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바닥에서 일어서는 이들에게 꽃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앳된 얼굴의 문주영(가명·21) 씨도 어색한 듯 국화를 받아 들고 10개의 영정 앞으로 향했다. 헌화를 하고 고개를 숙이자 긴 생머리가 흘러내렸다.
낯선 이의 인사를 받은 고(故) 황유미 씨도 항암 치료를 받기 전엔 긴 생머리를 했었다. 많은 이들이 머리를 다 밀어버린 투병 중의 유미 씨만을 곧잘 떠올리지만, 한때 그녀도 누구나처럼 건강했다. 영정 속 유미 씨의 모습은 동갑내기 문 씨처럼 앳되기만 하다.
어느새 7번째 기일. 아버지 황상기 씨는 전년보다 제법 많은 손님을 맞았다. 매서운 꽃샘추위에도 <또 하나의 약속>을 보고 추모제를 찾아왔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6일 저녁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 앞은 일류 기업에서 일하다 희귀병을 얻어 숨진 이들을 추모하려는 400여 명으로 채워졌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은데…”
어머니 박상옥 씨가 “유미야 잘 있었지?”로 시작하는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또 1년이 지나 3월 6일이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 생각조차 하기 싫은데 1년에 한 번씩 오네.” 준비해온 말을 얼마 하지도 못했는데 박 씨는 벌써 흐느끼고 시작했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은데 꿈속에서도 보이질 않네. 어디에 있든 아프지 말고 엄마 아빠 생각하지 마. 우린 힘들게 살고 있지만 외롭진 않단다. 너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영화도 만들었단다. 많은 사람이 봐주고 격려해 주어서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이젠 우리가 이긴 것 같아.”
박 씨를 이어 황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달 23일 삼성전자 블로그에 올라온 김선범 DS부문 홍보부장의 글이 돋운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김 부장은 이 글에서 “유가족을 회유하는 나쁜 집단으로 (삼성을) 묘사해 영화가 일으킬 오해가 너무나 큰 것 같다”고 했다.
“삼성은 아직도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거짓말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미가 다 죽어 가는데, 우리 집이 다 망해서 쪼그라드는데 거기 와서 윽박질렀습니다. 2007년 9월 1일에 삼성 안전그룹장이 ‘아버님 제가 10억쯤 해드릴 테니 사회단체 사람들 만나지 마세요’라고 회유했습니다.”
1년 사이 3명 더 사망…“피해자 가족 다 지칠 때까지 버틸 건가”
이날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이 협상 자리를 만든 지 1년하고도 하루가 더 됐다. 짧지 않은 시간임에도 여태껏 합의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려 고인들을 위해 묵념을 하자는 제안에 ‘하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하고 오라’는 싸늘한 대답만 들었다고 했다.
“대화를 10년을 할 건가. 20년을 할 건가. 내가 늙어 죽고 피해자 가족과 환자들이 자기 병에 지쳐 다 죽을 때까지, 약 올려 떨어지게 나가려는 것인지….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삼성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과 대화할 의지도 해결할 자격도 없습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황 씨가 삼성의 미온적 태도에 질려버린 1년여의 세월. 바로 이 기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3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5라인에서 일했던 ㄱ(40) 씨가 지난달 백혈병으로 숨졌고, 3라인에서 일했던 박모(42) 씨가 1월에 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6~7라인에서 일했던 협력업체 직원 강모(사망 당시 40 세)씨는 지난해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전자산업 사망자 79명 추정…이 중 73명이 삼성의 ‘가족’
숫자는 계속 커진다. 반올림이 지난해 3월 추정한 반도체·전자산업 산업재해 사망 노동자는 79명. 올해 3월 추정하는 이들은 92명이다. 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SDI 등 삼성 계열사에서만 73명이 백혈병 등 직업병을 얻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외에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제보에만 의존할 수 있는 시민 단체가 어렵사리 피해자들을 만나고 그 원인을 분석하려고 동분서주할 때, 그보다 더 마음이 급해야 할 삼성과 정부는 하늘만 쳐다봤다.
그래서 유미 씨가 숨지고 7년이 되도록 ‘누가 얼마나 어디서 무엇을 하다 죽어 나갔는지’ 정확한 피해 규모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해가 갈수록 제보자 수는 늘어나고, 그만큼 물어야 할 책임도 커진다. 어차피, 누군가는 져야 할 책임이고 미룰수록 피해자는 늘어날 뿐이다.
"유미야 사랑해. 약속 꼭 지킬게"
이날 추모제가 전년과 달랐던 점이 또 있다. 지난해 노동조합을 만든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수리 기사들이 대거 참석했단 점이다. 삼성에서 숨진 노동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삼성 마크를 단 유니폼을 입은 100여 명이 추모제에 참석했다.
경기도 양주에서 일하는 삼성전자서비스 수리 기사는 ㄴ(45) 씨는 “진작에 노조를 하고 이걸(추모제)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너무 몰랐어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노조가 생겼으니 유미 씨한테 덜 미안하도록 열심히 노조를 꾸려야겠단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 출범한 ‘삼성 바로잡기 운동본부’ 대표를 맡은 권영국 변호사는 “삼성은 직업병 왕국,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왕국, 반(反) 노조 왕국, 위장도급 왕국, 불법 경영과 사찰 왕국”이라며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들을 향해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 공정 사회를 파괴하는 삼성을 바로잡자“고 말했다.
추모제 말미에는 삼성에 하고 싶은 말을 적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92명의 황유미에게 추모의 글을 작성하는 시간이 있었다. 별로 크지 않은 널판 한가운데에 아버지 황상기 씨는 “유미야 사랑해. 약속 꼭 지킬게”라는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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