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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의 화신, 감옥에 간 이유는…

[프레시안 books] 제이슨 커스텐의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

고대의 제왕들이 죽을 때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왕관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왕관을 지키는 기술, 일종의 통치 비결도 함께 전수했다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화폐 위조 기술이었다고 한다. 지폐가 등장하기 전까지,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이 돈으로 쓰였다. 값이 싼 금속을 금이나 은에 표 나지 않게 섞는 요령, 그걸 잘 활용하면 넉넉지 않은 왕실 재정으로도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권력자들에겐 관행적으로 허용된 일이 보통 사람들에겐 종종 금기라는 점이다. 왕이 위조 화폐를 만든다고 해서, 보통 사람이 따라하면 큰일이 났다. 고대 로마에서 화폐 위조범은 콜로세움 한복판에 던져져 사자 밥이 됐다. 중세 유럽에선 교수형에 처해진 것으로도 모자라, 시체가 불태워졌다.

▲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제이슨 커스텐 지음, 양병찬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지금도 마찬가지다. 화폐 위조범은 어느 나라에서나 극형에 처해진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뿌리째 흔드는 범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1994년까지 화폐 위조범을 사형시켰다. 베트남, 중국, 그리고 대부분의 중동 국가에서는 아직도 이들을 사형에 처하고 있다.

미국에선 국토안전부 비밀수사국이 화폐 위조범을 추적한다. 최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비밀수사국은 대통령 경호도 담당한다. 9·11 사건 전에는 비밀수사국이 재무부 소속이었다. 요컨대 위조 화폐 추적이 본업이고, 대통령 경호가 부업이다. 화폐 위조는 대통령 상대 테러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한 범죄라는 이야기다.

보통사람들에겐 금기인 일이 권력자들에겐 허용돼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나오는 건 이 대목이다. 권력기관은, 마치 고대의 왕처럼 위조 화폐를 발행해서 사용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다. 음모론 마니아들에겐 익숙한 이야기인데, 미국 CIA가 위조화폐를 제작해서 공작금으로 쓴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확인된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음모론이 나오는 까닭은 이해가 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권력이다. 그런데 돈을 내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다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를 낀 것과 같다. 대개는 상상으로 그친다. 하지만, 상상을 현실로 옮기려는 이들은 언제나 있다. 화폐 위조의 천재, 아트 윌리엄스가 그런 사람이다.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를 그대로 찍어냈는데, 14년에 걸쳐 그가 위조한 화폐는 약 1000만 달러에 달한다. 물론, 그는 결국 비밀수사국에 체포됐다. 그러나 기소에 마땅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검찰은 그와 협상을 했고, 결국 그가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형을 대폭 경감했다. 그는 3년 동안 감옥에서 지낸 뒤 세상에 나왔다.

출옥한 그가 맥주 넉 잔을 연거푸 마시고 말문을 열었다. 그 앞에 선 사내는 미국 언론인 제이슨 커스텐. 이렇게 받아 적은 이야기가 책이 됐다. 최근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제이슨 커스텐 지음, 양병찬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가 그것. 돈을 만드는 기술, 또는 돈을 만드는 예술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제목이다. 숨은 뜻도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이름이 '아트'다. 돈을 만드는 '아트'라는 뜻도 되겠다.

아트 윌리엄스는 지금도 감옥에 있다. 두 번째 감옥살이다. '절대반지'의 유혹이 그만큼 강렬했던 걸까. 이번엔 아들이 문제였다. 첫 번째 감옥살이 이후, 그의 사연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 기사를 읽은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화폐 위조에 손을 댔다. '절대반지'의 유혹이 그만큼 강렬했던 게다. 아트 윌리엄스가 죄를 뒤집어썼다. 영화 같은 이야기다. 실제로 미국에선 <아트 오브 메이킹 머니>를 영화로 만들려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나도 재미있게 읽었다. 멋진 외모와 뛰어난 지능, 그리고 두둑한 배짱과 가족애. 이걸 모두 지닌 주인공은 심지어 선행까지 했다. 위조 지폐로 산 물건을 구세군 자선함 앞에 놓아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달라”라는 메모를 붙여 교회 앞에 놓아두기도 했는데, 아기 옷, 이유식, 학용품 등이었다. '21세기 판 로빈 후드'랄까. 할리우드에서 군침을 흘리는 게 당연하다.

미국 달러 지폐에는 위조를 막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문양이 있고, 워터마크와 보안띠도 있다. 이런 장애물을 뚫고 위조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책의 큰 줄기인데,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해봤다.

▲ 미국 100달러 짜리 지폐.

역경을 극복한 기업인들의 이야기와 생김새가 거의 같은 줄거리 아닌가, 싶었던 게다. 주인공은 워터마크와 보안띠를 구현하기 위해 두 겹의 종이 사이에 한 겹의 종이를 끼워 넣는 방법을 고안한다. 일종의 기술 혁신이다. 또 기존 달러 지폐는 특정 펜으로 그었을 때 색깔이 변한다. 위조 지폐 식별 장치인데,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종이를 찾으려 미국 전역의 제지 공장을 돌아다닌다. 필요한 재료와 부품을 구하기 위한 기업인의 노력과 닮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문양을 구현하려고 머리를 싸매다가 차량용 페인트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산업의 벽을 허무는 융합경제, 창조경제의 사례가 떠오른다. 또 위조한 지폐를 유통할 통로를 찾아다니는 대목에선, 새로운 제품의 영업망을 구축하기 위해 애쓰는 기업인들이 떠올랐다.

기업인을 범죄자에 빗대서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뛰어난 기업인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주인공 아트 윌리엄스가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는 학교에서 월반을 권유받을 만큼 공부도 잘 했다. 스포츠와 미술에도 재능을 보였다. 비록 위조화폐를 유통하려는 목적이긴 했으나, 그는 선행도 꽤 했다. 인격이나 품성이 유난히 나쁜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왜 범죄자가 돼야 했나.

책의 앞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카고 뒷골목에 대한 묘사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범죄가 들끓는 그곳에 대한 묘사를 보며, 나도 놀랐다. 미국 사회의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건 상식이다. 대도시 빈민가 환경이 끔찍하다는 것, 한계선상을 오가는 빈민과 유색인종의 참상에 대해 나도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나도 놀랐다. 이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짓무른 속살인 걸까.

창조성과 도전 정신을 두루 갖춘 주인공이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다면, 유능한 기업인으로 성장했을 게다. 그러나 그가 자란 곳은 시카고 뒷골목이었고, 결국 범죄자가 됐다. 책을 덮고 나서, 나는 오래 전에 읽은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상을 구할 아기가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등에 날개를 단 그 아기는 성장하면, 천군만마를 이끌 장수가 될 터였다. 소문을 들은 조정에선 군사를 보내 아기를 죽였다. 재능이 뛰어난 아기가 왕실에서 태어나면 축복이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면 재앙이다.

지금도, 그리고 이곳도 다르지 않다. 창조경제를 내세운 정부는 젊은이들에게 창조와 도전을 주문한다. 기업인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사다리 아래 있는 이들에게 이런 자질이 무슨 소용일까.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 따위는 창업이나 혁신이 아닌, 범죄에나 쓸모가 있을 게다. 책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얼마 뒤, 가난에 허덕이던 세 모녀의 자살 사건이 있었다. 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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