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미국의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인 존 W. 다우어 MIT 명예교수의 ‘샌프란시스코 체제: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전문 번역한 것이다. 이른바 ‘동아시아 패러독스’, 경제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상호의존이 심화된 동아시아 지역이 군사안보적으로는 가장 취약하며 불안정한 원인은 무엇일까? 다우어 교수는 그 근본 원인을 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찾는다.
전쟁으로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고 한중일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집단적 평화를 추구했어야 할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이 미국의 대소, 대중 봉쇄라는 냉전 전략 아래 종속됨으로써 완전한 과거 청산과 진정한 평화 만들기라는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을 대소, 대중 봉쇄를 위한 하위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 청산을 도외시한 채 일본의 재무장을 촉구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안보 질서의 불안정을 초래했다고 다우어 교수는 지적한다. 게다가 일본 군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과 중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상에서 배제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집단적이고 진정한 평화는 애초부터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미 군사력에 바탕을 둔 팍스아메리카나는 동전의 먕면으로서‘평화 지키기’와 ‘전쟁 만들기’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것이다.
다우어 교수는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남긴 8개의 부정적 유산으로 (1) 오키나와와 ‘2개의 일본’ (2) 일본과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의 영토분쟁 (3) 일본 내 미군 기지 (4) 일본의 재무장 (5) ‘역사문제들’ (6) (미국의) ‘핵우산’ (7) 중국 봉쇄와 일본의 아시아로부터의 이탈 (8) 일본의 ‘예속적 독립’ 등을 꼽으면서 이들 부정적 유산이 현재 동아시아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1965년 미국의 강권에 의해 국교를 회복했고, 중국과 일본은 1971년 닉슨의 전격적인 대중 화해 덕택에 1972년 관계를 정상화했으나 위에 말한 8개의 부정적 유산, 그리고 각국의 국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여전히 동아시아 국가들의 집단적 평화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특히 1972년부터 2000년대까지 중국과 일본은 과거사 문제나 영토분쟁은 제쳐둔 채 경제교류를 심화시킴으로써 상호 이익이 되는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1990년 이후 일본의 상대적 쇠락과 중국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2008년 이후 양국 간의 국력 차이가 역전, 심화되면서 중일 간의 대립과 갈등은 더욱 격화되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이후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중국은 서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자신들의 핵심 국익이 달린 지역에 대한 미 군사력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항모 격침용 탄도미사일 개발 등 ‘비대칭적 전력’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발흥해 대해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하고, 중국의 ‘지역접근 저지 전략“을 무력화사키기 위해 ’공해전(Air-Sea Batlle)‘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나아가 갈수록 소진되고 있는 미국의 군사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의 적극적인 안보 기여를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2010년대의 동아시아 지역은 미·일 대 중국의 군사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중국과의 일전을 불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적지 않다. 예컨대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지난 1월 3일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내 전략가들 중에는 미·중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크로우 학파’와 미·중 간의 이익을 조화사킬 수 있다는 ‘샹하이 학파’가 있는데, 이중 전자의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미국이 중국과의 군사 충돌까지를 상정하고 있지는 분명치 않다면서 미국으로서는 군사충돌을 피하면서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유지하는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진단했다.(☞ 기사 보기 : ‘군국주의’ 자처하는 아베, 日 국민과 분리 대응해야)
반면 지난해 가을 3개월간 미 하버드대학에 체류하면서 조셉 나이 등 미국의 리버럴 학자들과 대화를 했던 김영호 전 유한대 총장은 올해 1월 1~3일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의도를 군사적이라고만 파악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며 미국에는 자유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편 다우어 교수는 최근 들어 “덜 대결적인 동아시아의 신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구호로 “권력 분점”이란 말이 제기되고 있다면서, “아시아 협조 체제(Concert of Asia)" "태평양 공동체” “팍스 퍼시피카(Pax Pacifica: 팍스 아메리카나에 반대되는 말)” 등의 구호에서 “권력 분점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권력 분점의 성공 여부는 비정부 민간 네트워크의 확장 여부에 달려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상호의존과 상호 이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기업 간의 촘촘한 그물망은 시민단체(NGO)와 다국적기업, 그리고 관광과 대중문화와 같은 문화 및 교육 분야의 교류까지를 아우른다. 이들이야말로 풀뿌리 차원 협력과 통합의 기반이자, 극단적 민족주의와 호전적 대립에 대한 해독제”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이미 상당 부분 확립돼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는 어찌하여 이들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극단주의와 비이성의 목소리를 물리치는 데 실패했는가? 그들은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가능한가?”라며 민간 분야 교류를 통해 평화롭고 안정적인 동아시아 신질서를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
