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미스터리 작가들은 창작할 때 머릿속에 결론부터 그려 놓는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 주변에 진실과 거짓을 공정하게 흩뿌리는 식이다. 미스터리 작가들은 입구와 출구를 정해두고 겹겹이 잘못된 길을 두르는 미로의 설계자들이다.
글머리부터 자질구레한 얘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암묵적인 규칙을 깰 시간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지 않고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을 다루는 건 아이러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이 지점을 분기점 삼아 돌아가는 것을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기이한 사건 - 탐정의 논리적인 추리 - 뜻밖의 결말’로 구성된 고전적 미스터리는 작가와 독자의 게임이라는 형태로 인식된다. 결승점부터 거슬러 오르는 작가의 방향성과 출발점부터 내려가는 독자의 방향성은 게임 안에서 흥미진진하게 부딪힌다. 대중 소설의 흥미로운 한 가지에 불과했던 미스터리 장르가 이렇게까지(?) 된 건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사회의 변화로 단편 위주 미스터리 시장이 장편으로 변화했고, 장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구체적인 결과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를 ‘황금기’라고 부른다.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 사이, 영어권 미스터리가 가장 활발하게 생산되고 소비됐던 황금기를 거치면서 미스터리 장르는 단단하게 영글기 시작한다.
2.
천재적인 재능, 근면한 성품, 삶 안에 간직한 미스터리, 긴 수명(?) 등. 지금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성경에 비견할 만한 판매 부수를 자랑하는 미스터리의 여왕이지만, 갓 데뷔한 애거서 크리스티는 쟁쟁한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진 신인이었다. 다섯 권을 써낼 때까지 대단한 반응은 없었고 초판 3000부 정도 팔리는 작가였다. (그래도 현재 우리나라 소설 평균 초판 부수보다는 많은 듯하다.) 하지만 1926년을 기점으로 애거서 크리스티는 본격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하나는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실종 사건 때문이었다.
3.
한적한 시골 마을, 저택, 때마침 저택을 방문한 손님들, 유명 인사의 죽음, 소식이 끊긴 가족, 의뭉스러운 고용인들, 수상한 외부인 등.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이후 계속해서 사용하게 될 특유의 무대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존경받는 의사 셰퍼드의 수기로 시작된다. 킹스애보트 마을의 명사인 로저 애크로이드의 죽음. 이 범죄는 한 부인의 자살 그리고 그 부인이 애크로이드에게 전하려 했던 어떤 편지와 관련돼 있는 것 같다. 애크로이드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살인 현장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셰퍼드 의사는 나름의 일지를 기록하며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은퇴 이후 한가롭게 호박을 키우던 에르퀼 푸아로가 있었다.
등장인물 중에서 셰퍼드 의사의 누나 캐럴라인은 특히 흥미롭다. 그녀는 풍문만으로 마을 구석구석의 인간관계를 파악하여 종종 동생의 심기를 거스르곤 하는데, 1927년 단편으로 처음 등장한 탐정 미스 마플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범인은 (놀랍게도!) 화자 셰퍼드 의사이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등장하는 ‘시선’, 독자가 당연히 신뢰해야만 하는 첫 번째 존재가 범인이라니.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당연히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그 반향은 자연스럽게 찬반 논쟁으로 이어졌다. ‘20가지 규칙(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1928년) 등을 제안하며 미스터리 장르의 견고함을 다져온 대가 S. S. 반 다인은 ‘독자를 기만한 행위’라며 공개적으로 작품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 일어난 애거서 크리스티의 실종은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여류 미스터리 작가가 사라졌고, 그녀의 남편은 알리바이로 불륜의 증거를 댔다. 무려 1000여 명 이상의 경찰이 동원됐고 1만 5000여 명이 자진해서 그녀를 찾아 나설 정도로 선정적인 사건이었다. 아서 코난 도일 경이 그녀를 찾기 위해 장갑 한 짝을 영매에게 가져다주었고, 도로시 세이어스는 걱정이 돼 그녀의 집을 찾기도 했다. 열흘 뒤 애거서 크리스티는 한 호텔에서 발견됐지만 그녀는 그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훗날 그 일을 다시 회고하지도 않았다.
4.
외피를 벗겨 보면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그렇게 매력적인 작품은 아니다. 어떤 협박이 있었고 협박을 받는 사람이 자살 직전에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한다. 마침내 살인이 일어나고 그걸 흐트러뜨리는 인물과 몇 가지 우연이 존재할 뿐이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 단출한 구성에 수기라는 형식과 텍스트의 모호함을 덧입혀 1인칭 화자가 범인이라는 기상천외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명백한 단서는 무시되거나 잘못된 정보로 읽히고 독자는 결국 놀라운 결말에 기여하게 된다. 작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발 딛는 자리마다 두드려보던 독자는 범인의 윤곽이 드러날 즈음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린 건 작가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던 것이다.
미스터리 장르에서, 이처럼 창작자가 모호한 텍스트를 통해 수용자를 속이는 기법을 흔히 ‘서술 트릭’이라고 한다. 미스터리 역사상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이 서술 트릭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거의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 서술 트릭은 절대 영상화될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니고 있지만(<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1931년 ‘이상하게’ 영화로 만들어졌다.), 미스터리 장르의 가능성을 넓히는 새로운 도구로서, (공정하다는 전제하에) 현대의 작품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스타일스 저택의 괴사건>(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황금가지 펴냄)
에밀 가보리오와 셜록 홈스의 영향 아래 있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터리 데뷔작, 에르퀼 푸아로와 헤이스팅스 대위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겉보기에는 평온한 사람들 사이에 숨겨진 격렬한 감정이 동기로 등장한다. 원숙하지는 않지만 미스터리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에르퀼 푸아로의 마지막 작품인 <커튼>(공보경 옮김, 황금가지 펴냄) 또한 이 저택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죽음의 전주곡>(나이오 마시 지음, 원은주 옮김, 검은숲 펴냄)
1939년 작, 애거서 크리스티와 더불어 콜린스 크라임 클럽의 쌍두 마차였던 뉴질랜드 여류 작가 나이오 마시의 작품. 평화로운 시골 공동체 안에 깃든 살의가 자선 연극을 통해 발산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무게감을 가지고 활약했던 두 거장의 스타일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탐정으로는 귀족 탐정의 표본 같은 로더릭 앨린 경감이 등장한다.-<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
‘어차피 모호하게 쓰였다면, 또 다른 해석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 나름의 해석이 창조적 비평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피에르 바야르는 에르퀼 푸아로의 해답을 ‘망상’으로 치부하고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전혀 다른 추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애크로이드를 누가 죽였냐고? 이쪽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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