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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환호하는 '어버이' 산타의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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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환호하는 '어버이' 산타의 마음은…

[프레시안 books] 노순택의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

ⓒ노순택

1.
여기 2장의 사진이 있다. 포탄의 탄피 같기도 하고 불타버린 보온병 같기도 한 사진 두 장. 사진들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데서 생기는 선입견을 피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물어본다. "이 사진이 무엇으로 보이나요?" 사진을 처음 본 이들은 약간의 당혹감과 함께 정확히 두 가지 엇갈린 대답을 내놓는다. "포탄껍질이네요. 아니, 보온병인가?"

글쎄, 사진은 늘 이 모양이다. 맥락이 제거된 채 우리 눈앞에 불쑥 제시된 사진은 해독을 기다리는 암호문이거나, 눈에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환영일 뿐이다. 현실의 사물은 그와 다르다. 사물은 늘 맥락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놓인 자리에서 그게 포탄이 아니라 불타고 그을린 시골다방의 보온병임을 금방 알 수 있으며, 그것을 발견한 시점을 통해 거기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음을 즉시 이해한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이중적이다. 사진은 현실에서 대상을 떼어냄으로써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다시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해독되기를 기다린다. 이 '낯설게 하기'와 '관계 맺기'의 중첩 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현실의 사물은 우리에게 너무나 명약관화하기에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하는 의미를, 사진은 그리고 모든 예술적 재현들은 가져다주고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포탄 탄피와도 비슷하고 보온병과도 비슷한 이 사진들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환기해 주는가?

▲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노순택 글·사진, 오마이북 펴냄). ⓒ오마이북
노순택의 사진일기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오마이북 펴냄)는 불타버린 보온병과 일련의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 안팎에서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분단권력'의 실체를 밝히는 작품이다. 보온병이 환기하는 의미는 이러하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에 연평도를 찾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는 불탄 보온병 하나를 찾아내고서 "이게 포탄입니다, 포탄!"하며 취재진 앞에서 흔들어댄다. 현실로 드러난 북한의 호전성과 우리에게 현존하는 위험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뭔가 실물 증거가 필요했고, 그에 대한 과욕이 빚은 해프닝이었다. 북의 위협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가 다름 아닌 군복무 기피자였기에 그의 발언은 더 큰 조롱을 낳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 하나의 보온병에 지나지 않았다

너에게 묻는다 / 타버린 보온병 함부로 포탄 만들지 마라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스한 다방커피였느냐

김춘수와 안도현 시의 패러디가 즉시 만들어졌고, 급기야 안상수는 스스로 이 상황을 용서하고 즐기는 대인배의 풍모를 과시하기에 이른다. "안녕하세요. 보온병 안상수입니다."

그러나 작가 노순택이 보온병 사진에서 추려내는 의미는 집권 여당의 대표라는 자가 보여준 행태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분단과 남북의 적대적 대결이라는 객관적 상황이 우리 내부의 정치와 만났을 때 어떤 우스꽝스러운 풍경과 아이러니를 빚어내는지 보고하려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보온병 안상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다. 분단과 전쟁의 위험을 강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무망해졌을 때 권력은 금세 방향을 틀어 자신의 오작동을 작동의 에너지로 삼는다. 즉 "분단권력은 오작동함으로써 작동한다." 노순택이 책에 선언적으로 적고 있는 명제이다. 우리는 남북 정치권력들의 '적대적 공존'이라는 표현을 늘 쓰고 있거니와, 이 표현의 함의를 이렇게 명징하게 해설하는 명제도 따로 없으리라.

2.
노순택의 사진작품집이자 일기이기도 한 <잃어버린 보온병을 찾아서>는 2010년 겨울 연평도 포격 이후 2012년 겨울까지 만 2년 동안 찍은 90여 컷의 다큐 사진과 91편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이 작가는 연평도를 4번이나 방문했고, 다른 여러 사건들과 함께 보온병과 연평도 포격이 지닌 함의를 부단히 재구성하려 한다. 2012년 끝 무렵의 일기는 아주 짧은 보고문으로 되어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51.6퍼센트의 지지율이었다. (…) 분단인은 그녀를 원했다."

