 비슷한 오에 슌데이는 당연히 에도가와 란포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나'는 그와 대척점에 있는 동시대 작가 고가 사부로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등장인물로 내세우고 엽기적인 자신의 작품 속 상황마저 가져온 에도가와 란포는 급기야 자신의 존재마저도 지워버리려 한다. 특유의 기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는 에로틱한 조명 아래 음울하게 빛나며, 수수께끼는 작품의 끝 너머까지 이어져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변격'과 '본격'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춘 <음울한 짐승>은 확실히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정점이라 할 수 있다.

4.
▲ <외딴섬 악마>(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동서문화사
<음울한 짐승> 이후 에도가와 란포는 통속성이 강한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고, 절필도 습관처럼 반복됐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평론이나 아동용 탐정소설로 방향을 바꾸게 되는데, 마침내 고된 창작의 굴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접어들면서 에도가와 란포는 적극적으로 미스터리 장르의 대중화에 앞장선다. 잡지 <보석>을 발간해 신인을 발굴하고, 현 일본추리작가협회의 전신인 일본탐정작가클럽의 창립을 주도했으며, 사재를 털어 에도가와 란포 상을 제정한 점 등은 여전히 일본 문학사에 위대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1920년대는 서구 미스터리가 나름의 규칙성을 갖추고 완결된 형태로 굳어가는 시기였다. 비록 다른 문화적 환경 아래 있었다지만, 에도가와 란포가 미스터리 장르에서 보여준 파격은 당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미스터리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일본 미스터리를 간략하게 회고하며 '꿈꾸는 것과 합리적인 것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요소가 양립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계속 꿈꿀 수 있었던 것도, 양립할 수 없는 두 요소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에도가와 란포 때문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말은 아니다. 그가 남긴 밤의 꿈들은 착실하게 후대로 계승됐으며 일본 미스터리의 이채로운 빛으로 남게 됐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 <혈액형 살인 사건>(고가 사부로 지음, 박현석 옮김, 현인 펴냄). ⓒ현인
<혈액형 살인 사건>(고가 사부로 지음, 박현석 옮김, 현인 펴냄)
일본 미스터리 역사에 '본격'이라는 용어를 선물한 고가 사부로의 단편집. 에도가와 란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등단한 고가 사부로는 란포와는 달리 철저하게 과학적인 미스터리를 추구했다. 단편집은 다양한 기법과 본격 미스터리의 규칙이 돋보이지만, 현대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라면 다소 '올드'해 보일 수도 있겠다.

<스릴의 탄생>(유메노 큐사쿠 외 지음, 이진의․임상민 옮김, 시간여행 펴냄)
퍼블릭 도메인 작품을 접할 수 있는 사이트로, 영어권에 '구텐베르크 프로젝트'가 있다면 일본에 '아오조라 문고'가 있다. <스릴의 탄생>은 아오조라 문고에서 장르 성향이 강한 작품을 선정해 모은 흥미로운 단편집이다. 히사오 주란, 유메노 큐사쿠, 고가 사부로 같은 일본 장르 소설의 발아 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외딴섬 악마>(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문운 옮김, 동서문화사 펴냄)
서른도 채 안 된 젊은 나이에 백발이 돼버린 주인공.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밀실과 수많은 사람 앞에서 일어난 두 건의 불가능 살인, 상처받은 마음에서 자라난 증오와 악의 그리고 섬과 기괴한 피조물까지. <외딴섬 악마>는 에도가와 란포의 모든 작풍이 한데 녹아 있는 장편으로 그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텍스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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