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민영화 해법의 단초, 지역에너지공사
지난 2월 16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관계자 몇 명은 핵발전소 부지와 송전탑 인근 지역 조사차 밀양을 경유해 부산으로 갔다. 이날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기후 변화를 대량 살상 무기에 비유하며 기후 변화에 서둘러 대응하자고 연설했다.
다음날 17일에 우리 일행은 월성 핵발전소가 있는 경상남도 경주 양남면을 향했다. 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한 후 어둠을 헤치고 그곳을 떠났다. 경주에서 울진이 멀기도 하거니와 폭설로 도로 사정의 나빠 밤늦게 서야 울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경주 양남면에 있는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 붕괴 사고가 났다. 부실 시공과 관리 감독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수사 결과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국토교통부의 움직임에 있다. 서둘러 '기후 변화 대비 건축물 안전 관리 대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경주에서 보기 드물게 폭설이 내렸다는 점, 바로 일상이 된 기후 변화에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가뭄과 산불, 폭설과 폭우, 한파와 폭염이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것 같다.
체육관을 덮친 것은 폭설이라는 자연이 아니라, 총체적 부실에 더한 기후 변화라는 인재(人災)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더 이상 대량 살상 무기는 우리를 겁주는 비유로 멈추지 않는다. 기후 변화와 군사주의는 같은 뿌리에서 자라나 재난을 낳는다.
이런 비정상이라는 뿌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에너지 공공성, 더 생생한 표현으로는 에너지 기업의 민영화에도 뻗어있다.
송도국제신도시를 비롯해 인천 지역에 냉난방을 공급하는 인천종합에너지가 민영화의 수순을 밟고 있다. 회사 지분은 한국지역난방공사가 50%, 인천시가 30%, 삼천리가 20%를 보유하고 있는데, 2004년 설립 이후 매년 수백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누군가는 경영 정상화 명분으로 차라리 팔아치우는 게 낫다고 생각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그랬다. 정부의 방침에 따라 2010년부터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지분 50% 매각을 수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최근 매각 절차를 재개했다. 왜 일까. 2013년에 처음으로 흑자 경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흑자를 내는 기업이 팔릴 가능성이 높은 것은 당연지사. 송도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경제 인구와 거주 인구가 늘자 서서히 경영 실적이 개선되고, 앞으로도 이 추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매각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재정난을 겪고 있는 인천시가 매입할 여력도 의지도 없어 결국 전체 지분 70%가 민간 업체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인천 시민과 일부 시의원은 난방비 인상과 안전 관리 소홀 등을 우려해 매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고 모든 민영화(혹은 사유화)를 반대할 수는 없다. 당장 한국지역난방공사나 인천종합에너지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바람직할까. 그렇지 않다.
최근 떠오르는 에너지 전환 모델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에너지 협동조합과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지역에너지공사 모델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역에너지공사는 단기적으로는 해당 지역의 수요 관리와 효율화 그리고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에 필요한 총괄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지역 에너지 자립을 위해 모든 에너지원을 포괄하는 에너지체제 전반을 관장하도록 확대․강화될 수 있다.
비록 다른 배경에서 탄생했고 다른 성격을 띠지만, 이 모델과 운동은 미국, 독일, 영국 등의 해외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서울과 충청남도 등 지방자치단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미 제주에서 시행하고 있다.
제주에너지공사는 2012년 7월 1일에 설립되어, 현재 초기 단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하지만, 지역에너지공사 도입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주에너지공사는 "풍력 자원의 공공적 관리와 개발 이익 환수"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바람이 갖는 공유적 특성상 바람 자원은 공적으로 소유하고 그에 따른 이용료(부담금) 또한 제주도민에게 지불해 개발 이익을 지역에 환원해야 한다는 논의에서 출발했다. 이런 형태는 지역의 에너지 전환과 자립을 구축할 수 있는 핵심적인 매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려면, 지방자치단체 스스로 지역의 재생 가능 에너지 자원을 활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에 대해 이익 환원 장치를 만드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숱한 법적, 제도적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는데, 중앙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에너지 정책 수립 권한이 지방에 이양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와 같은 중앙 집중화된 전력시스템(발전 사업과 송·배전 사업)에서 지역에너지공사가 진출할 수 있도록 법제도 개선이 중요하다.
지역에너지공사는 다른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전력 산업 구조 개편과 같은 에너지 시스템을 둘러싼 쟁점은 주로 민영화(사유화)-국영화(국유화)라는 대립적 입장에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에너지 전환의 공간적 측면에서 보면, 스케일 요소가 빠져 있어 반쪽짜리 논의에 머물렀다고 볼 수 있다.
지역에너지공사 모델은 규제(국가)냐 경쟁(시장)이냐 하는 전통적인 이분법에 대한 유의미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지역 사회의 공적 통제가 가능한 에너지 기업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에너지 공공성을 담보하면서 적어도 지역의 에너지 주권과 이를 위한 에너지 분권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협동조합과 시민 기업과 같은 사회적 경제와의 역할 분담을 통해 에너지 거버넌스도 기대해볼 수 있다.
이렇게 지역에너지공사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효한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강고하게 자리 잡은 에너지 시스템의 개방화와 지방화에 대해서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꽤나 큰 논란일 일 것으로 예상된다. 관료, 전문가, 경영자, 노동자, 소비자, 시민 모두가 관심을 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방 선거도 앞두고 있는 지금이 기회이지 않을까.
에너지 전환은 핵 위험에서 벗어나고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산업과 일자리를 녹색화해 지속 가능한 사회로 진입하는 전제 조건이다. 이제라도 이 전환을 바라보는 시각을 좀 더 명확하게 해야 한다.
영국의 에너지 전환 사례를 분석한 패트릭 드바인-라이트는 재생 가능 에너지 프로젝트에 누가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개방·참여적-폐쇄·제도적 과정으로 구분하고, 누가 혜택을 보는가에 따라 내생·집합적-외생·사적 결과로 구분했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은 개방·참여적 과정을 통해 내생·집합적 결과가 도출되는 것으로 지역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지역 사회가 집합적인 편익을 누리는 것을 꼽았다. 한 마디로 지역 사람들에 의한, 지역 사람들을 위한 모델이다.
서로 정상성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비정상이라는 같은 뿌리를 둔 공기업 프레임과 사기업 프레임,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면 탈정상화가 필요하다. 이 둘은 전형적인 딱딱한 에너지(hard energy)다. 부드러운 에너지(soft energy)이면서도 강한 에너지(strong energy)인 사회적으로 유용한 재생 가능 에너지의 실험이 이 딱딱한 에너지를 약한 에너지(weak energy)로 만들 것이다.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에 격렬한 저항이 예상된다.
'초록發光'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연재입니다.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는 이 연재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현재를 '초록의 시선'으로 읽으려 합니다.☞바로 가기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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