ⓒ노순택

일기의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 현대사가 걸어온 못난 행보에 그만 가슴이 울컥해지고 만다. 작가가 말하듯 51.6퍼센트 지지율에서 5.16을 떠올리고 분단권력의 오랜 오작동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과연 무리일까? 북의 위협과 내부의 혼란을 변명으로 삼은 쿠데타에서부터 국정원의 대선 여론조작과 종북몰이 공세까지 오는 데 과연 50년의 세월이나 필요했다는 말인가? 어둠이 내리는 그 겨울 저녁에 자랑스러운 우리 당선인의 사진을 든 어버이 산타할아버지의 점퍼 안에는 원한과 공포에 잠긴 분단인의 마음밖에 없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들 분단인의 심성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적개심은 분단 그 자체보다는 분단권력에서 유래한 것일 때가 훨씬 많다. 저 숱한 간첩사건과 민방위 사이렌과 학생 교련과 국가보안법 사범들을 창조해낸 권력 말이다. 나는 지금도 일 년에 한두 차례는 전쟁이 나서 병사로 전장에 내몰리는 공포스런 꿈을 꾼다. 50이 된 나이에! 접경지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군사문화를 일상적으로 접하며 자라서인지도 모른다. 노순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프루스트의 구절을 빌려 이와 비슷한 사정을 표현한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기억에 합치된 자아에게는 과거가 바로 현재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노순택은 자신에게서 어버이들은 물론,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게까지 간직된 분단인의 기억과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울적함이 가슴을 누르던 그때(프루스트), 나는 보온병을 보았다. (…) 비릿한 쇠 내음이 내 코를 지나 허파 깊은 곳으로 가 닿은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분의 냄새가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두려움은 마치 분단이 그러하듯 슬픈 코미디로, 우스운 참극으로 나를 몰아넣으면서 분단정치인 안상수를 내 앞에 서게 했다. 안상수의 얼굴은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상수와 보온병의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노순택의 작품집이 "분단인의 거울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작동함으로써 작동하는 분단권력은 그 작동방식이 분단인들에게 통하기에 작동한다. 그 권력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이들에게까지 분단의 기억이 깊이 침습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순택의 명제와 자각에 머무르지 않고 분단권력이 우리에게 왜 이토록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3.
노순택의 사진일기를 받아든 순간 나는 먼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사진시집 <전쟁교본>(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을 떠올렸다.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 사진집들은 거의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전쟁교본>의 발문에서 루스 베를라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과거를 잊는 사람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은 사진을 읽는 방법을 가르치고자 한다. 방법을 배우지 못한 자에게는 사진도 상형문자만큼이나 해독이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렇게 때문에 잡지나 신문에 등장하는 수천 장의 보도 사진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 상형문자만큼이나 난해하면 해독 불가능한 암호와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 <전쟁교본>(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워크룸프레스 펴냄). ⓒ워크룸프레스
신문에 보도된 사진들에 사행시를 하나씩 붙여서 구성한 브레히트의 사진시집에서 특별히 눈에 띠는 사진은 두 가지다. 하나는 커다란 강판을 겹겹이 쌓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사진이고, 또 하나는 녹슨 탱크에 불탄 채 걸려있는 죽은 병사의 해골이다. 브레히트는 거기에 이런 시들을 붙였다.

"이보게, 형제들,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장갑차."
"그러면 여기 겹겹이 쌓인 철판들은?"
"철판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형제들이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모든 걸 만드는 것인가?" "살기 위해서."

오 정글용 탱크에서 발견된 가엾은 요릭!
네 머리가 탱크 손잡이에 꽂혀 있구나
너는 도메인 은행을 위해 불 속에서 죽어갔는데
네 부모는 아직도 그 은행에 빚이 많구나.

노순택이 발견한 분단의 아이러니, 즉 오작동함으로써 작동하는 분단은 브레히트에게는 전쟁 그 자체가 품은 아이러니이다. 햄릿의 궁정에서 어릿광대로 놀던 요릭은 죽어서 해골이 되었지만 그를 어릿광대로 쓴 국가와 자본은 그에게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분단인은 적의 공포와 위험을 이겨내기 위해 적에 대한 적개심을 벼리지만, 그런 적대적 대결이 가져오는 결과들은 늘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일 뿐이다. 안상수라면 결코 가지 않을 군대에 가서 천안함 폭사로 숨진 46명의 젊은 목숨이 그러하고, 종북세력 척결을 믿고 던진 투표의 결과로 받아든 것은 복지 삭감이나 민주주의 후퇴일 뿐이다. '분단'이나 '전쟁'이라는 엄연한 사실의 배후에 숨은 연쇄관계는 해독되지 않은 채 남는다.
분단권력이 분단 또는 전쟁의 위험을 두고 꾀하는 일은 우선 이 연쇄관계를 감추거나 끊는 것이다. 권력은 우선 대중의 시야에서 분단의 진짜 모습이나 전쟁의 비극을 감춘다. 분단은 북한의 시대착오적인 왕조권력의 문제이지 우리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작용하고 있는 분단의 폭력적인 작용은 감추고 오로지 저들만의 일로 만든다.

