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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으면 빨갱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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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으면 빨갱이'라고요?

[편집국에서] 대통령의 말이 걱정스럽다

말 잘하면 ‘빨갱이’라고 했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입만 살았다’라는 표현은 비난이다.

‘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비난하면서도, 말이 아니라 몸으로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부모들에게 물어보라. 자식이 몸으로 일하는 직업을 갖기를 바라는지. ‘그렇다’라는 대답은 듣기 힘들 게다.

우리네 일터 대부분이 그렇다. 현장에서 땀 흘리는 사람보다, 오너 옆에서 입에 발린 말로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 더 좋은 대접을 받는다. 제품을 만들고 파는 사람보다, 그럴싸한 언변으로 권력층에 로비를 해서 문제를 무마하는 사람이 윗자리를 차지한다. 아름다운 말로 주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면서, 정작 본인 행실은 개차반인 경우도 있다.

이러니,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욕을 먹을 만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껏이다. ‘말이 많은 사람’에 대한 지나친 적대감은, 자칫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권력에 대한 비판, 토론, 논쟁, 타협 등은 모두 말로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쓰이는 ‘말’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마나 한 말’,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 더 많다. 그렇다고 해서, ‘말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그럼, 민주주의가 말라죽는다. 똥이 더럽다고 해서, 똥구멍을 막아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먹은 게 똥으로 나와야, 사람이 산다. 그렇게 나온 똥은 거름이 돼서 먹을거리를 키운다. 그게 다시 사람 입에 들어간다. 자연의 질서다. 마음에 품은 생각은 결국 말로 나와야 한다. 그게 막히면, 사람이 죽고 세상이 무너진다.

다만, 똥은 장소를 가려서 눠야하듯, 말도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는 있다. 아무 데서나 막말을 하면 안 된다. 똥의 질감이 갑자기 변하면, 건강에 이상신호다. 말이 갑자기 변해도 그렇다. 말이 험해진다면, 정신에 이상신호가 걸린 셈이다.

현장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권력자 비위 맞추는 재주 하나로 승승장구 한 이들을 많이 봐 왔던 탓에, 우리는 대개 말문을 닫고 사는데 익숙하다. 쓸데없이 말 많이 하면, 간신배 취급당할 수 있다. 한가한 말로 비판을 하기엔, 모든 일이 너무 급하게 흘러간다. 또 길고 지루한 말을 들어주기엔, 우리네 일상이 너무 고단하다. 이렇게 말문을 닫고 사는 사이, 속에 담긴 말은 단단히 썩어간다. 그러다 가끔 밖으로 쏟아지면 악취가 난다. 누군가에게 폭력이 된다.

군사정부 시절의 지도자들이 종종 그랬다. 평소에 과묵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했다. 말 많은 사람을 싫어했고, 비판이나 논쟁은 방해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가끔 폭탄주 몇 잔 마시고, 속에서 썩어가던 막말을 쏟아낸다.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놓고선, 다음날 아침이면 깨끗이 잊어버린다. 그리고는 ‘화끈한 성격’, ‘뒤끝 없는 성격’이라며 자화자찬한다.

과거 운동권들도 이점에선 판박이다. ‘말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면서, 후배나 동료의 말문을 틀어막는 경우가 흔했다.
요즘 대통령의 말이 걱정스럽다. 갑자기 거칠어졌다. 정부 규제를 가리켜 ‘원수’, ‘암 덩어리’라고 했다.

일단, 논리에 맞지 않는다. 규제는 늘 이중적이다. 기업의 이윤추구를 가로막는 규제도 있고, 노동자의 정당한 파업을 막는 규제도 있다. 투자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규제도 있고, 시민의 정당한 집회, 시위 요구를 막는 규제도 있다. 전자나 후자나 다 공권력이 집행하는 규제다. 전자만 풀고 후자는 계속 묶어둔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건 법치주의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죄 없는 누군가에게 모욕이 된다는 점이다. 기업이나 이익집단의 끈질긴 로비에 넘어가지 않고, 정당한 규제를 집행했던 공무원도 많다. 규제를 싸잡아 욕하는 대통령의 발언에, 이들은 모욕감을 느낀다.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건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안철수, 문재인 등 야당 지도자들의 말 역시 걱정스럽다. 너무 과묵하다. 요즘 정치권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큰 일이 터진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명하고, 설득하고, 비판하고, 토론하고, 논쟁해야 할 정치 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장에 가서 기계를 돌리거나, 밭을 갈라고 하지 않는다. ‘말’이 그들이 하는 노동의 연장이다. 그런데 연장이 지금 놀고 있다. 어쩌다 내뱉는 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연장이 녹슬었다.

오늘(20일), 대통령이 그간 말 많았던 규제에 대해 ‘끝장토론’을 한다고 한다. 이왕 열린 판이니, 속 시원한 말이 거침없이 쏟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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