이 글을 앞으로 9회로 나누어 게재한다. 이 글은 2013년 1월에 작성된 것으로 올해 1월 일본 NHK 출판 신서로 일역돼 나온 <전환기의 일본: 팍스아메리키나인가? 팍스 아시아인가?>(호주 개번 매코맥 교수와의 공저)의 제1장에 수록돼 있다. 영어 원문은 <재팬 포커스> 2월 24일자에 실려 있다.(☞바로보기) <편집자>
1.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뒤틀린 시작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이름은 1951년 9월 8일 체결된 두 개의 조약에서 명명된 것이다. 이 조약들을 통해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하나는 2차대전 때 맞서 싸웠던 일본과 48개 ‘연합국’ 간에 맺어진 다자간 평화조약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과 일본 양자 간 안보조약으로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에 “일본 및 인근 지역에 군사력을 보유할” 권리를 허용했으며,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지지하고 촉구했다. 두 개의 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됐으며 이날,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이 조약들과 관련해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첫째는 그 시기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될 당시 일본은 미국 점령하에 있었으며, 냉전은 극성기로 치닫고 있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번째 핵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과의 핵무기 경쟁이 시작됐고, 같은 해 10월 1일에는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련이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고, 6월 25일에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즉각 미국이 이끄는 유엔군이 전쟁에 개입했다. 4개월 뒤인 10월 말에는 중국군이 개입했다. 북한군을 물리친 미군이 38선을 넘어 중국 국경지대까지 밀고 올라오자 중국지도자들은 위협을 느낀 것이다. 6.25전쟁은 1953년 7월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 전쟁이 교착상태에 있는 동안인 1951년 9월에 (다자간) 평화 및 (미·일) 안보 조약이 체결됐다.
조약 체결 시기만큼이나 중요하지만 덜 주목받고 있는 사실은 샌프란시스코 체제에 의한 평화가 ‘분리된 평화(separate peace)’라는 점이다. 당연히 강화협상에 참여했어야 할 국가들이 배제됐기 때문이다. 중국 본토의 공산 정권은 물론이고 대만으로 망명한 국민당 정권도 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상에 초대받지 못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이에 이은 미국의 참전(1941년 12월)보다 10년 앞선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중국은 일본의 침략과 점령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은 핵심 당사자라는 점에서 이는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남한과 북한도 배제됐다. 한반도 주민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와 징병, 징용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데도 말이다. 한편 소련은 강화협상에 참여했지만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중국 공산 정권이 강화협상에서 배제된 것, 그리고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면서 자국의 냉전 전략에 활용한 것 등이 그 이유였다.
결국 이처럼 주요 당사국들이 배제된 ‘분리된 평화’는 일본을 가장 가까운 이웃국가들인 중국과 한반도로부터 떼어놓는 배제적 시스템의 단초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수개월 동안 미국은 일본에 대해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 별도의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그리하여 국민당 정권을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로 사실상 인정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미국의 요구를 듣지 않을 경우 미 의회가 평화조약을 비준하지 않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이 협박이 통하지 않자 미국은 미군의 일본 점령이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결국 일본은 굴복했다. 1951년 12월 24일의 저 유명한 ‘요시다 각서(요시다 시게루 당시 일본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협상의 미국 측 대표인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보낸 서한)’가 그것이다. 결국 1952년 4월 28일 일본과 대만 국민당 정권 간의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그리고 같은 날,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및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됐다.
1956년 10월 19일, 소련과 일본은 공동성명을 통해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하지만 양국은 평화조약을 맺지는 못했으며 소련과 일본 간의 (북방영토 또는 남쿠릴열도의 귀속에 관한)영토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중국과 일본은 1972년 9월 29일의 공동성명을 통해 국교를 회복했으며, 1978년 8월 12일이 돼서야 평화 및 우호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의 일본 점령으로 한 편의 일본과 다른 편의 중국 및 한국이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이 가져온 장기적 결과는 매우 유해한 것이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서의 서독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들과 화해하거나 지역공동체를 이룩할 수 없었다. 평화 만들기가 지연됐던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침략, 그리고 착취가 낳은 쓰라린 상처와 뼈아픈 유산들은 곪아 터질 때까지 방치됐다.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처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문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표면상 독립국가가 된 일본은 자신의 안보와 국가로서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 태평양 너머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번역 :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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