ⓒ노순택

강정마을의 철조망과 경찰 차단벽은 분단의 진실을 고립시키고 분리하려는 분단권력의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 홀로 버티고 선 문정현 신부는 연평도 섬처럼 고립되고 감춰진 분단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그에 부응하는 해군기지 건설은 하필이면 휴전선에서 가장 먼 제주도 남단 강정마을과 구럼비 바위 앞에 와서 분단의 위험을 분담하자고 주장한다.


(남한과 북한의 군복을 입은 이들은 사실 미국인이요 서양인인지도 모른다.)

인구가 밀집된 대도시나 거대 항만은 이런 감추기 전략이 통하지 않기에 후보에서 제외된다. 먼 시골이나 서해고도에 분단의 피해를 격리해 놓아야만 분단의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다. 분단권력에게 고립과 격리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핵 발전과 초고압 송전탑의 피해를 밀양에 전가하고 고립시키는 전략이나, 시청광장의 이른바 '종북' 집회를 차벽으로 차단하는 전략은 또 안 그러한가.

분단은 나이 50세 장년 남자의 꿈에도 등장하듯이 우리 내면을 깊이 지배하지만, 실상은 허구로나 지배할 뿐이다. 우리의 일상은 분단과는 하등의 관련도 없이 영위되기에 분단을 극복한다는 것 역시 절실함이 없다. 우리는 분단 비용이 우리의 세금을 얼마나 탕진하고 있는지, 우리의 복지를 얼마나 앗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감각하다. 분단은 가까이 있는 듯하나 실상 그 실체는 멀리 격리되어 있거나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니 분단권력조차 그렇게 고립된 분단의 실체를 실감하지 못한다. 연평도 해안에 자리한 적의 상륙을 막는 '용치'는 북한군은커녕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쇼를 벌이고 있는데, 세상에, 이 예술품들은 도리어 그로테스크한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한다.

ⓒ노순택

4.
노순택이 힘주어 말하고 있는 '내 안의 분단인'은 중의적으로 읽힌다. 첫째는 안상수처럼 오작동하는 광대로서의 분단인이다. 분단권력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왜곡하는 분단 현실을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는 분단인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분단이 불가피하게 내 삶을 지배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분단인이다. 노순택은 분단의 상징으로는 연평도와 막상막하인 백령도에 탈북 화가 선무(線無)와 함께 방문했던 일화를 들려준다.

배를 타고 가는 내내 심드렁했던 그는 북한 장산곶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오르자 눈앞이 벌게졌다. (…) 사람들이 모두 내려간 뒤에도 그는 우두커니 북한 땅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는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욕이 섞여 있었다. 북에 두고 온 친구들을 향한 안부의 욕이었다.

"야이 종간나 새끼들아, 잘 지내는가! 나는 잘 살고 있다. 니들도 잘 살라우!"

ⓒ노순택

우리의 일상은 분단과 상관없이 그럭저럭 잘 사는 것이지만, 분단을 절절한 현실로 느끼는 분단인도 있는 것이다. 이 분단인에게는 분단이 고립되거나 격리되어 있는 현실이 아니요 마음대로 왜곡하고 써먹을 수 있는 수단도 아니다. 문정현 신부에게 그렇고 노순택에게 그러하며 간첩 혐의로 고통 받고 있는 유우성 씨에게도 그렇다. 통일은 아들이나 남동생이 더 이상 군대 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6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는 고통을 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통일이 어렵다면 당장 믿을 수 있는 평화의 약속이라도 말이다.

분단과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은 분단권력이 원하는 방식, 두려움과 적개심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거기 감춰진 연쇄관계를 이해하고 드러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것은 분단을 멀리 떨어진 허상이 아니라 나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연평도의 잔해를 직접 만지고 그 쇠내음을 깊이 들이마시는 노순택의 자각은 그래서 소중하다. 안상수를 한번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잊어버리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강정이나 밀양의 문제를 내 문제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친북좌파로 내몰린 길거리 노동자들의 현실을 내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마저 어렵다면 노순택의 사진에서 그런 체험을 할 수 있다. 분단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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