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출범한 대한민국 프로축구 1부리그는 '수퍼리그'-'K리그'-'K리그 클래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통산 한국팀의 우승 10회·준우승 6회 중에서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가 창설한 '양지 축구단'이 1969년 2위를 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대회 입상이 모두 프로출범 이후 나올 정도로 명칭 변경과 상관없이 아시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10회)과 입상(16회) 모두 일본의 5회 우승과 사우디아라비아의 11회 입상과 상당한 격차로 1위를 기록 중이다.
재정적으로는 일본이나 서아시아, 최근에는 중국에 밀리는 리그인 것은 사실이나 질적으로 아시아 정상급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보니 그동안 한국 1부리그에 온 외국인 선수 중에는 입단 전 경력이 상당한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한국 대중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국가대표팀과 서유럽 프로축구에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프로축구에 대한 일반의 애정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앞서 언급한 '상당한 경력자'들의 한국 프로축구 활약을 재조명하여 K리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가. 브라질대표팀 주장의 K리그 실패
2002년 1월 4일, 전북 현대는 레오마르 레이리아(42·브라질)와 계약금과 연봉 포함, 65만2000 달러(약 6억9874만 원)에 1년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주 위치인 레오마르는 2002월드컵의 예비 대회 성격으로 열린 2001년 국제축구연맹 대륙간컵에 브라질대표팀의 주장으로 등번호 5번을 달고 참가했다.
1군과는 거리가 먼 전력인 탓에 4위에 그쳤지만, 축구왕국 브라질답게 당시와 현재 기준 모두 유명 선수 다수가 포진한 대표팀이었다.
1년 뒤 브라질의 2002월드컵 우승을 함께 선수로는 골키퍼 지다(40·인테르나시오나우), 수비수 루시우(35·SE 파우메이라스)·에드미우송(37), 미드필더 밤페타(39)가 있었다.
수비수 제마리아(40)는 안정환(38)이 2000~2002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페루자 칼치오에서 뛰던 당시 동료였으며 1997년 브라질의 남미선수권과 대륙간컵 제패에 동참했다.
공격수 소니 안데르송(43)은 프랑스 1부리그(1996·2000·2001년)와 유로파리그의 전신인 유럽축구연맹컵(2004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고 1997년 프랑스 1부리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됐던 정상급 선수였다.
미드필더 겸 공격수 줄리우 바프티스타(32·크루제이루 EC)는 브라질의 남미선수권(2004·2007년)과 대륙간컵(2005·2007년) 우승을 함께하고 2010월드컵에도 참가했다.
2001년 대륙간컵 브라질대표팀에는 레오마르 외에도 2003년 역시 전북에 입단하여 '마그노'라는 등록명으로 활약한 마그누 아우베스(38)가 등번호 22번을 달고 포함됐다. 2000년 브라질 1부리그 득점왕 출신인 마그노는 전북에서 리그에서만 44경기 27골을 기록했다.
이러한 대표팀에서 주장으로 임명될 정도였으니 레오마르를 영입한 전북의 기대가 큰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레오마르는 2002년 10경기에 나와 공격포인트 없이 반칙 11회와 슛 3회로 계약을 마쳤다.
나. '한국전 출전' 브라질 공격수의 성공
한국과 브라질의 평가전은 양 팀의 공통된 후원사인 나이키의 존재감 덕분에 언제나 상당한 무게감을 자랑한다.
1997년 8월 10일 브라질은 '나이키 월드투어' 차원으로 한국과 원정 평가전(2-1승)을 치렀다.
당시 1996년 프리메라리가 외국인 최우수선수, 1996/97시즌 유럽골든부츠(유럽프로축구득점왕), 1997년 남미선수권 최우수선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방한한 공격수 호나우두(37)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는데 한국전에서 등번호 9번의 호나우두와 함께 7번 유니폼을 입고 선발 투톱으로 나온 이가 바로 2003년 울산 현대에 입단하는 도도(39)였다.
득점없이 76분을 소화한 도도의 한국전은 A매치 데뷔이기도 했는데 나이키 월드투어에서 호나우두와 함께 선발로 나오면서 성인대표선수로 첫 공식경기를 뛰었다는 것만 봐도 당시 위상이 보통이 아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브라질은 1994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1998월드컵 본선에 직행했는데 도도는 1997년 한국전을 시작으로 일본-에콰도르-모로코-웨일스와의 평가전에서 출전을 이어갔다. 에콰도르와의 홈 평가전(4-2승)에서는 2골로 A매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득점도 했지만, 결국 1998년부터는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며 월드컵 본선에 가지 못했다. A매치 5경기 2골.
울산에서 도도는 2시즌 동안 62경기 33골 4도움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44경기 27골 3도움을 했는데 11월 16일 광주 상무와의 리그 최종전에는 혼자서 4골을 넣고, 게다가 이 중 3골은 후반 36분부터 39분까지 4분 동안 몰아넣는 폭발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28골을 넣은 김도훈(43·강원 FC 수석코치)에 밀려 득점왕은 하지 못했다.
한국을 떠난 후에는 2007년 브라질 1부리그 27경기 15골 6도움, 2008년 남미의 챔피언스리그에 해당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9경기 4골 2도움을 기록한 것을 주목할만하다.
2011년 브라질 2부리그 9경기 5골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은퇴했다가 2013년 브라질 3부리그 2팀과 계약을 맺었지만, 리그 출전이나 득점 없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